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벗을 때까지라도 열심히 해서 차원 높여 나와야

▲ 그림 최주현

죽어야
나를 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죽은 세상으로,
관 속으로 들어가는 놈이
이것 따지고 저것 따지고
이것 참견하고
저것 참견하고 한다면
어떻게
죽은 세상의 맛을
보겠습니까.

 

그래서 마음이
죽으라고 했습니다.
몸이 죽으라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주인공에다 놓고 일임하면
마음이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의 세계,
저승길 들어가는 길이에요.
죽은 사람의 이치를 모르고
산 사람을 어떻게 건집니까.

 

 

가을과 봄은 많이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살기 좋은 때죠.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덥고 춥고를 떠나서 그렇게 봄을 기다리는 길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어떤 얘기를 들었는데 혹시라도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할까 봐 한마디 얘기하고 질문을 받겠습니다.
원심사상(圓心思想)이란 둘이 아닌 사상입니다. 그것은 모두가 귀합된, 우주와 일체제불과 우리들이 둘이 아니게끔 된 사상입니다. 하다못해 벌레 하나도 빼놓지 않는 사상이죠. 또 법사상이라는 것은 상대가 있기 때문에 업사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원심 사상으로써 이끌어 가는 겁니다. 생각해 보면 몸 안에도 나 아닌 나가 꽉 차 있습니다. 그럼 내 몸 하나 가지고도 원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생물에서부터 그렇게 진화돼서 나오면서 거듭거듭 형성된 우리들이, 너와 내가 둘이 아니며 또 나까지도 공했으니 우리가 그대로 원입니다. 원을 세운다는 게 아니라 그대로 원이 세워졌다는 얘깁니다. 우리 몸뚱이를 고정됨이 없이 일거수일투족을 다 움죽거리게 하는 그 기둥이 있는가 하면 몸은 그 기둥을 끼고 돌아가는 수레와 같다고 합니다. 그럼 몸과 자기 근본의 기둥이 어떻게 둘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이끌어 드리는 그 사상은, 사상이라는 말도 떼어 버려야 되겠지만 말입니다, 원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있는 법사상은 이게 틀리고 저게 옳고, 네가 나쁘다 내가 좋다 이런 것이 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업이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법사상은 그대로 업사상이 될 수밖엔 없다 이런 거죠, 상대성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대로 자기 근본이 바로 원사상이죠. 말하자면 자기 불성 기둥에 수레가 같이 끼고 돌아가니까 원심력을 기르기 위한 방편으로써 주인공에다 모든 것을 놔라 했습니다.

그리고 법사상의 그 안되고 되고 하는 것에 대해 항상 제가 말씀드리죠. 잘된 거는 잘된 대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놓고, 안되는 것은 ‘너만이 되게 할 수 있다.’ 하고 또 거기 놓고, 한군데다가 집중해서 다 거기다 놔라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것은 법사상과 원사상이 둘이 아닌 까닭입니다. 이 모두가 자기가 업을 짓고 자기가 받는 것이지 누가 갖다 주는 것도 아니고 뺏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누가 대신 죽어 줄 수도 없거니와 아파 줄 수도 없습니다. 부처님이 이 자리에 계신다 할지라도 깨달음을 대신 못 해 줄 것이고, 똥 누고 밥 먹고 잠자고 하는 것도 대신 못 해 줍니다. 그러니 우리는 홀로 와서 망망대해를 지금 홀로 배를 타고 가는 도중입니다. 그래 원사상을 알아야 하겠기에 지금 둘 아닌 도리를 이끌어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게, 즉 가만히 있으면 원사상이요, 생각을 하면 법사상이요, 또 몸을 움죽거렸다 하면 수레가 돌아가듯 쉴 사이 없이 돌아가는 끝없는 진리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필연적으로 이 공부를 해야 된다는 사실을 꼭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은 중세계지만 하세계, 중세계, 상세계가 바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이 자리에 있기 때문에 내 마음으로써 그 삼세계를 다 놓을 수 있는데, 이것은 자기 생활 속에서 모든 것을 그렇게 놓는다면 다 놔지는 겁니다. 그게 놔질 때는 바로 자동적인 컴퓨터에서 입력된 게 없어지듯이 그렇게 없어지면서 그 새로이 입력 들어가는 게 바로 현실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공부해 나갈 때에는, 이 이름 저 이름 찾거나 이 형상 저 형상 찾지 말아야 하고, 이 사람이 이러면 이렇게 듣고 저 사람이 저러면 저렇게 듣고, 그러지도 말아야 합니다. 어떠한 걸 듣더라도 잘못된 것이 있다면 바로 주인공에다가 ‘아, 잘못되는 것도 너에게서 나오는 거니까 좋게 되는 것도 너 아니야.’ 하고 놓는 겁니다. 책을 보더라도 내 주인공이, 즉 말하자면 불성이 있기 때문에 내가 책을 보게 되는 거지 내 근본이 없다면 어떻게 책을 볼 수 있겠습니까. 송장이 되지. 듣는 거 보는 거 말하는 거, 모두가 다 그 불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조 스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죠. ‘내 불성이 있는 줄 어찌 알았으리까. 내 불성이 여여하게 함을 어찌 알았으리까. 내 불성이 갖추어 가지고 있음을 어찌 알았으리까. 내 불성이 만법을 자동적으로 들이고 내게 할 줄 어찌 알았으리까.’ 조금 더 보탰습니다마는 그런 말입니다. 우리가 자동적으로, 보면 얘기하고 보면 말하고, 움죽거리면 하고 그러는데 그것이 고정됨이 없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한번 말했다 하면 바로 즉시 과거로 돌아가고, 또 다른 말 할 때는 바로 미래로 향해서 가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 한 찰나 전, 한 찰나 후가 되죠. 우리는 찰나찰나 화(化)해서 변화하고 나투면서 끊임없이 이어 갑니다. 나투는 거는 움죽거린다는 뜻입니다. 이거 봤다가 저거 보고 하는 그 움죽거림. 나툴 뿐 걸리는 게 하나도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마음이 그렇지 못해서 걸림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소로 살다가 소의 습을 놓지 못해서 도로 소로 태어나듯, 사람도 공부하려는 생각이 없이 그냥 살다가 보면 회향을 잘못해서 중세계에서 살던 그 차원의 그 마음을 가지고 다시 또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 한 철 사는 데에 우리가 필연적으로 해야 할 문제가 바로 이 진리를 알아서 벗어나야 된다는 얘깁니다. 깨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그 불기둥이 자기를 움죽거리게 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몸뚱이는 수레바퀴와 같이 불기둥에 중심을 끼워서 돌아가니 그 불성은 항상, 움죽거리진 않아도 힘을 배출해 줍니다. 우리는 이 옷을 벗을 때까지라도 열심히 해서 다시는 이 세상에서 이렇게 고통받지 않게 차원과 모습과 삶을 높여서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남들을 또 건져 주게도 되죠. 하여튼 마음이 지구 바깥을 벗어나야, 다른 우주 세계도, 다른 은하계 세계도, 달과 별과 해를 다 자기를 삼아서 이 세상을 골고루 둘러보며 골고루 할 것입니다.

이 법사상과 원사상을 이론으로만 들어서 행한다면 아니 되죠. 어떤 거를 막론해 놓고 잘하든 못하든, 상대가 좋든 나쁘든, 좋은 거는 좋은 것대로 놓고 나쁜 거는 나쁜 것대로 놓되 한군데다 놔야 합니다. 우리가 나온 구멍이 그 구멍이기 때문에 들어가는 구멍도 그 구멍이고, 더 나아간다면 그 자체도 다 없는 자유자재권을 인가를 받는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공부를 하고 어느 길을 향하고 있느냐는 요다음에 하기로 하고요.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공부하러 나오지 못했다 하는 건 핑계입니다. 돼지입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 시간이 없다니요. 우린 하나 둘 건지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전체를 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둘이 아니다 하는 것은, 어떠한 꿈을 꾸더라도, 어떠한 귀신이 나오더라도, 또 산 사람을 만나더라도 내가 그리로 들어가면…. 즉 말하자면 이 마음은 하나인데 내 분신을 이 허공에 꽉 차게 할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걸 보면 그 속으로 들어가야 저항력을 느끼지 않고 내가 되는 겁니다. 아무리 악인이라도, 악마라도, 악마의 왕이라도 내가 그리로 들어가서 악마의 왕이 된다면 그런 짓을 안 할 겁니다.

그래서 보살들로 하여금, 즉 말하자면 부처님의 분신으로 하여금 천차만별의 가지가지를 건지게 하는 것이죠. 따져서 되는 일이 아니니까요. 이유가 타당하지 않고, 잘못되고 잘된 걸 모르는 사람이나 악마에게는 무조건입니다. 남을 해하는 거를 일삼아 하니까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면 하나가 되고, 열 개라면 열이 되고, 백 개라면 백이 될 수 있는 자유자재권이, 이 공부를 하면 바로 우리한테 주어진다 이겁니다.
우리가 생활하고 진리를 따르고 이렇게 하는 것이 그대로 과학이며, 그대로 의학도 되고, 천체물리학도 되고 철학도 되고, 아니 되는 게 없다고 봅니다. 이 모습은 옷이기 때문에 한 철 지나면 벗어 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옷을 입었을 때에 자유권을 가지고 이 공기주머닐 벗어나서 들이고 낼 줄 안다면, 들고 날 줄 안다면 죽어서도, 옷을 벗고도 그런 생활을 하게 됩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그것뿐만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지금 ‘원을 세운다’ 하는 것과 ‘원심력을 기른다’는 것에 대해 생각들이 다릅니다. 원을 세운다고 말하지만 이미 원은 그대로 세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원심력을 세운다는 것은 주인공을 내가 하나 세웠다는 겁니다. 공이라고 그런 뜻은 뭡니까? (주먹 쥔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시며) 바로 몸과 그 불성의 기둥, 그렇게 말해도 되고 정신계와 물질계, 이렇게 말을 해도 되겠죠. 공했다! 그랬으니까 주인공에다 모든 것을, 일체를 내 탓으로 돌려서 다 놔라. 둘 아니게 거기다 놓아라. 오늘 왜 법사 스님과 내가 법문을 이렇게 양면으로 들려 주었을까 하는 걸 가만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이리로 기울어져도 아니 되고 저리로 기울어져도 아니 되는 까닭에, 이 양면을 다 놓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우리가 지금, 죽어야 나를 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죽은 세상으로, 관 속으로 들어가는 놈이 이것 따지고 저것 따지고, 이것 참견하고 저것 참견하고 한다면 어떻게 죽은 세상의 맛을 보겠습니까? 그래서 마음이 죽으라고 했습니다, 몸이 죽으라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거기다가 놓고 일임하면 마음이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의 세계에, 저승길로 들어가는 길이고요. 과거에 죽은 사람의 이치를 모른다면 지금 산 사람을 어떻게 건집니까?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이 과거로부터 죄를 짓고 나와서 산다. 그런데 아주 고통스럽다. 이럴 때는 과거로 돌아갈 줄 알아야 그것을 지우고 다시 나오죠.

그리고 공부들 하는데 ‘비구니가 알면 얼마나 알아?’ 이러겠지만 비구니든 비구든, 부처님께선 이렇게 말씀하셨죠. “모습은 보지 말라. 모습은 천차만별로 바뀌는 까닭에 어떤 걸로 바뀌었을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으랴. 그러니까 여자다 남자다 따지지 말라. 모습은 각각이나 마음이야 어찌 같지 않으리.” 이 문제 등등을 잘 생각하신다면 고통스럽다기보다도 이렇게 살면서도 극락으로 사는 묘미가 있다 이 소립니다. 이렇게 살아도 극락으로 살 수 있는 까닭에 옷을 벗고도 극락세계에서 또 여러분을 부지런히 건져야 하겠죠. 미생물에서부터 내 자식 내 부모 내 형제 아님이 없었으니까요.

어떠한 걸 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따로따로 보진 마세요. 모두 이 불기둥 하나에서 나오는 거로구나. 아까 육조 스님 얘기했죠. ‘불성이 있는 줄 어찌 알았으리까. 여여하게 하는 줄을 어찌 알았으리까. 갖추어 가지고 있는 줄을 어떻게 알았으리까. 만법을 들이고 내는 줄을 어찌 알았으리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요. 말은 조금 달라도 그전에 나도 그런 말을 하고 갔지만, 육조 스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걸 근래에 알았어요. 그러면 어떻게 육조 스님과도 둘이겠습니까? 일체제불과도 둘이 아니죠. 진리는 하나지 둘도 아니요, 진리는 공한 것이 진리란 말입니다. 그러면 이걸로써 끝마칠 테니까 질문하십시오. (질문자에게) 바짝, 편히 앉아요. 편히 앉으라니까요. 다리 안 아프게 해 줄 사람이 따로 없어요.

질문자1(남): 스님, 저는 지금 심등회 회원으로 있습니다. 오늘 스님께 세 가지를 여쭤 보려고 나왔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물리학을 강의하고 있고요. 한 2, 3년 전부터는 정신과학회 회원으로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아본 것에 의하면 세계적으로 정신과학에 대해서 저희 과학자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게 연구되고 있고, 특히 중국의 경우에는 기공과학이라고 하고 인체과학이라고 해서요, 굉장히 많은 종교인들이 나와서 과학자들이나 일반인들한테 수행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히 중국 기공계를 예로 들자면, 매일 수련하는 사람이 3백만 이상이 되는 걸 중국 십대기공이라고 말하는데요, 벌써 십대기공만 해도 중국의 3천만 인구가 매일 수행을 하고 있다는 거죠. 그런데 그러한 수행법, 기공이나 인체과학들이 도교나 혹은 불교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도교에서 나온 가르침을 전하는 분들도 어디 마음의 본 자리가 하나지 둘이냐 그러면서, 불심이나 도교를 통해서 들어가는 자리나 같은 자리라고 하세요. 그런데 저희들에게 여러 가지 초능력들을 보여 주면서 이러한 것들을 앞으로 과학자가 연구해야 되고 이러한 과학들을 연구하는 나라가 앞으로 강국이 될 거라고 그렇게 얘기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입장에서 봤을 때 중국도 벌써 수천만 이상이 수행을 하고 있고 많은 과학자들이 거기에 관심을 갖고 있고요, 미국의 경우에도 소림사에서 나오신 ‘엄신’이라는 분이 미국에 한번 다녀가고 나서요, 대단히 많은 미국의 과학자들이 그분이 소림사에서 배운 수련법에 따라서 열심히 수행하고 있다고 그럽니다.

그런 세계적인 조류가 단순히 지나가는 하나의 바람인지 아니면 앞으로 그분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정말 미래의 국력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어떤 학문으로서 자리잡고 그 나라의 국력의 척도가 되는 그러한 부분이 될 것인지,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해서 스님의 의견을 여쭙고 싶습니다.
큰스님: 그것은 전체 무(無)의 세계에서 자유자재하는 그런 일과는 달리 한 발 내려딛고 이보(移步)의 경계로 몸을 움죽거리게 하는 겁니다. 기공이라든가 또는 무술이라든가 하는 전체가 말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경지 속에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연구팀들을 두고 하는 것은, 자기가 연구하는 것을 주인공에다 다 일임하면서 연구를 하되 거기서 다 연구를 하게끔 만드는 겁니다. 거기에 둘이 아니게 통할 수만 있다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죠.

그러니까 뛰고 날면서 그렇게 몸으로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데서 몽둥이를 들고 와서 때려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데서 차례차례 걸려서 나오는 자기의 운명은 도저히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로케트가 다니고 이러는 시대에 그것을 그렇게 몸으로 한다고 얼마나 막아지겠습니까?
로케트가 잘못해서 우리 전체를 죽일 수 있다 이런다면 내가 로케트가 돼야 하고, 물에 들어가면 내가 용신이 돼야 하고, 어떠한 혹성이 우리 지구에 와서 부딪친다든지 이럴 때는 내가 그 혹성이 돼야 하고…. 이러한 문제 등등이 헤아릴 수 없는데, 기공 같은 것은 지금 요 몸뚱이가 사는 동안만 배워서 하는 거뿐이죠.

내가 지금 이끌어 가는 거는 세세생생에 끝없이, 우주에 발판을 두고서 과거 미래 현재를 이끌어 나가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한다 못한다, 배운다 안 배운다 하는 것을 다 놔야 되죠. 부지런히 뛰어서 연구하면서도 그것을 자기가 한다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자기 불성인 주인공이 바로 자기 몸뚱이를 움죽거리게 해서 하는 거니까요. 더군다나 몸뚱이 속에 생명들이 잔뜩 들어 있는데, 더불어 같이 사는 한 개체가 자기가 했다고 그럴 수는 없으니까요. 그건 수박 겉을 핥는 격이나 똑같습니다. 그러고 어떻게 수박의 맛을 봤다고 하겠습니까?

질문자1(남): 감사합니다. 그럼 두 번째 질문 올리겠습니다. 제가 여기 선원에 나온 지는 한 4, 5년 됐습니다. 그리고 정말 스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한 시간을 드려도 모자랄 정도로 많지만 사무장님께서 간단하게 하라고 그래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한 번만 더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렵게 나왔기 때문에 제가 그동안 공부하면서 의문 났던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가지는 제가 공부해 본 바로는, 공부를 뭐 그렇게 열심히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스님의 가르침대로 나름대로 공부한다고 하면서 전체적으로 느껴졌던 거는, 결국은 이 주인공을 붙잡고 가는 속에서 점점 저를 안으로 매진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고요. 제가 이 선원에 오기 전에는 밖에 상당히 관심이 많아서 사회적으로도 좀 명예를 얻고 싶고, 이런 거 저런 거 갖고 싶고 이런 것들이 많았는데, 그런 밖에 대한 관심이 점점 줄어들면서 안으로의 관심이 높아지게 된 걸 정말 감사드립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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