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의 꽃 절집 천정〈14〉 능가산 개암사 대웅전

대웅보전 우물천정에 베푼 세 가지 문양.
문양은 그림아닌 소리이며 진리
천정문양에 적정(寂靜)의 정밀함
어칸에 신령한 기운 쏟아져

개암사 절집은 앉은 자리가 매력적이다. 우금산 정상부에 있는 울금바위가 가람의 예사롭지 않은 신령의 기운을 북돋운다. 두 바위가 불국토를 수호하는 밀적금강과 나라연금강의 금강역사의 기세다. 울금바위는 개암사의 마음자리이자, 원력의 당처다. 산수화의 부벽준 준법의 기세를 대하는, 암산의 바위기운이 느껴진다. 능가산 반대편 자락의 내소사가 여성적이고 음악적이라면, 개암사는 남성적이고 웅변적이다. 대웅보전은 그 기세를 고스란히 품어 당당하고 카리스마를 지녔다. 건축에서 단단한 뼈대의 힘이 흐른다. 사람도, 건축도 자연을 닮는 법이다.

연꽃잎맥이 그려진 ‘하엽문’ 주두
개암사 대웅보전은 17세기 중엽에 중건된 3×3칸 건물이다. 근래에 외벽에 단청을 새로 올리면서 고색의 옛 멋과 가구식 건축 뼈대에 흐르던 힘을 잃었다. 다행히 내부는 고색 그대로다. 내3출목의 포작은 교두형으로, 짧고 강한 입체적 획들의 중첩이다. 재단된 재목들이 짧고 단단해서 강한 결속력을 보이며 화석처럼 한 몸으로 일체화를 이루고 있다.

수평, 수직이 중첩하는 단순한 뼈대끼리의 가구식 결구에서 강건한 힘이 흐른다. 살미와 첨자의 표면에는 미묘한 기운이 스멀거리듯 초새김 한 청동빛 운기문넝쿨이 꿈틀거린다. 기둥은 본질적으로 생명의 나무다. 정면 평방 위 주두(柱頭)의 모양도 예사롭지 않다. 연잎의 끝이 뒤집히고 잎맥이 그려진 소위 ‘하엽문(荷葉文)’ 모양을 갖추었다. 연잎도 연꽃의 상징과 다르지 않다. 그 발상에서 마음의 여유로움과 관용이 묻어난다. 완주 화암사 극락전이나 익산 숭림사 보광전 등에서 드물게 보이는 주두 모양이다.

용면 벽화, 전등사 법주사서 나타나

외벽의 정면포벽에서도 독특한 의장을 갖췄다. 주두와 첨자가 연잎, 연꽃줄기로 초각(草刻)된 형태다. 첨자가 좌우대칭의 연꽃으로 피어올라 역동적인 S자 곡선으로 꿈틀대면서 건축에 생동감의 운율을 불어 넣고 있다. 대웅보전 편액 위 제공의 양끝에는 벽사의 장치로 용의 정면 얼굴을 조각해 두었다. 용의 정면 얼굴을 갖춘 의장장치는 강화도 전등사 대웅보전과 예천 용문사 대장전, 법주사 팔상전 등에서도 간혹 찾을 수 있고, 일반적으로 불단의 기단부에서 종종 표현되는 벽사장치다. 벽사적 용 얼굴의 연원과 모티브는 고구려고분벽화 안악 3호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안악 3호분 전실 입구 주두에 여러 용면벽화가 나타난다.
그런데 대웅전 내부에서도 같은 취지의 표현이 보인다. 향좌측 후불벽 뒤편 상벽에 베푼 용의 정면얼굴 벽화가 그것이다. 용면(龍面)벽화에 사용된 색채는 청(靑), 적(赤), 황(黃), 흑(黑), 백(白)의 다섯 가지 오방색(五方色)이다. 벽화는 정면얼굴만 묘사한 단순한 꼴이지만, 사자의 갈기 형식을 빌려 뻗치는 힘과 신령의 기운을 드러냈다. 폭발하듯 넘치는 기운은 화폭의 경계마저 허물고 있다. 직시하는 눈빛은 깊고도 깊어서 사람 저마다 신구의(身口意) 삼업으로 행한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의 내력을 궤뚫어 보는 듯 하다.
내3출목의 살미부재 끝자락은 정면 어칸과 귀공포에서 절묘한 구상으로 마감했다. 측면이나 양협칸의 내부공포 살미끝은 넝쿨줄기에서 새싹의 기운이 뾰족하게 나오는 형태로 마감처리 하였지만, 정면 어칸의 공포와 귀포에서는 몸통을 길게 뺀 용과 봉황으로 조영해서 보궁의 풍부한 입체감과 신령함을 증폭하고 있다.

특히 어칸에는 세 포작의 주간포(柱間包)가 있어 각 주간포의 살미 끝마다 세 용이 앞을 다투듯 조영되어 유례없는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연출한다. 삼라만상 가운데 홀연히 나타나, 아래에서 보면 마치 세 용선이 편대를 이루며 무명과 미혹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형세다. 용 몸통과 살미부재는 주먹장 이음으로 이어서, 극대화 된 신령의 기운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일기일회(一期一會)의 찰라적 인연이 맺은 극적인 조우이다. 세 용의 기세는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고 신령의 체감이 현실적일 정도로 삼엄하다. 삼엄한 체감은 보다 직관적이면서도 직접적이어서 저절로 옷 매무새를 돌아보고 숙연케 한다. 신령의 훈습(薰習)이 옷에 저민다.

좌에서부터 차례로 대웅보전 내부포벽의 뒤, 정면, 측면에 두루 경영한 조형세계다.
불전건물, 연기법계 구현된 인드라망

용은 곧 신령의 기운이며, 생명 에너지다. 불전건물의 기둥과 포작은 생명력의 표징이다. 그것은 자연의 숲에서 길러 온 조형방편이다.

독일의 미학자 힐데브란트는 고딕건축의 아치형 열주(列柱)들은 숲 속 나무의 형상을 실내에 모사해 놓은 것이라 하였고, 일본의 사카이 다케시 교수도 <고딕, 불멸의 아름다움>에서 중세 고딕성당의 무수한 기둥들과 아치는 졸참나무, 떡갈나무로 무성한 중세 숲 속의 나무들과 생명력의 반영이라 주장하고 있다.
한국의 불전건물 공포구조에서도 자연의 숲과 나무의 모티브를 포착한다. 불전의 본질은 연기법계가 구현된 생명의 인드라망 세계이며, 대자대비의 세계다. 생명력의 본질은 기(氣)와 물, 법(法)의 진리일 것인데, 법당에는 그 본질적 요소들이 고도로 심화된 상징체계와 조형으로 표현하고 있다. 용과 봉황, 연화, 범자문양이 대표적이다. 본질의 뜻은 형상 너머에 감춰진 무진장이다. 언제나 그러하듯 문자나 형상에 집착하면 손가락만 보고 정작 달은 놓치게 마련이다.

넝쿨영기문 용의 구상적 신령으로 폭발

용의 몸통 위에는 봉황이 나래를 폈다. 날개는 따로 조각해서 몸통의 측면에 끼워 넣었다. 양 날개를 온전히 간직한 봉황이 없어 안타까움이 남는다.

봉황은 전등사 대웅보전 빗반자 천정조형에서처럼 연꽃가지나 연잎을 입에 물었다. 용은 여의보주를 취했고, 봉황은 연꽃가지를 취했다. 신령과 변재(辯才)를 두루 구족한 셈이다. 용과 봉황의 조형 중에서도 향우측 뒷벽 귀공포에 베푼 조형은 압권이다. 짙은 진흙빛으로 넝쿨문양의 살미로 층층이 톺아오르던 평면 넝쿨영기문이 용봉의 구상적 신령으로 폭발하는 놀라운 장면이다. 넝쿨에서 용으로 차원을 가일층 심화하고 있다. 문양과 무늬는 그림이 아니라 성스러운 소리이며 진리이고, 생명의 에너지임을 여실히 반증한다.

내3출목 위는 상벽(上壁)이다. 상벽은 회칠이 모두 벗겨지고 퇴색한 흙빛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공포 사이의 포벽에는 여래불 벽화를 모셨고, 상벽의 보다 넓은 칸에는 십이지신상과 나한상의 벽화를 베풀었다. 나한상 벽화는 해남 미황사 응진당과 익산 숭림사 보광전에서처럼 먹선의 백묘로 그려서 주목된다. 상벽의 백묘벽화에서 연담(蓮潭) 김명국의 거침없이 내달리는 일필휘지의 필선이 나란히 견줘진다.

천정양식은 3단 층급의 평행우물천정이다. 외진주 영역의 천정은 층급 계단차가 미미한 2단층급에 넝쿨꽃 형식의 영기문 문양을 갖추었다. 내진주 영역의 천정은 한 층급 더 위로 우물반자를 올린 후 6엽연화문 문양을 베푼 우물천정이다. 제일 아래 층급과 중간층의 천정은 사방벽면을 따라 각각 한 겹의 우물 띠로 가설했다. 아래 층은 45칸, 중간 층은 35칸, 내진주 천정의 우물반자는 총 85칸이다. 우물반자에 베푼 문양은 세 가지다. 변두리 부분에는 단청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능화형’ 과 ‘연화형’ 꽃을 그려 넣은 반면에 중앙부분 중심부에는 육엽연화문에 범자 육자대명왕진언을 넣었다.

대웅보전 어칸 천정과 닫집, 삼존불상. 어칸 기둥사이에서 세 용이 긴 몸통을 빼고는 신령의 기운을 내뿜고 있다. ①어칸의 용과 봉황 ②대웅보전 편액과 용의 정면얼굴 ③정면공포의 연잎 하엽문 주두 ④향우측 귀공포의 용과 봉황 ⑤포벽에 베푼 여래불 벽화 ⑥향좌측 포벽의 용면벽화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 돋보여

연화형 문양은 형태와 색상처리에서 심미적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검거나 혹은 옅은 초록의 꽃잎 사이로 붉은 기운을 띈 새싹들이 폭발하듯 미어터지고 있다. 검은 바탕의 천공에서 초신성이 폭발하는 장면을 극도로 단순화하면 저 무늬가 될 듯 하다. 영산회의 법열이 환희심으로 발산하고, 고요하고 정밀한 아름다움이 빛난다. 능화형 문양은 형태에 있어서는 4개의 연화가 대각선으로 대칭을 이루도록 배치하였고, 색상에서는 주사와 밝은 석록계 색상으로 보색대비를 주고 있다.

그런데 보색대비에서는 채도와 차고 따스함의 대비를 낮은 에너르기 상태로 낮췄다. 즉 중간 톤의 색을 취해서 보색대비의 강도를 낮춘 것이다. 그 결과 색의 결렬한 충돌이나 경박함, 요란스러움은 피하고 적정(寂靜)의 고요한 법열은 살려냈다.

작은 공간에 생명력의 법계를 담담히 담아냈다. 천정의 단순한 문양에서 적정의 정밀함이 고요히 흐른다. 독일의 미학자 빙켈만이 말한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이라는 예술의 이상을 천정장엄의 우물반자 한 칸에서 발견한다.

불전 천정(天井)에 우물이 있다. 그 우물은 깊다. 감로의 우물이고, 생명의 우물이고, 부처님의 우물이라, 미점의 꽃봉오리에 일승의 법계가 펼쳐지는 이치가 담겨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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