중국 실크로드 불교 유적 순례기- ⑤ 돈황 막고굴

 돈황, 동·중앙아시아 잇는 관문
동서 교류·구법의 중요한 루트

4세기 후반부터 석굴 개착해
490여 굴, 2000여 불상 존재
벽화 이으면 45km까지 펼쳐져
17굴 ‘왕오천축국전’ 발견 유명

주요 문화재 3D 극장서 ‘한눈에’
중국 문화재 활용·보존정책 귀감

▲ 돈황 막고굴 9층 누각. 이 안에는 대불이 조성돼 있다.
경이롭다. 수많은 석굴에 수천의 불보살이 상주하고 있는 돈황 막고굴을 보고 있자면 신앙의 열정에 대한 경외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오직 ‘경이롭다’고 되풀이해 말할 수 밖에 없다.

돈황 막고굴(敦煌 莫高窟)은 천불동(千佛洞)이라고 불리며 감숙성 돈황현에서 동남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서쪽에는 모래 언덕인 명사산을 끼고 있다.

돈황은 고대 실크로드의 중요한 관문이다. 당나라 시기에 서역 문물이 유입되면서 동서문화 교류·무역의 중계지로 번영했다. 또한 몇 세기 동안 서역으로 불교 경전을 구하는 불교 승려들이나 많은 순례자들이 돈황을 거쳤고 그 과정에서 수천의 불상으로 이뤄진 석굴을 조성해냈다.

막고굴의 비문에는 석굴들의 조성 계기가 자세히 설명돼 있다. 이에 따르면 366년 낙준(樂?)이라는 승려가 구법길에 올랐고 이내 명사산 동쪽 기슭에 이르렀다. 석양이 맞은편의 삼위산을 비추자 산봉우리가 온통 금빛으로 빛나며 그 속에 마치 천만 존의 부처님이 그 금빛 속에서 광명을 나는 것 같았다고 한다. 낙준 스님은 장엄한 불국의 현상을 보고 이곳을 도량으로 삼아 수행할 것을 결심했다. 이후 스님은 불교의 예법에 따라 장인을 불러 절벽에 첫 번째 석굴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형성된 막고굴은 사막의 도시 돈황을 최고의 유적도시로 지금까지도 번성시키고 있다. 돈황 막고굴은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고, 하루에만 1만 5000명의 관람객들이 다녀가는 중국 대표 유적이다. 그만큼 보존 관리도 철저하고 연구도 세밀히 진행되고 있다.

돈황 석굴을 콘텐츠로 한 활용도 열심이다. 최근 중국 정부는 돈황 막고굴의 진수를 알 수 있는 체험관을 막고굴 근처에 건립했다. 별도로 예약을 해야 하는 곳으로 막고굴의 유명 석굴들을 3D로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순례단 역시 미리 예약을 해 이를 체험할 수 있었다. 돔 형식의 화면에 막고굴의 전실이 투영되고 불보살상은 사방을 돌며 조형미를 감상할 수 있도록 했으며, 한국어 더빙도 이뤄져 쉽게 이해하게 했다. 이는 단순 관람 일변도의 한국불교에게 타산지석이 되는 부분이다.

▲ 돈황 막고굴 45호굴. 뚜렷한 채색 소상들이 눈길을 끈다.
경변벽화의 절정
돈황은 사실상 불모지다. 이곳에 굴을 파서 석실을 만들어 불상과 불화를 조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돈황 막고굴 인근은 역암이어서 불상을 조성할 수도 불화를 그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당시 장인들은 벽면에 흙을 발라 벽화를 그렸고, 공간에 따라 강바닥에서 채취한 흙을 이겨 불상을 조성했다.

이렇게 4세기부터 조성된 석굴과 불상, 불화들은 그 숫자가 어마어마하다. 16km의 절벽에 펼쳐진 석굴은 총 492개이고 채색 소상(塑像)이 2400점, 벽화는 4500㎡에 이른다. 특히 벽화를 모두 펼칠 경우 높이 1m에 길이가 45km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막고굴을 중국인들은 ‘벽화예술의 화랑’이라고 부른다.

돈황 막고굴을 소개하는 안내서에도 석굴의 경변벽화를 가장 중요한 문화재로 꼽고 있다. 불교 경전에 담긴 내용을 옮겨 그리는 경변도를 막고굴에는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그 종류가 다양하다. 아미타불경변도 71폭, 관음무량수경변도 84폭, 정토경변도 76폭, 화엄경변도 29폭, 보은경변도 32폭, 부모은중경변도 4폭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이다.

각 도상에는 다양한 기법이 사용됐으며, 아름다운 비천, 미소를 지은 관음보살, 웅장한 금강역사 등 조화롭게 자리하고 있다. 이와 함께 경변벽화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당대의 생활상과 양식을 알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를 2012년 열린 ‘경주 실크로드 국제학술회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이신 돈황연구원 교수는 막고굴 경변벽화에서 삼국시대 한반도 사람을 묘사한 벽화가 40개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이신 교수는 “막고굴 61호를 비롯해 120호, 121호, 138호, 148호, 158호, 335호, 427호 등에서 조아리는 자세와 두 손을 모으는 동작을 가진 인물상을 만날 수 있다”면서 “이는 고대벽화 속의 한반도 사람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벽화에 한반도 사람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여러 국가의 사람이 불교에 귀의했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 그린 것”이라며 “이미 돈황에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이 있었고 석굴 조성에도 참여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 16굴의 곁간굴인 17굴. 장경동으로 불리는 이 석굴은 돈황을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곳에서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도 발견됐다.
장경동, 혜초 그리고 서구 열강
400여 개의 석굴 중 한반도와 가장 연관이 있는 석굴은 16호굴의 곁간굴인 17호굴이다. 16호굴에 들면 오른쪽 벽면에 작은 문이 나 있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가운데에 당나라 고승 홍변(洪辯)의 소상이 있다.

일명 ‘장경동(藏經洞)’으로 불리는 17호굴은 발견 당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는 돈황 막고굴의 존재를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지만 문화재 수탈의 시작이기도 했다.

이 역사를 대략적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도교 수행자인 왕원 도사는 막고굴을 도교의 영관(靈官)으로 개조하기 위해 공사를 진행했다. 1900년 6월 2일 16굴을 정리하던 중 인부가 곁간굴이 있을 것이라고 알려왔다. 결국 왕 도사는 밤중에 인부와 벽면을 떼어냈고, 안쪽에 문 하나를 발견했다. 이곳에 들어가니 흰 삼베 꾸러미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한 꾸러미 당 10개의 경전 두루마기가 들어있었다고 한다.

이후 프랑스 동양학자 폴 펠리오가 1908년 돈황에 오면서 수탈은 시작된다. 장경동 석실에 들어간 펠리오는 3주간 석실 내 문서들을 선별해 90파운드를 주고 600개의 두루마기 경전을 가지고 본국에 들어갔다. 이 가운데 하나가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다. 현재는 편목번호 P.3532로 분류돼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펠리오에 의해 막고굴의 존재가 알려진 뒤 영국의 마크 스타인, 일본의 다치바나 즈이쵸, 러시아의 올젠부르크, 미국 하버드대학교 탐험대 등이 앞 다퉈 찾아와 문화재들을 약탈해갔다.

장경동에서 파리로 옮겨진 <왕오천축국전>은 당시 한반도 수행승들의 구법 열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다. 중국 승려 의정의 <구법고승전>에는 60인의 구법승이 나오는 데 이중 9명이 신라 스님으로 그 비율은 15%에 달한다.

수 많은 구법승들은 구법을 위해 불모의 땅을 지나 천축으로 향했다. 이는 구도뿐만 아니라 중생 제도라는 간절한 서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다시 한번 곱씹어볼 일이다.
▲ 돈황 막고굴 130호굴의 미륵보살 좌상. 당나라 시기에 조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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