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된 거 못된 거를 일일이 계산하지 마세요

▲ 그림 최주현

한사람의 한 점의 마음의 불덩어리가
온 우주 세계를 다 집어삼킬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오묘한 마음을 가지고 만날 저울질만 하고 있으니
이 공부를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참된 인간으로 살고 싶은데

문) 선원에서는 생활 참선을 하는데 한국에서는 간화선을 중심으로 다른 여러 가지 공부 방법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참된 인간으로서 살고 싶지만 마음공부를 잘 모르는 저 같은 사람은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될는지요.

답) 이 광대무변한 인간의 법을, 우리가 인간으로 이 모습을 가지고 출현해서 만약에 이 도리를 모르고 그냥 사라진다면, 정말이지 다시 생산이 돼 나와도 그 차원에서 그대로, 무쇠로 깡통으로 또 생산이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원소가 무쇠고 원소가 깡통이니만큼 또 그렇게 생산이 돼서 이 세상에 출현했을 때에 또 부대끼고 바깥에서 돌아야 합니다. 귀하게 돌질 못하고 말입니다.
여러분의 차원이 금이라면은 집안에서, 몸속에서 귀하게 돌고, 정말이지 바깥에 나갈 새라 땅바닥에 떨어질 새라, 이렇게 귀하게 되고 빛이 나게 됩니다. 온 누리를 싸고도 남음이 있는 광대무변한 그 빛으로 인해서 모든 중생들을 건지고도 남음이 있고, 내 조상들을 건지고도 남음이 있고, 둘이 아니게 모든 아픔을 다 같이 할 수 있는 그러한 여건이 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 어디서 온 줄도 모르고 지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끌려 가는 이런 형상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면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나갈 수도 없고 들어 올 수도 없는 형편 속에서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르게 죽는다는 것만 알고 가는 이러한 형국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왜 믿어야 하고 찾아야 합니까. 진짜 믿는 거는 내 그 심봉을 자부처로 알고 진심으로 믿고, 바로 그 프로펠러처럼 돌고 도는 것이 우리 살림살이니 잘 궤도를 지키면서, 올바르게 보고 올바르게 듣고 올바르게 말하고 올바르게 냄새 맡고 올바르게 정진하고 올바르게 모든 행을 하면서 자기 자부처를 진실하게 믿고 거기다가 놓는 작업을 한다면, 우리는 스스로서 그 모두를 다 몰락 놓는 것이 되며, 녹이는 것이 되며 인과응보, 유전성, 이 악성, 그 모든 얽히고설킨 것들을 다 녹이게 되고 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불가에서도 불법을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참으로 참혹한 일들이 많습니다. 화두를 받았다 하고 화두를 들고서 10년이고 20년이고 그것을 들고선, 자기도 들 게 없거늘, 자기도 공했거늘 “아이고, 이 뭣고? 관세음보살! 이 뭣고?” 이렇게 들고 10년 20년 가면서도 그 참뜻을 모르고 돌아가다가, 이 몸이 떨어지면 말도 떨어지고 입도 떨어질 것을…. 네?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것이? 사람이 일체 사념을 들어오는 대로 다 놓을 수 있고 그렇게 된다면, 그렇게 막중하게 돌아갈 때 거기다 놓는다면 스스로서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전자에 내가 저 서독에 갔다 오면서 남의 짐을 가지고 오는데, 내 거로 알고 인제 거기서는 통과를 하는데, 거기 걸릴 물건이 많이 들어 있었던가 봐요. 나는 그것도 생각 안 한 거예요. 어느 스님이 그것을 좀 들어다 달라고 하니까 아, 내가 질질 끌고선 왔죠. 거기 뭐 들어 있는 것도 생각 안 한 거예요. 질질 끌고 오니까는 “에이그, 스님! 그냥 가져가시오.” 그런단 말이에요. 그래서 나는 그냥 통과가 됐는데 아, 그 맡긴 스님은 통과를 못하고 그냥 거기서 그걸 들켜 가지고는 땀을 쭉쭉 흘리시면서 그거를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물고, 땀 빼고, 또 스님이니까 창피 당하고 그래서 “아이고, 스님. 왜 그런 걸 사 가지고 오십니까? 스님이 무엇이 답답해서 그런 걸 사 가지고 오십니까?” 하니까 “그러게나 말이오. 내가 땀이 지금 방울처럼 뚝뚝 떨어지오. 아이고, 이걸 어떡하면 좋소?” 하고 고개도 이렇게 돌리지 못하곤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놈의 걸 이렇게 묶으시더라고요.

그런 걸 볼 때 나는 차라리 어린애처럼 그걸 의식을 안 했기 때문에 그냥 편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만약에 그 나쁜 것이 거기 들었다고 의식을 했더라면, 내가 사 가지고 오는 거라면 아주 거기다 뭘 넣었으니깐 다 잘 알 텐데, 나는 내가 안 넣은 거기 때문에 의식을 안 했단 말입니다. 모든 것을 의식을 두지 않고 우리가 모든 것을 놓고 간다면 그렇게 걸리지 않는단 말입니다. 우리 살아나가는 것도 그렇습니다. 든 것을 좀 놓고 가세요. 자기가 생각하고 가는 일은 벌써 생각하면 거기에 쓸 건 벌써 놓여 있어요, 놓고 가도. 자동적으로. 진리가 그러하니까. 이거를 없어질까 봐 그냥, 누가 집어 갈까 봐 거기 놓지 못하고는 부둥켜안고 다니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소? 무겁고. 남들은 놓고 가는데 나는 짊어지곤 그냥…. 짊어졌죠, 그거를 부둥켜 이쪽에 들었죠, 저쪽에 들었죠.
모두 여러분이 진짜로 자기가 자기 심봉을 믿지 못한다면은 그것은 아예 세세생생에 끄달릴 것입니다. 진짜로 믿어야 합니다. 진짜로 믿고 물러서지 말고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불가사의한 문제가 나오더라도 ‘아 참, 이럴 수가 있나. 참 감사하구나.’ 또 이런 게 나와서 모르걸랑은 ‘아이고, 이렇게 광대한 것이 나왔는데 나는 도대체 알 수가 없으니 이게 무엇인가?’ 그때 의정을 내는 거지, 아니 내 심봉, 즉 말하자면 내가 가지고 있는 참 심봉을 의심을 하면 안 됩니다. 내 심봉을 진짜로 믿되 거기서 나오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의심이 났을 때 의정을 낸 거란 얘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참나를, ‘내가 이렇게 뭐 힘이 있나?’ 이러거든요. ‘내가 뭐 힘이 있나?’ 하는 이 자체도 바로 그 심봉의 능력으로 하여금 이렇게 형성됐을 뿐만 아니라, 이 우주 전체가 이렇게 돌아간다는 뜻을 아셔야 할 겁니다.

어떻게 하면 팍 죽을 수 있는지요

문) 스님들께서는 내가 나기 이전 근본 자리를 알려면 자꾸 죽어라 죽어라 하시는데 어떻게 하면 팍 죽을 수 있겠습니까.

답) 예전에 이런 말이 있었죠. 어느 사람이 와서 “이것이 옳습니까?” 하니까 그르단 말은 하나도 안 하거든요. “어떤 게 정법입니까?” 이렇게 말을 하니까 “응. 그것도, 그것도 옳다.” “저 얕은 산은 저 높은 산하고 어떤 게 차이가 납니까?” “얕은 산도 옳고 높은 산도 옳다.” 그래서 한 번 죽기도 어렵다 했는데, 그래도 한 번 죽기는 쉬운데 같이 죽기는 또 어렵거든. 그건 또 둘째예요. 전부 같이 나투기 어렵다 이겁니다. 이 뜻을 말로만 횡하게 아는 게 아니라 내가 실천을 할 수 있는 그런 게 문제예요. 거기에는 티끌 하나 붙질 않아요. 그르고 옳은 게 붙질 않습니다. 이런 공부 하는 사람들이 마음에다가 ‘아, 저건 틀리다. 저건 옳다.’ 이러한 걸 가지면 절대 이건 할 수 없어요. 미지수의 그것을, 한 구멍도 없고 티끌도 없는 그걸 한숨에, 찰나에 뚫을 수는 없단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해 나가다가 점차적으로, 점차 뚫을 수 있을는지 모르죠. 그러나 미해질 수도 있거든. 하도 따지니까. 왜 그렇게 달기는 좋아하는지. 몇 근이나 되는지 그게 의심난다고. 네?

사람사람이 누구나가 한번 “야, 참 너 만나서 좋구나.” 하는 그 소리가 바로, 아주 웃으면서 그 소리 한번 하는 게 몇 근이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선을 지킨다면 선의 업이 있고 악으로 간다면 악의 업이 있다. 선과 악을 다 놔라.’ 이러고 싶은 것입니다. 잘되고 못된 거를 다 놓지 않는다면 그건 치우쳐요.
우리 지구가 부동한 자세로서 그 긍지를 가지고 지축이 흔들리지 않고 있음으로써 사방에서 조여드는 그 자체로 인해서 자석과 같다. 어느 거 하나 붙어도 타 버리고 만다. 타 버리는 관계상 살아난다. 이 유생 무생이 다 이렇게 해서 살고 있는 이 원리를 왜 모르는가. 우리 인간 하나 하나도 혹성이다 이겁니다. 별성이다. 한 사람의 한 점의 마음의 불덩어리가 온 우주 세계를 다 집어삼킬 수도 있는 거다. 그런데 그렇게 집어삼킬 수 있는 그 오묘한 마음을 가지고 만날 저울질만 하고 있으니 이것은 공부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이 세상에 나와서 저울질하다 간다면 저울질밖에 못하지 어떡합니까. 차원에 따라서 끼리끼리 모이고 끼리끼리 모두가 그렇게, 사람도 차원대로 살고 있고 끼리끼리, 장사하면 장사꾼들대로 모일 거고. 이 세상 이치가 다 그런 거예요.

그래서 보이지 않는 그 세계를 우리가 보이지 않는다고만 하지 말고 내 내면을 볼 수 있을 때, 내공을 볼 수 있을 때 홀연히 그 내면으로 하여금 천 리도 요 눈앞이에요. 조그마한 고 불씨 하나가 삼천대천세계를 집어삼킨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가 이것저것 따지고 뭐 남는 게 있어서 몽탕 다 태워 버리겠습니까? 본래 태워 버리고 있어요. 그런데 그걸 모르니까 그러는 거죠. 마음으로 그렇게 쌓아 놓으니까. 무조건이지 뭐 이렇게 달고 저렇게 달고, 그게 도대체 몇 만근이나 된다고….
나는 그전에 8ㆍ15 해방되고 나니까 스무 살이 됐고, 그때 얘기죠. 한암 스님한테 갔는데 예전에는 차가 그렇게 없고 참 길도 험악하고, 서울에서 거기 가려면 차를 타고도 하여튼 무지하게 걸었단 말입니다. 홍성으로 해서 이렇게 며칠이 걸려서. 그러니까 얼굴은 뭐 흙투성이고, 그건 뭐 말도 못합니다. 나 생긴 거 보세요, 조막댕이만 한 게 얼마나 그때 험했겠나? 눈물을 질 흘리면서 “스님! 얼마나 가면 죽겠습니까?” 한암 스님이 있다 하는 소리가 “눈 뜨고 푹 자면 돼. 죽는 거야, 그게.” 이 말씀 한마디가 참 실감났어요.

눈 감고 자는 거는 그건 자는 게 아니에요. 눈 뜨고 자야, 얻다가 시장바닥에 갖다가 팽개쳐도 우뚝우뚝 서죠. 잘된 거 못된 거를 남의 탓으로 돌려서도 아니 되고, 잘된 거 못된 거를 일일이 그걸 계산해도 아니 되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속으로 똑똑하더라도 좀 겉으로 무식한 척하면서, 둔한 척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공부는 둔하지 않고는 도대체 될 수가 없어요. 벌써 오관을 통해서 이 사량으로 전부 알거든. 이 머리로 다 알아 버려요. 감각이니 지각이니, 보는 거 듣는 거 이게 여기 기계적으로 다 있는 거거든요, 이게. 여길 통해서 다 그냥 자기한테 전부 오는 게 있으니 언제 그놈의 오는 거, 헤아릴 수도 없는 게 그냥 스쳐 가는데 언제 그놈의 걸 세웁니까.
그저 모든 게 어떠한 문제가 있다 할지라도 그건 자기 탓이에요. 이 세상에 자기가 나왔기 때문에 자기가 봤고, 자기가 거기 갔기 때문에 들었고, 자기가 있었기 때문에 말다툼을 하게 되고, 자기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게 이렇게 상황이 있는 거지요.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게 되면 모든 게 내 탓입니다. 못난 내 탓. 잘나지도 않고 못나지도 않았고 그저 그대로 내 탓. 그 내 탓이라는 그 한마디의 뜻이 눈 뜨고 자는 일이에요. 언짢은 일, 가정에서도 언짢은 일이라든가 부부지간이라든가 자식지간이라든가 모든 일에 대해서 말을 참 이익하게 해 줄 뿐 아니라 말을 해서 상할 일이라면 하지 말고 안에다 굴려야 하고 안에다 놔야 된다 이겁니다, 내공에다. 모든 걸 내공에서 나오는 건 내공에다 다시 놔야 돼요. 잘되고 못되고, 잘된 거는 감사하게 놓고 안된 거는 안돼서 맡겨 놓고. ‘나는 하겠다 못하겠다, 공부를. 이런 것이 공부다.’ 이런 거 다 놔야 돼요. 급하다는 거까지도 놔야 됩니다. 그렇게 놓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내가 나온 자리, 내가 나기 이전 자리를 알 수 있겠습니까. 이전 자리를 알게 되면 이전도 없고 이후도 없는 겁니다.

식탐이 조절이 안돼 부끄러워요

문) 저는 공부한다고 하는 사람으로서 식탐 하나 조절 못한다는 게 늘 부끄럽습니다. 제가 자제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마음은 체가 없어서 무한량입니다. 이 우주를 덮고도 남음이 있고 또 들고도 남음이 있고 굴리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고, 우주 삼천대천세계의 어느 곳에 아니 닿는 데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지구 바깥을 떠나서 우주를 공존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마음이 그렇게 지혜를 넓히지 못한다면 이 혹성 가운데 이 주머니 속에 들어서 한 치를 내다보지 못하고 한 치 발을 떼 놓지 못해서 이렇게 갇혀 있지 않으면서도 갇혀 있는 감옥이 되죠. 마음이 밝지 못하면 항상 어둠 속에서 헤어나질 못하고요.
우리가 이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하고 중요한지 모릅니다. 마음으로 피곤하고 아주 죽겠다고 생각을 할 때는 피곤함이 오고, 잠을 안 자고도 ‘응, 삼 일 안 잔 놈도 그놈이요, 잔 놈도 그놈인데, 그놈이 잠을 안 자고 자고가 어디 있겠나!’ 하는 생각을 했을 때는 바로 피곤이 어디로 갔는지 흔적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밥을 많이 먹지 않고도 공기를 양식 삼아 먹는다는 뜻은 우리가 식탐이 많아서 될 일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 도리를 알면 가는 대로 밝아서 항상 자기 있는 자리가 항상 이렇게 밝습니다. 밝고, 먹는 것도 항상 이 한울 안에서 바로 빵 떡, 즉 말하자면 떡을 항상 내려주시니까요. 그래서 욕심을 내거나 분수를 지키지 못한다면 항상 그 먹은 사이 없이 먹는 그 양식은 얻어 보려야 얻어 볼 수도 없을 것입니다.

밥을 한 알갱이 먹지 않고 물만 먹고도, 풀뿌리만 먹고도, 사람이 먹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 먹는다는 얘기가 있습니다마는, 또 살기 위해서 먹는다는 것조차도 놓는다면 바로 그 공기의 능력의 양식으로 모든 생명들이 같이 친구가 돼 주면서 같이 호흡을 하면서 같이 식사를 할 것입니다. 보이는 식사가 아니라 안 보이는 마음의 그 식사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식사를 하던 사람들은 바로 하루만 안 먹어도 어지럽고 골치가 아프고 그렇지만 그렇게 유년 하던 사람들은 그렇게 식사를 안 하면 가볍고, 오히려 많이 먹지 않고 그저 오며 가며 한쪽 먹고 마셔도 그렇게 좋답니다. 그리고 더운 밥 찬밥을 가리지 않죠. 따끈따끈한 밥 이런 거 가리지 않고. 찬밥이라도 오며 가며 한술 떠먹었으면, 그리고 한 젓가락 집어 먹으면 그걸로써 바로 양식이 되는 거죠. 이거 너무 가려도 뭐 별로….
우리가 항상 먹는 밥, 항상 먹는 거 한 끼니 거르면 어떻고 한 끼니 안 먹으면 어떻습니까? 그런데도 한 끼니나 안 먹으면 뭘 잃어버린 듯이 허전하고 배고프고 그렇다 하거든요. 역시 또 저도 그럴는지도 모르죠. 여러분이 나 아님이 없으니까. 바로 여러분이 나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 그렇다 말을 똑 떨어지게 할 수가 없어요.

제가 어느 때엔가 이런 예가 있었습니다. 밥을 한 사발을 줄이려니까 줄일 수가 없더군요. 한꺼번에 안 먹으면 배고프고 죽겠는 걸요. 미리 그걸 연습을 하고선 나가려니까 한 그릇을 가지고서 한 숟갈씩 줄이니까 일주일이니까 한사발이 다 없어지더군요. 그래서 그렇게 한 일주일 그래 보니까 그 다음서부터는 인제 유년 물만 좀 먹어도 그냥 대략 그게 괜찮을 수 있더군요. 그래서 그때서부터는 ‘아! 인제는 아무것도 없어도 될 수 있구나.’ 하는 거. 아니 내가 죽었다고 하고 내가 붙을 게 없다고 하고 내가 공했다고 한다는 사람이 뭘 먹을 걸 챙긴다 입을 걸 챙긴다, 덮는 걸 챙긴다 이런다면, 또 생식을 해야 된다 이런 문제가 있다면, 이거 빼고 저거 빼고 이거 생각하고 저거 생각하고 언제 죽을 날이 돌아오겠습니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와요

문) 평소에 아픈 데도 없고 그런데 가끔씩 죽고 싶은 생각도 들고 그러다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마음공부에 있어서 죽는다는 것도 이해는 되지만 극한 상황에서는 죽는다는 게 어렵기도 하고요. 어쨌든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답) 그냥 죽는다고 해서, 죽는 거 겁 안 낸다고 해서 잘되는 게 아닙니다. 지금 이 의식을 가지고, 이 차원의 그릇을 가지고 죽어 봤자죠, 뭐. 그 차원밖에 더 돼요? 그러니까 아예 죽더라도 아주 야무지게 알고 죽어야 값비싸게 그것도 옷 벗는 거다 이겁니다. 그냥 내가 옷 벗고 싶다고 해서 아무 때나 옷 벗는다고 장한 게 아니고요. 그러니까 옷 벗을 힘이 있는 것은 자유스러운 마음에서 옷을 벗고, 즉 말하자면 자기가 알준하게 이 도리를 알고 만약에 옷을 벗으면 좋은데, 옷을 벗기 전에 알아야 하는 게 열반계예요, 이름해서. 옷을 벗기 전에 알아야지 옷을 벗고 나서 알았다는 거는 안 게 아니에요. 사람이 살아 있으면서 죽어야 진짜 죽은 거지, 살지 않고 옷을 홀딱 벗고선 죽은 게 죽은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그 둘이 아니게끔 공부하는 것이 마음으로도 천백억화신으로도 나툴 수 있고…. 아이, 그게 숫자가 없는 숫자다. 천백억이 아니라 숫자가 없는 걸 천백억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요걸로다가 찾는 사람이 있으면 요게 돼 주고 조걸로 찾는 사람이 있으면 조게 돼 주고, 아파서 찾는 사람이 있으면 의사가 돼 주고 가난해서 찾는 사람이 있으면 관세음이 돼 주고, 이렇게 나투는 이 자체가 바로 죽어야 그렇게 나툴 수 있는 거죠. 살아서 죽어야 돼요, 그것도. 죽어서 죽는 게 아니고 살아서. 옛날에 한암 스님이 눈 뜨고 삼 년만 자라고 하신 그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눈 뜨고 잠을 자라고 그런 것이 뭔 줄 아세요? 지금 모든 작업을 하라는 거 아니에요? 네가 사는 게 아니라 네 주인공이 뚜렷하게 있으니 네 주인공의 심부름꾼으로 알고 그냥 거기다가만 놓고 가는 게 푹 자는 거예요. 쉬는 거고. 이유를 붙이지 않고. 이게 옳으냐 이게 그르냐 하고 따지고 이렇게 생각하는 거는 이유가 들어가서 벌써 놓는 게 되지 못해요. 이걸 생각해서 한생각에 ‘아, 이게 옳지.’ 그런다면 그냥 거기다 맡겨 놔요. ‘이게 그르지.’ 그런다면 그른 것도 거기 맡겨 놓고. 왜냐하면 그르게 된 것도 옳게 될 수가 있는 거니까. 그래서 옳게 되는 것도 거기 놔라 하는 것은 옳게 된 것이 좋다고 했으면 언짢게 된 게 거기 붙으니까 그것도 놔라 이런 거죠. 그래서 죽더라도, 죽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이 공부를 다 하고 내 마음대로 죽을 요량을 하세요.

살아난 것도, 답답한 것도, 망상도 그놈 속에서 나오지 다른 놈 속에서 나오나요? 그러니까 자는 거, 다니는 거, 밥 먹는 거, 똥 누는 거, 그냥 내가 생각하는 거, 보는 거, 듣는 거, 모든 게 한 놈 속에서 나옵니다. 한 놈 속에서 벌어져요. 이 주먹 속에서 벌어진단 말입니다. 근데 뭐가 어렵습니까. 체가 없고 걸리는 것도 없는데 뭐가 어려워요? 거기다가 놓는 작업을 하다 보면은 가슴에서 탁 ‘흥, 그러냐?’ 이래 대답이 나옵니다. 알겠습니까.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