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의 꽃 절집 천정〈8〉 황악산 직지사 대웅전

대웅전 천정에 장엄된 다양한 범자. 총 330여 우물 칸에 심어져 있다.
불전 범자 장엄, 한국과 티베트 뿐
13세기 원나라 티베트 양식 유입
후불탱화, 범자로 밀교적 결계 장치
범자 ‘옴’은 생명력 가득한 법계 상징

역사적으로 불상이 등장한 때는 기원후 1세기경으로 인도의 간다라지역과 마투라지역에서 최초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다. 석가세존의 입멸 후 불상이 나타나기까지 무불상시대에는 보리수, 법륜, 연화좌, 불탑 등을 통해 부처님 존상의 상징으로 표현했다. 불교는 미묘본심의 깨달음의 종교다. 진공묘유의 진리법계는 부처께서도 대중설법을 차마 망설인 불가설불가설의 불가사의로 미묘하다. 개미에게 바다의 실체를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 광대무변하고 미묘한 뜻은 언어의 형용으로 그 실체를 드러내는데 한계를 가진다. 그래서 언어가 끊어진 곳, 곧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자리엔 고도로 관념화 된 상징의 이미지로 그 자리를 대신한다.

범자는 부처의 세계를 담은 종자
밀교진언(眞言)은 팔만사천 경전의 법문을 압축한 만트라다, 진언은 한량없는 깊은 뜻의 다라니, 곧 총지(摠持)를 담은 신묘한 주문(呪文)이다. 진언을 염송한다는 것은 방대하고 현묘한 경전내용을 직감적으로 체험하는 추체험이라 할 것이다. 마치 예천 용문사 대장전에 있는 윤장대를 돌려서 경전을 읽는 효과를 갖는 것과 같은 이치다.

불전조형에 장엄된 범자(梵字) 한 자 한 자는 거대한 부처의 세계를 담고 있는 종자(種字)다. 마치 1,000억개의 태양계를 가진 하나의 은하를 단순한 나선문양으로 표현하는 원리다. 범종에, 향완에, 부도에, 새긴 범자는 문자언어로도, 조형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화엄법계의 심인이다. 범자는 문자의 뜻과 조형의 아름다움, 생명력의 에너지를 두루 총섭한 불가사의한 상징의 힘을 갖추고 있다. 범자 너머에 부처님께서 계시는 까닭일 것이다.

직지사 대웅전은 그 범자의 세계다. 고창 선운사나 서산 개심사, 양산 통도사 대웅전, 봉정사 대웅전 등에서도 범자 진언장엄을 통한 화엄법계의 관법(觀法)을 드러내고 있으나, 직지사 대웅전의 경우는 모든 우물천정 칸칸에 범자의 종자를 심어 유례를 찾기 힘든 거대한 종자자만다라(種子字曼茶羅)를 구현해냈다. 불전건축에 단청의 빛을 입히고 그 속에 범자를 심는 장엄양식은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와 티베트에서만 나타난다. 세계불교미술사에서 거대한 불화 역시 티베트와 한국에서만 각각 탕가와 괘불탱으로 나타나는 것을 함께 떠올려 보면, 그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13세기 몽고족 원나라를 통하여 티베트의 라마불교양식이 한국불교에 깊숙이 이식되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몽고족이 침략한 고려 13세기 이후 한국의 불교장엄에 라마불교의 탑 양식 등, 전에 없던 티베트양식이 다양하게 출현하였고, 불전천정, 법구, 기와, 불화, 불상, 복장유물 등 곳곳에 범자장엄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다. 범자 한 자는 대지에 뿌려지는 씨앗과 같은 종자(種子)다. 꽃과 열매를 볼 수 있는 불성의 종자다. 동시에 부처의 상징으로 압축된 종자불(種字佛)이다. 직지사 대웅전은 화엄의 밭이다. 불성과 부처가 두루 편재(遍在)하는 유비쿼터스(Ubiquitous)의 진여법계다.

윗줄 사진은 지붕기와와 후불탱화에 결계로 장치한 범자이고, 아래는 보살벽화이다.
이중 삼중의 범자진언 결계 구축
직지사 대웅전의 범자종자들은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독특하다. 결계진언적 성격이 두드러진 까닭이다.
‘결계(結界)’라는 말은 어떤 성스러운 것을 구획함에 있어서 부정이나 위해로부터 신성과 안전을 유지하고자 취하는 호위의 경계다. 독충과 위해세력 등 마장의 침입으로부터 청정가람을 보위하는 것이다.

결계의 방식에는 담이나 목책, 오색실을 두르는 것과 같은 물리적인 방식이 있는가 하면, 밀교적 진언을 통한 관법(觀法) 결계방식도 있다. 관법의 결계방식은 진언의 만트라를 주문하여 밀적의 고차원적 에너지를 불러내서 공간의 신성과 안전을 도모하는 방식이다. 가시적인 장엄에서는 진언종자를 베풀어 염송을 통한 다라니진언을 대체 구현한다. 직지사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불 삼존불과 그 후불탱화를 모신 신성의 공간이다. 불전공간에 이중, 삼중의 범자진언 결계를 둘러쳐서 신성을 계호하고 있다.

‘옴’ 범자는 에너지와 진리 특이점
범자진언 결계는 먼저 대웅전 지붕의 수막새를 통해 결계를 쳤다. 수막새 드림부에 범자를 빠짐없이 넣었는데, 연화문의 화심부분에 ‘옴’ 한 자(字)를 새겼다. 범자 ‘옴’은 생명력의 파동에너지와 진리로 가득한 진여법계를 상징한다. 단지 한 자에 불과하더라도 무한의 시공간으로서 그 차원을 측정할 수 없는 비선형적 특이점의 성질을 갖추고 있다. 빅뱅의 특이점인 한 점에 만유의 처음이 있음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지붕의 기와장엄에서 주목할만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대웅전 지붕끝 수막새에 얹은 흰색 도자 연봉장식이다. 이 연봉장식은 양산 통도사 적멸보궁과 서산 개심사 대웅전에도 나타나는데, 이 불전들은 한결같이 범자 종자불이나 다라니진언이 세심하게 구현된 불전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대웅전 삼존불 후불탱화.
팔엽연화 꽃잎 속에 금빛 실담범자
보다 광범위하면서 집중적인 범자 진언결계는 사방연속으로 종자만다라를 구현한 천정장엄에서 두드러진다. 직지사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장방형에, 내3출목을 가진 건물이다. 사방 한 칸 폭의 외진주 영역의 천정은 빗반자 우물천정이고, 나머지 내진주 영역의 천정은 평반자 우물천정이다.

범어사 대웅전 천정처럼 빗반자와 평반자 모두 우물천정이고, 모든 우물칸에는 회전하는 팔엽연화 꽃잎 속에 감싸인 금빛 실담범자(悉曇梵字)를 새겼다 . 외진주 영역의 범자 우물칸은 170여 칸이고, 내진주 영역의 범자 우물칸은 총 160칸이다. 실담범자 한 자 한 자는 고도의 상징성을 띤 다라니 진언이자, 부처님의 세계다. 법계는 갠지즈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중중무진의 삼천대천세계다.

언어도단, 심행처멸의 경지를 직지
진정 우리는 개미에게 저 광대한 바다의 실상을 어떻게 설할 수 있는가? 그 사유는 형용의 언어가 끊어진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이고, 마음마저 갈 데가 없는 심행처멸(心行處滅)의 경지다. 인간의 인식작용으로는 더 이상 실상을 드러낼 수도, 형용할 수도 없다, 문자언어도, 조형언어도 그 빛을 잃게 마련이다. 오직 범자의 방편을 빌려 무설의 불립문자로 직지(直指)할 뿐이다. 우물천정 칸칸에 장엄한 범자는 진리의 끝간 데, 곧 진제(眞際)의 경지를 들어 보이는 직지의 달(月)이다. 그 때 천정은 금니 종자로 새긴 월인천강의 심인이 천공 가득 대자대비로 출렁이는 해인의 바다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직지사 대웅전에 장엄된 범자체계를 주의깊게 살펴보면 보다 조직적이며 보다 분명한 목적의식이 감지된다. 지붕의 기와명(銘)도 그렇고, 일반적인 육자진언을 넘어 다라니라고 볼 수 밖에 없는 범자집합을 천정 전면에 광범위하게 장엄한 것도 예사롭지 않다. 대웅전에 모신 삼존불 후불탱화를 보면 비로소 그 뜻이 풀린다. 삼존불 후불탱화 테두리에도 저마다의 화폭에 담은 부처님의 존상과 관련성을 가졌을 것으로 짐작되는 다라니 진언을 질서정연하게 세밀히 채워 넣고 있다. 그 배열형식이 건축물에 담장이나 목책을 둘러 공간을 구획하고 제한하는 방식을 연상케한다.

대웅전 천정. 빗반자와 평반자 모두 우물천정이다.
천정범자 불국토수호의 결계
그것은 후불탱의 테두리에 범자를 둘러서 실담범자를 통한 밀교적 결계를 장치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즉 진언종자로 삼존불 존상을 결계함으로써 삼존불의 청정 불국토를 수호하고 있는 것이다. 석가여래의 탱화에는 166자의 범자가,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 탱화에는 둘다 170자의 범자가 장엄되어졌다. 이러한 광범위한 범자 집합을 통한 결계형식은 유례를 찾기 힘들다.

단지 1767년에 제작된 통도사 석가여래 괘불탱에서 드물게 같은 형식의 범자 진언결계가 나타난다. 그 밖에 보경사 괘불이나 진안 금당사 괘불에서도 종자진언이 나타나며, 후불탱화로는 구례 천은사 극락보전 아미타후불탱에서 아홉자 범자진언이, 그리고 고창 선운사 대웅보전 후불벽화에서는 후불벽화 위 여백에 다라니를 적은 독특한 양식이 나타나고 있다. 직지사 대웅전 범자운용에서 보다 분명한 의지는 부처님의 불국토를 수호하려는 결연한 결계의식이다. 그 의지가 지붕에서, 천정에서, 후불탱화에서 반복적이며 집합적 군집으로 선명하게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330칸 범자의 메트로폴리탄 구성
직지사 대웅전 천정에는 무려 330여 칸의 우물격자가 있고, 그 칸칸마다 실담범자 종자가 연화의 화심에서 저마다 불멸의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일종의 범자로 이루어진 강력한 에너지의 메트로폴리탄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실담범자 낱낱은 종자불이며 동시에 밀교진언의 내밀한 힘을 지니는 까닭에 직지사 대웅전 천정은 곧 불국의 만다라를 이룬다. 그 법계는 부처님의 거룩한 신성을 수호하는 진언결계의 막으로 광대하게 펼쳐져 있는 태장계만다라이며, 동시에 금강계 만다라다.
불보살의 종자를 천지간에 심었으니 부처와 보살이 다투어 나투시는 것은 불을 보는 일이다.

대웅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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