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인의 큰 은혜 산처럼 무겁네
도인의 큰 은혜 산처럼 무겁네
  • 임연태 시인
  • 승인 2014.10.24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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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통사 下

▲ 영통사의 경선원에는 대각 국사 의천 스님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사진은 2012년 11월 15일 천태종 스님과 조선불교도연맹 스님들이 합동으로 대각국사 911주기 다례제를 올리는 모습.
운자의 대물림, 시의 멋과 맛

김창협은 영통사에서 시를 읊으며 채수와 박은을 떠올렸는데, 박은 역시 영통사에서 시를 지으며 자연에 은거해 도를 닦는 고절한 은자(隱者)의 삶을 그렸다. 박은의 문집 〈취읍헌유고〉는 그와 친분이 두터웠던 이행(李荇 1478~1534)이 편찬했다.

이행은 2편의 영통사 관련 시를 남겼다. 하나는 7언 율시이고 하나는 5언 고시인데 그 길이가 50행이나 된다. 이행의 문집 〈용재집(容齋集)〉 제4권 ‘천마록(天磨錄)’에 수록된 7언 율시를 보자.

 

우승미우문총림(偶乘微雨問叢林)

동부청한고목음(洞府淸寒古木陰)

악색담농조모태(岳色淡濃朝暮態)

계성서질단장음(溪聲徐疾短長吟)

백년천석혼여작(百年泉石渾如昨)

일일풍류갱유금(一日風流更有今)

주잔다표구불악(酒盞茶瓢俱不惡)

각수잔경박서침(却愁殘景迫西沈)

 

우연히 가랑비 속에 총림을 물으니

맑고 서늘한 골짜기 고목이 우거졌네.

묽고 짙은 산의 빛깔은 아침저녁 모습

늦고 빠른 시냇물 소린

길고 짧은 시런가.

백 년 전의 천석이 도무지 어제만 같은데

하루 즐기는 풍류 다시 오늘이 있어라.

술잔이고 찻잔이고 다 나쁘지 않지만

석양이 서쪽에 잠길까 외려 걱정이로세.

 

시인은 영통사라는 공간을 완상하며 참으로 담담하고 맑은 시상을 풀어 놓고 있다. 산 빛과 시냇물소리의 대구와 백 년 전의 자연과 하루의 풍류를 대비하는 솜씨도 대단하지 않은가? 거기에 술잔과 찻잔을 가리지 않는 호방함 속에 지는 해를 아쉬워하는 정감이 곱기만 하다.

‘영통사 앞의 물줄기는 만고에 우레 비처럼 굉음 울리지’로 시작하는 50행의 장시에서도 이행은 맑은 경물과 정갈한 시상을 조화시키는 가운데 인생의 의미를 성찰하는 선비의 풍모를 여실히 보이고 있다.

이 시의 제목은 ‘영통사 벽에 걸린 시에 차운한 중열의 시에 차운하다’이다. 중열은 앞에서 이야기 한 박은의 자(字)다. 그러니까 박은은 영통사에서 앞 사람의 시를 차운하였는데, 그 시를 다시 친구인 이행이 차운하여 시를 지은 것이다. 이렇게 운자를 대물림 해 가면서 지어진 시를 읽는 것도 흥미롭다.

 

시로 보답한 스님들의 은덕

영통사는 고려불교를 대표하는 중요한 사찰이었다. 때문에 고려후기 선비들과 영통사 스님들의 교류도 막역했다. 그러한 교류의 멋과 정을 엿볼 수 있는 시로는 조선 태종과 사돈지간인 조준(趙浚 1346~1405)의 작품이 있다. 그의 문집 〈송당집〉 제1권에 실린 7언 절구 두 수는 ‘영통사 의침법사가 부채와 시를 선물로 주어 시운을 빌려 사례하다’는 제목 아래 지어졌다.

 

오송강수양청유(吳松江水兩淸幽)

유월청풍가매구(六月淸風可買求)

만사홍진다열뇌(萬事紅塵多熱惱)

도인가혜중산구(道人嘉惠重山丘)

 

오송강 물처럼 맑고도 그윽하니

유월 맑은 바람을 사는 것도 좋겠네.

세상 풍진은 열뇌만 많은데

도인의 큰 은혜는 산처럼 무겁네.

 

월색송성사전유(月色松聲寺轉幽)

수침소진담망구(水沈銷盡澹忘求)

병부고핍광시략(病夫固乏匡時略)

타일심사복일구(他日尋師卜一丘)

 

달빛 솔바람에 절 더욱 그윽하고

물에 잠겨 다한 마음 담담해

욕심 잊었네.

병든 몸은 진실로 시대 바룰 계책 없으니

다음에 스님 찾아 물러나 살 곳

구해야지.

 

의침 법사가 어떤 스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스님과선비의 도타운 교분이 달빛처럼 은은한 시라 하겠다. 첫 수에 인용된 ‘오송강 물’은 중국에 있는 강이다. 태호에서 발원하여 동북으로 흘러 소주 가정을 거쳐 상해에서 황포강에 흘러드는 강인데, 당나라 장우신이란 사람이 〈전다수기(煎茶水記)〉에서 물의 품질을 논하며 오송강수를 16번째로 꼽았다고 한다. 시인은 영통사 스님이 부채와 시를 선물한 것을 두고 그 정을 오송강 물에 비유했다.

조준이 남긴 두 수의 시는 스님과의 교분이 주는 청량한 기쁨과 인생살이의 고뇌를 식힐 계책을 묻고 싶은 중생의 마음이 간절하게 잘 드러나 있다. 그래서 읽을수록 마음을 당기는 맛이 있다.

 

소방삼신일(少訪三身日)

문전백미심(門前柏未尋)

금봉경백발(今逢驚白髮)

배주십년심(酒十年心)

 

젊어서 삼신을 방문한 날에는

문 앞의 잣나무 찾지 못했더니

오늘 서로 만나 백발에 놀라며

한 잔 술로 십 년의 마음 달랜다오.

 

엄상투갈의(嚴霜透葛衣)

량월산청휘(凉月散淸輝)

옹슬악문법(擁膝樂聞法)

중정좌부귀(中庭坐不歸)

 

매서운 서리는 갈옷을 파고들고

서늘한 달은 맑은 빛 뿌리는구려.

무릎 안고서 법문 즐겁게 듣느라

뜰 가운데 앉아 돌아가지 않는다오.

 

남효온(南孝溫 1454~1492)도 영통사 스님들을 자주 찾았나 보다. 문집 〈추강집(秋江集)〉 제3권에 실린 ‘영통사(靈通寺)에서 밤에 얘기하다가 경(瓊) 법주(法主)께 드리다’는 2수의 시가 그의 지극한 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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