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2보개회향

행동과 선근을 키우고

허물은 멈추고 큰 원을 세워

일체중생 구제해야

수행해서 극락세계의

지경에 이르면 ‘왕생회향’

즐겁게 노니는 것만이 아니라

정토의 업 보은해야 한다

발심을 하고, 무상보리심을 이룩해 나가는데는 방편(方便)이 필요하다. 방편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방편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행근본방편(行根本方便)이다. 자기가 하는 행동, 그러니까 발심하는 행동의 근본이 되는 방법. 둘째는 능지방편(能止方便). 잘못을, 허물을 그칠 수 있는 방법. 셋째는 발기선근방편(發起善根方便). 선근을 발해 일어나도록 하고, 다시 이를 더하고 키워 생장(生長)케 하는 방법. 넷째는 대원평등방편(大願平等方便)이다. 큰 원이란 평등해야 한다. 이를 평등하게 하는 방법.

행근본방편(行根本方便)은 이를 좀더 자세히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일체의 모든 진리라는 것은 이를 우리가 터득해 볼 때 진리 그것, 그 자체에는 결코 진리다, 무엇이다, 하는 그런 상(相)이란 없다는 것을 안다. 이를 깨달았다면 우리는 그때 벌써 망녕된 생각을 여의었을 때다. 그리고 망녕된 생각을, 견해를 벗어난 지경이란 생(生)과 사(死)라든지, 못살겠다든지, 잘 살아 보자는 등 하는 그런데에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이다. 일체의 진리 현상이란 인연에 화합(和合)된 것이다. 인연의 화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업과(業果)라고 한다. 우리의 행동이 진실하고, 부실함에 따라 그대로 역력히 나타나며, 진실한 대비심(大悲心)을 일으키어 모든 복덕(福德)을 닦아 나가는 것은 뭇사람들, 대사회(大社會)의 모든 사람들을 이끌고 섭화(攝化)해 나간다는 것이다. 마음을 맞추어 수순하고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경에서는 죽는다는 생각에, 이를테면 정지 상태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며, 항상 정진을 거듭하는 것이다. 이는 진리에 수순하고, 방일(放逸)하지 않는 지경이다.

또 둘째의 능지방편(能止方便). 굳힐 때에 이르러서 능히 굳힐 수 있는 방법이다. 이것이 무슨 소리냐 하면 참회와 반성을 하고 그래서 모든 그릇된 짓을 안 하도록 하고, 즉 굳히고 그리고 이미 한 일을 다시는 되풀이 하여 증장한다거나 해서는 안 되겠다. 해버린 일, 허물이나 과오는 돌이킬 수는 없지만 지난 일에 대해서는 오로지 반성과 참회가 있을 뿐이지 이를 비호하거나 변명함으로써 자기 합리화를 꾀하여서는 안 된다. 모든 진리에 수순함으로써 진리에 늘 순종하고 이를 따름으로써 과오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셋째의 발기선근방편(發起善根方便). 부지런히 삼보(三寶)에 공양하고, 예배드리고, 찬탄하고, 수희하고, 두호하고, 이런 연고로써 자기 스스로의 업장(業障)을 말끔히 씻어 버리고 선근(善根)을 증장(增長)한다. 항상 진리에 수순하고 연고로 하여 우리는 어리석고 얼빠진 치(癡)의 장애(障碍)를 벗어나야 한다.

넷째의 대원평등방편(大願平等方便). 우리가 지금 예경제불(禮敬諸佛)부터 수순중생(隨順衆生)까지에 걸쳐 얘기한 바이지만 발원(發願)을 하고 그대로 다 보현(普賢)의 행을 해 나가야겠다. 다시 말하거니와 미래의 겁(劫)·중생계(衆生界) ·허공계(虛空界)·중생업(衆生業)이 다하도록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의 이와 같은 예참(禮懺), 광수공양(廣修供養), 칭찬여래(稱讚如來)·항순중생(恒順衆生)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중생을 교화하고 건져 나감으로써 하나라도 남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일체 중생을 모두 다 건져 주어야겠다는 큰 원력을 세워 구경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평등하고, 둘이 아니라는 것을 깨쳐야 하는데 이 자리에서는 자타(自他)의 구별이 없어지고 거룩한 니르바나가 앞에 있을 뿐이다.

‘우리 다 같은 행원(行願)의 동반자들, 대중이 모두 한 곳에 자꾸 모여.’

이 게송(偈頌)에서 동행자(同行者)란, 우리가 더불어 예경제불, 칭찬여래 등의 행원을 하는 모든 대중을 이른다.

‘몸과 얼굴과 코, 귀, 입, 말과 마음이 다들 동등하여 이런 사람들 끼리 닦아 나간다.’

신구의업개동등(身口意業皆同等)이라는 것은 눈·코·귀 같은 몸뚱이가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고, 말도 꼿꼿이 잘하며, 정신 상태도 건실한 사람들, 그들이 어느 한 군데도 빠지는 데가 없는 이들 끼리 모여야 된다는 것. 그래야 수행하는데 지장이 없고 편리하다는 것. 불사(佛事)에는 몸의 건강이 상당히 문제시 된다.

‘우리는 보현(普賢)의 수행을 닦아 행복을 죄다 이룩하고, 회향(廻向)하여 바라건데 번뇌 망상에 빠진 중생들로 하여금 빨리 무량(無量)한 밝은 부처님의 지경에 이르러 함께 살고자 한다.’

보현행(普賢行)이란 예경제불, 칭찬여래, 광수공양 등의 수행. 무량광(無量光)은 헤아릴 수 없는 대사회의 광명. 불찰(佛刹)은 밝은 부처의 지경. 그런데 이 회향은 비교종교학(比較宗敎學)으로 볼 때 불교에만 있는 것으로서 다른 데서는 찾을 수 없는 중요한 특색이 되어 있다. 다른 종교에는 이것이 볼 수 없다던가, 있어도 그렇듯 선명치 않다. 회향에는 앞의 회향삼처(廻向三處) 말고도 두 가지가 있어 왕생회향(往生廻向)과 환상회향(還相廻向)이 있다.

왕생회향은 우리가 수행하여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극히 안태하고 낙되는 그런 지경에 애써 이릅시다, 하는 말로 이것이 성취되었을 때 왕생회향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그런 극락세계에 가, 연꽃 위에 앉아 그만 할 일 없이 마냥 즐겁게 노닐기만 하느냐? 그런데 이래서는 안 된다. 그러한 지경에서 다시 환상회향을 하여 괴롭고, 쓰라리고, 살기 어려운 우리 인간 사회의 고해(苦海)로 다시 나와 고해의 중생들과 더불어 호흡하고, 이 사람들과 함께 정토(淨土)의 업(業)을 보은 감사해야 한다. 그러한 생활이 이 지경에는 있어야 한다. 앞에서도 말한 바이지만 회향(廻向)·발심(發心)·믿음, 이 삼자(三者)는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밀접한 관련으로 얽히어 있다. 믿음은 그 중에서도 모든 것의 원 토대며 발심과 회향을 한 줄로 꿰뚫고 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