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쟁아카데미·시민행성 조성택 교수(고려대)

5강 무불시대의 붓다들
 B.C 50~A.C 400까지 무불 시대
보살시대 한 전형 상비보살 탄생
대승불교의 진화와 밀접한 연결
“대승불교 출발 종교성에서 찾아야”

대승불교적 요소는 일찍 시작되었지만 이에 대한 자각 자체는 상당히 뒤에 나타납니다. 기원전 50년에서부터 대승교단이 성립되는 400년 경까지의 500년 정도의 시간을 보살시대,  무불(無佛)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보살시대에는 상비(常悲)보살이라는 보살이 있습니다. 늘 울고 다니는 보살이라는 뜻이죠. 저는 <반야경>을 읽으며 늘 울고다닌다는 그 뜻에 마음이 꽂혔습니다. 보살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울고 다닐 수 있는지 굉장히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생각했습니다. 이 상비보살이 어떻게 진화해왔나를 살펴보면 대승불교의 등장과도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보디사트바의 보디는 깨달음의 지혜 ‘보리’라는 의미이고 이것이 보살이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보살이 여성신도를 가르키는 용어지만 원래 ‘보살’은 부처님 전생을 일컫는 말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연등불 수기>에서 보살의 관념을 살펴볼 수 있는 보살은 미래의 성불이 확정된 존재를 말합니다.
<마하바스투>에서는 보살 이전의 예비적 단계를 자성행, 원성행, 순성행으로 나뉘어 부처님 과거 전생이 존재했음을 말해줍니다. 자성행은 태어난 그대로 사는 것이며, 원성행은 발심한 단계를, 순성행은 서원대로 순조롭게 수행하는 것을 뜻하죠.


대승불교에서는 범부보살의 등장도 흥미롭습니다. 대승불교인으로서 성불하겠다 서원을 세운 사람이 범부보살입니다. 이는 오직 대승불교에게만 있는 개념입니다. 종교적 의미로 보면 부처님 전생의 용어를 자신의 현생에 사용한 것이 됩니다. 나도 현생에서 부처님 전생의 삶을 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부보살이 중요합니다. ‘발보리심’은 깨달음의 마음을 일으켰으니 먼훗날 부처님이 될 것이라는 의지가 담겨 있는 말로 능동적 주체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출발로부터 모아진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그래서 사상으로서의 대승과 교단으로서의 대승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단일교단으로서 대승은 처음부터 존재했던 적은 없습니다. 대승사상을 가진 경전들은 기원전 50년 경 <반야경>이 등장하면서부터입니다.
이때 대승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를 규정하면서 어떤 정체성은 갖지 못한 시기였습니다. 이에 대해 폴윌리암스는 <Mahayana Buddhism>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대승은 지금도, 그리고 과거에도 결코 하나의 단일한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학파도 종파도 아니며, 오히려 하나의 ‘정신적 운동’으로, 스스로를 규정함으로써 정체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다른 정신적 운동들과 구별함으로써 그 정체성을 획득하는 그러한 것이다.”


대승불교의 출발점을 사상적 철학적 개념으로 찾지만 저는  추구하는 바가 무엇이냐 즉 종교성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중들의 내적 동의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죠.  근원적으로 문제의식이 있고 이를 변화시키려고 했던 대중들의 내적 동의 말이죠. 지금도 다양한 불교 운동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뭔가 뚜렷한 근원적 문제의식이 대두되고 있지만 구심점은 없죠. 이 상태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아직은 결정된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이런 현상들을 역사적으로 하나의 단어로 정리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기원전 50년에서부터 대승교단이 성립되는 400년 경까지의 500년 정도의 시간을 보살시대, 무불 시대를 일컫는데 사실 이 시대는 무엇이라 이름을 붙일 수 없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비보살은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무불시대의 ‘울고 다니는’보살을 뜻합니다. 상비보살은 꿈에서 부처님을 보고 수행을 시작하고 제석(帝釋)과 만나 길을 떠나고 선정에서 부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상비보살의 내러티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육도집경(六度集經)>에 편찬 수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보살이었을 때 이름이 상비였다. 상비보살은 늘 울고 다녔다. 그때는 무불(無佛)의 시대였으며, 경전은 다 없어지고, 사문도 성인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보살은 부처님을 뵙고 오묘한 가르침을 듣는 것만을 늘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대는 더럽고 탁하였으며, (사람들은) 옳은 것을 거슬러 악한 것만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살은 근심이 되어 슬피 울며 다니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부처님을 찾아 헤매는 상비 보살의 모습도 묘사해 놓았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삼계가 다 공한 것이다. ‘나타난 것’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환(幻)과 같은 것이다. 한 번 나타나고 한 번 멸(滅)하는 것이 마치 물거품과 같다. 세상의 모든 것을 그와 같이 보아라. 내가 너를 위하여 경을 설할테니 마음을 단정히 하여 잘 들어라. 여기로부터 동쪽으로 이 만리(二萬里)를 가면 간다바티라고 하는 나라가 있는데, 모든 보살들의 성(城)이다. 여러 보살 가운데 가장 귀하고 덕이 높은 보살이 있는데 그 이름이 법래보살이다. 그 보살은 모든 경전을 다 품어서 그 지혜가 무한한데, ‘반야바라밀의 경전’을 펴서 여러 사람들에게 계속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여러 보살들이 있는데 (각기) 그 경을 ‘받는 자’ ‘독송하는 자’ ‘쓰는 자’ 그리고 ‘경의 근원을 정하는 자’ 들이다. 가 보아라. 반드시 너의 스승이 되어 네게 부처를 찾도록 권할 것이니 빨리 달려가라. 너를 위하여 ‘내외’의 ‘지혜바라밀’의 밝은 덕을 설할 것이다.”

여기서 삼계가 다 공하고 실제하는 것은 환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는 서구에서는 데카르트에 와서야 자신의 감각 경험을 신뢰할 수 없는 것을 깨닫는 것에 비하면 무척이나 빠른 것이라 할 수 있죠. 불교의 출발점 자체가 모든 것은 환과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선정에서 깨어 보살은 주위를 살폈으나 부처님들은 다시 보이지 않았다. 보살은 다시 슬퍼져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모든 부처님들의 신령스러운 빛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간 것인가?”

이 대목은 상비보살 이야기의 핵심주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살시대의 한 전형이 상비보살이며 이후 4~5백년간 상비보살은 여러 불교 텍스트에서 계속 진화하며 등장하게 됩니다. 결국 상비보살은 대승불교를 발전시킨 존재입니다. 보살시대 정점인 대승을 완성해 가는 존재가 상비보살입니다.
이 시대 미술작품들은 불상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특징입니다. 부처님의 발만 그려 넣는다거나 법륜을 그려 넣는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부처님의 부재를 설명했습니다. 무불의 시대는 위기 사항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죠.


<아육왕경>에서는 왕자(푸샤미트라)의 치세하에 불교도들이 무자비하게 처형당했고, 스투파와 사원들이 파괴되었으며, 심지어 승려의 목에 현상금까지 걸었다는 사실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아쇼카 왕 이후에 불교의 탄압이 시작되고 중앙아시아 외적의 침입도 많았고 여러 혼란의 시대가 이어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정법 상법 말법 시대가 도래합니다. 그래서 마하가섭이 열반했는데 화장이나 매장을 안 하고 숲속 어딘가에 숨어 부처님의 가사를 안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뒤를 이을 누군가가 나타나면 가사를 전해주기 위해서 말이지요. 
그런가 하면 무불시대 붓다를 만나겠다는 사람들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목소리로 듣는 경우도 등장하게 됩니다. 사실 성경이 하느님을 목소리로 만나는 경우가 많지만 불교는 그런 경우가 없는데 상비보살은 이런 목소리의 모티브로 등장하게 됩니다. 또한 불교의 무대가 도시로 바뀌게 되고 경전을 부처님의 몸처럼 생각하는 경우도 생겨나게 됩니다. 불교 경전을 법신이라고 하죠. 불교의 근본 신앙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3승려들이 머무는 곳에는 사리불탑(舍利弗塔)·목련탑(目連塔)·아난탑(阿 難塔)·아비담탑(阿毘曇阿毘曇) 그리고 율탑(律塔)과 경탑(律經塔)이 세워져 있었다. …설법이 끝나면 사리불탑에 공양을 하고…비구니는 아난탑(阿難塔)에 공양을 하고 … 사미(沙彌)는 라훌라탑(羅云 塔)을 공양한다. … 아비담 논사들은 아비담탑을 율사들은 율탑을 공양한다. 대승(摩訶衍人)의 사람들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문수사리·관세음을 공양한다.  4세기 법현,<불국>

대승을 믿는 상좌부는 대중과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4세기경 대승이라고 하는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모든 부처님의 신령스러운 빛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간 것인가 여기에 다양한 답을 하는 대승불교가 있는 것이죠.
“모든 부처님들이 저에게 위로와 가르침의 말씀을 주시고 홀연히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 이제 이 모든 부처님들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셨는지 저에게 일러 주소서”라는 상비보살의 간청에 대해 담무갈 보살은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모든 부처님은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여(如如) 함은 움직임이 없으니 여여(如如)함이란 곧 여래이기 때문입니다. 선남자여, ‘생겨남이 없는 것’(無生)은 오고 감이 없으니, ‘생겨남이 없는 것’(無生)이란 곧 여래입니다. ‘실제’(實際, reality)란 오고 감이 없으니, ‘실제’(實際, reality)란 곧 여래입니다. 공(空)이란 오고 감이 없으니 공이란 곧 여래입니다.”

보살시대에서 대승이라 하는 경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 상비보살의 진화는 대승불교의 시작과 발전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살시대를 통해 대승불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무불시대는 미래의 부처가 되겠다는 존재들이 등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