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백양사 下

▲ 단풍이 절정에 이른 백양사 경내의 모습이 아름답다.
백양사와 쌍게루는 고려 이후 호남 최고의 명승지로 자리하고 있다. 이색과 정도전이 쓴 기문과 정몽주가 지은 시가 그 근간을 형성했다. 후대의 시인들이 정몽주의 운자를 빌어 시정을 드러내고, 이색의 기문을 칭송하여 절과 누각의 승경을 찬탄한 것이다.

 

연좌청루공하승(宴坐淸樓共夏僧)

산중승사설유능(山中勝事說猶能)

위이간곡회의단(?澗曲回疑斷)

초체봉만난약증(遞峯巒亂若增)

암백각혐운투색(巖白却嫌雲?色)

월명환여수구징(月明還與水俱澄)

배회사진인간몽(徘徊謝盡人間夢)

만장단제의일등(萬丈丹梯擬一登)

-송순

 

쌍계루 연회에 여름날 스님과 함께하니

산중의 즐거운 일이야기 끝없다오.

구불구불 산골 물끊어졌나 의심 속에

먼 봉우리는 어지러워 새로 솟은 것인가.

흰 바위는 구름을 혐의하여 질투하고

밝은 달은 물과 함께 맑음을 다함이라.

배회함에 인간의 꿈을 다 하노니

만길 위 신선세상으로 한 계단 오르는 듯.

 

면앙정(?仰亭) 송순(宋純 1493~1583)의 이 시는 〈백암사쌍계루〉인데 《면앙집》제3권에 수록되어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송순은 조선 중기 호남 시단의 거봉이었다. 그가 태어나고 활동한 지역이 오늘날의 담양인데 장성과는 가까운 거리다. 그래서 백암사 스님들과도 교분이 있었을 것이다. 이 시는 여름 날 쌍계루에서 스님과 더불어 연회를 벌이고 있음을 알리면서 시작된다. 이어 산세와 구름과 달 등의 풍경으로 출세간의 영역인 백양사를 묘사하고 인간의 욕망이 사라진 신선의 세계로 와 있는 즐거움을 토로한다.

 

명명지지천심수(明明止止千尋水)

담담경경일말운(淡淡輕輕一抹雲)

아자무심능물물(我自無心能物物)

소삼만상자호분(昭森萬象自毫分)

 

밝고 밝게 멈춘 듯 고요한 천 길의 물속

담백하고 경쾌하게 한 점 구름 드리웠네.

내 무심함속에 일마다 편안하노니

밝음 속 만상이 절로 털끝처럼 갈린다오.

 

이정(李楨 1512~1571)의 문집 〈구암집〉제1권에 전하는 〈쌍계루〉라는 시의 경우도 쌍계루가 물속에 투영된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하며 ‘무심함 속에 일마다 편안한’ 경지를 노래하고 있다. 이는 신선의 경지라기보다는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다. 선불교 수행자들이 추구하는 경지가 바로 무심 속의 편암함인 것이다. 그런 경지에서는 모든 것이 스스로 ‘털끝처럼 갈린다’고 했으니 중생적 분별을 초월한 해탈의 경계를 말하는 것이다.

16세기 삼당시인의 한 사람인 백광훈(白光勳 1537~1582)도 19세기의 기정진(奇正鎭 1798~1879)도 쌍계루에서 맑은 세상을 꿈꾸는 마음은 다르지 않다.

 

중노비석괴명승(重勞飛錫愧名僧)

라성올지백부능(懶性兀知百不能)

천리구암쌍파승(千里舊庵雙派勝)

일루신영기인증(一樓新詠幾人增)

운귀효동봉만습(雲歸曉洞峯巒濕)

로세추단수목징(露洗秋壇水木澄)

진경미궁심이숙(眞境未窮心已熟)

석란명월몽선등(石欄明月夢先登)

 

무딘 걸음으로 애쓰니 명승이 부끄럽고

게으른 성품이 모남에 온갖 일 미숙하네.

천리의 옛 암자는 두 물줄기에 빼어난데

한 누대의 새 글을 몇 명이나 보탰던가.

구름이 새벽동구에 개니 봉우리가 젖고

이슬이 가을 절 씻김에 물과 나무 맑다오.

진경을 다하지 못함에 마음이 타는데

돌 끝에 밝은 달이 먼저가길 꿈꾸네.

 

백광훈은 이 시를 성진(性眞)이라는 스님에게 주기 위해 지었다. 제목의 원문이 ‘차쌍계루운 증성진사(次雙溪樓韻 贈性眞師)’(〈옥봉집〉제1권)이다. 앞의 수련과 경련은 다소 냉소적인 어감이다. 그러나 잘 아는 스님에게 대놓고 칭송하는 것을 피해 ‘무딘 걸음’ ‘게으른 성품’ 등의 수사들을 동원하여 열심히 정진하여 불도를 이루기를 여망하는 심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미련의 구절이 그러한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분등차탑정수승(分燈借榻定誰僧)

왕사암루입몽능(往事庵樓入夢能)

황조명변쌍안합(黃鳥鳴邊雙岸合)

단풍총리일루증(丹楓叢裏一樓增)

정의설벽운두촉(正疑雪壁雲頭矗)

경득빙계월하징(更得?溪月下澄)

인세점여료주학(人世漸如遼柱鶴)

부려비부석년등(扶藜非復昔年登)

 

등불과 책상 빌린 공부로 누가 스님인가

암자와 누대의 지난일이 꿈속에 훤하네.

꾀꼬리 울음 속에 양 언덕 합해지고

단풍 숲 고움에 누대 하나 더해 있다오.

눈길 벼랑인가 함에 구름 끝은 뾰족한데

다시 얼음골에 오니 달빛 받아 맑음이라.

세상이 점차 기묘함만을 숭상하나니

지팡이 짚고도 작년처럼 오르지 못하네.

 

전북 순창 출신의 기정진은 조선 후기 학계에 주목받을 업적을 남긴 학자다. 그가 쌍계루에 올라 정몽주의 운자를 빌어쓴 이 시 ‘차쌍계루포옹운’(〈노사집〉제2권)도 다소 냉소적인 어투로 시를 열고 절과 누각의 풍경을 통해 새로운 경지로 도달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미련의 ‘세상이 점차 기묘함만을 숭상하나니’라는 대목은 유학자의 시각에서 불교나 천주교를 바라보는 것으로 보인다. 기정진의 시대는 이미 20세기적 격변이 꿈틀대고 있었다. 그는 병인양요를 보고 쇄국적인 태세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 상소가 후의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