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하나를 버린다면 전체가 다 버려지는 겁니다

▲ 그림 최주현

진짜로 내 몸뚱이 하나와 더불어 같이 그냥 송두리째
죽고 산다 뭐, 괴롭다 괴롭지 않다를 다 당신 주인공에다 일임해 버리면
죽고 사는 것도 아랑곳 없어요.
그럼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인데 걱정할 게 뭐 있습니까.
좀 허허 웃고 사세요.

좀 더 나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길은
문) 직장 생활이 바빠서 절에 나가기는 힘들지만 나름대로 참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정진하고 있습니다. 좀 더 쉽게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답)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한테 모든 걸 주인공에 맡기고 살아라, 맡겨 놔라 이럽니다. ‘맡기고 살아라.’ 이러면 여러분이 더 실감이 날 거 같아서 맡기라고 그랬습니다. 한군데다 맡겨라. 한군데다 믿고 맡겨라. 믿지 못하면은 맡길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무조건 맡겨라.’ 이렇게 했죠. 무조건 맡김으로써 그것이 어디로 통과가 되느냐 하면 벌써 시각부터 통과가 되고 청각이나 촉각, 후각이 발로가 돼요. 그래 감각이 아주 영리하게 이 안의 심안이 밝아지죠. 그러니 그게 도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뜻이, 자기가 생각하는 뜻이 쪼끔쪼끔, 자꾸자꾸 이끌려 가는 거기에 의해서 이 다섯 가지가 자꾸 발로가 됨으로써 그때는 지견으로 들어가고 지각으로 들어가요. 그럼으로써 오신통을, 무의 세계와 유의 세계를 같이 쥐고 그대로 조끔조끔이라도 체험을 하면서 갈 수 있다는 얘기죠.

그것이 자기를 자기가 발견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면 그걸 발견해서 자꾸자꾸 체험을 하고 가는데 그게 되는 것만이 공부가 잘된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안되는 거 되는 거를 다 놓지 않고 이걸 모르면, 만약에 내가 누구를 구하려면 과거로 돌아가야 내가 현실을 구할 텐데 과거로 돌아갈 줄 모르면 어떻게 현실을 구합니까.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안되는 것도 되는 것도 양면을 다 놔야 됩니다. 안되는 거는 과거의 업으로 인해서 안되는 거고 되는 것도 선업으로 인해서 되는 거니까. 그러니까 선업과 악업이 다 한데 합쳐져서 녹아 들어가서 자기가 그것을 자유자재할 수 있는 지혜와 심안이 밝아져야 하고, 오신통이 다 밝아져서 그 오신통이라는 이름조차도 없이 자유자재권을 가져야만이 된다는 얘기죠.

그렇게 될 때까지는 자기가 체험을 하면서 자꾸 놔야 됩니다. 놔라 하는 거 어폐가 있는 거 같지마는 다 자기 주인공에서 하는 거니까 거기다가 감사해야죠. 거기에 모든 걸 맡기고 감사해야지 딴 데다간 안 되죠. 그게 자기 나기 이전 조상이니까. 자기 아비니까요. 자기가 현재에 생각하고 사는 것이 아들이라면 그건 아버집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체가 없고 가만히 능력만 있기 때문에 움쭉을 하지 않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능력만 있는 겁니다. 여러분을 꿰어 가지고 굴리는 능력만 있어요. 그래서 심력이라고 해도 됩니다. 원심력이라고 해도 되고, 에너지라고 해도 되죠. 그렇게 한다면 바로 마음내는 거는 자꾸 그걸 역할을 해서 굴려서 쓰거든요. 그것이 법이라고 보죠. 우리가 몸을 활용하고 이러는 것도 활용이고요.

그러니까 이 삼위일체를 공전하면서 돌아가면서 체험하면서 놓는다. 감사하게 놓는다. 이렇게 한다면 그게 바로 자기를 발견하는 데에 둘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게 둘이 아닌 까닭이 왜 그렇게 둘이 아닌 까닭이 되느냐. 여러분은 지금 요 50% 물질세계 요것만 보니까 그게 나오지를 않아요. 50%를 마저 알아야 그게 죽어가고 살아나오고 하는 그 연결된, 이 유의 세계 무의 세계가 연결된 이 자체를 다 통틀어 봐야 그게 어떻게 돼서 그렇게 둘이 아닌가 알게 되는 것이죠.

마음 중심이 우뚝 서려면
문) 이제 나이가 들어가니까 몸이 좀 아프다 싶으면 은근히 두려움이 생깁니다. 어떻게 하면 흔들림 없이 마음 중심이 우뚝 설 수 있을는지요.

답) 부처님의 법은 아주 묘하고 광대무변합니다. 여러분이 아프다고 그것이 병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 공부하는 과정의 기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겁도 나지 않아요. 하나도 겁나는 게 없습니다. 지금 죽는다 하더라도 그렇게 철저하게 믿기 때문에 그까짓 것 겁날 것도 없고 또 진짜 죽는다 하더라도 겁날 게 없어요. 진짜 죽는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오븐이 망가져서 오븐을 다시 새 걸로 바꿔다 놓는 거밖에 안 되니까요. 그런데 거기에서 뭐가 걱정이 되느냐 이겁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병이 있다 할지라도 한생각이 아주 중요합니다. 한생각. 한생각이 자기를 구덩이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그런 묘법이 있습니다. 스스로, 스스로 돼 있다 이겁니다. 여러분이 창살 없는 감옥에다가 옹쳐매 놓고 있고, 병자로 옹쳐매 놓고 있는 거지 누가 병을 갖다 준 겁니까, 뺏어 갑니까? 여러분의 생각에 달린 겁니다. 과거의 자기가 한 대로 문서를 가지고 나와서 그렇게 가난과 병고와 그 모진 고통을 받는다 하더라도 한생각에 그 고통과 그 문서를, 종 문서를 한꺼번에 태워 버릴 수 있어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현실도 없다 이랬죠? 왜 그런가. 한 찰나 살림살이기 때문이다. 여러분한테 항상 말하죠. 우리의 살림살이는 한 찰나요, 한 인생 살아나가는 덴 한 철이라고. 여러분이 한 찰나의 살림살이를 지금 하고 가는 겁니다. 요리 변덕 조리 변덕, 변덕쟁이거든요. 변덕쟁이. 도깨비 장난, 귀신 장난감. 그러니까 그걸 말로 하려니까 그렇지 여러분은 변동이 무쌍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공에 들어서 가만히 있다면 그건 목석인 거예요. 또 너무 말을 하고 너무 아는 척을 해서 한데 떨어뜨린다면 그건 귀신이죠.

그러니까 모든 것은 정상적으로 그냥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나는 거예요, 그냥. 거기도 걸리지 마세요. 생각이 자꾸 나걸랑 그대로 그냥 주인공에서 나오는 거니까 내버려두라고요. 내버려두는 거예요. 왜? 자기는 이렇다 저렇다 할 자리가 아니에요. 아무것도 붙지 않는 자리라고요. 그런데 여기서 괜히 ‘고(苦)덩어리’ 속에서 그 의식이 들고 나면서 괴로움을, 자꾸 또 즐거움을 주고 이러니까 즐겁더라도 그냥 빙긋이 웃고 말고, 괴롭더라도 빙긋이 웃고 말고. 거기서밖에 해결 못하니까. 이열치열. ‘네 속에서 나온 거는 네 속에서 해결해야지, 딴 속에서 해결 못한다. 나는 거기에 속을 필요가 없어. 네가 무체로서의, 즉 말하자면 큰 부처로 보이더라도 난 거기에 속지 않아.’ 이렇게 속지 마셔야 돼요.

여러분은 여러분 속에서 들고 나면서 그 전자의 종 문서에 의해서 그 자기가 한 것대로 문서를 짊어지고 나온 데서 들고 나는 것에 속지 마시라 이겁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 있다, 좋은 소리가 들린다 하더라도 거기에 속지 말고. 예를 들어서 세 가지를 똑바로 보시라. 말과 뜻과 행, 이 세 가지가 동일하게 진실함을 알게 되면은 그냥 따르라고 그랬지, 믿으라고 그런 게 아니예요. 따르라 이겁니다. 왜 따르라고 그랬느냐, 그럼. 당신네들 주인공 안에 나와 더불어 같이 모두 일체 만물만생이 다 같이 한자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사람이 이런 예가 있죠. 예전에 3대 위로 할아버지께서 아주 진실하게 청정하게 공양을 잘 바치고, 타력 신앙으로 한 게 아니라 자력 신앙으로써 진실하게 했어요. 그래서 자기 2대의 손자를 왕으로다가 되게끔 노력을 한 게 아니라 왕으로다가 하게끔 돼 있죠. 그래서 3대 위 할아버지가 이 3대 아래 손자로 태어났단 말입니다. 손자로 태어나서 참, 왕도 됐었죠.

그런데 아무리 그것을 잘한다 하더라도 자기 중심이 흔들리면 남의 소리를 듣게 돼 있어요. 또 욕심이 많아지면 눈에 보이는 게 없어지죠. 귀에 들리지도 않아요. 충신의 말도 들리지도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요. 그러니까 모두 이 자기가 한 것대로 ‘고덩어리’에서 그때는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을 해서 욕심으로 가득 찬 거죠. 욕심으로 가득 차다 보니까 ‘야, 내가 이렇게 이렇게 앞으로도 두 번, 서너 번 해먹으려면 이건 이렇게 없애야겠다.’ 해서 그만 모의를 해 가지고 왕을 죽였단 말입니다. 어디 그런 소리가 샐까 봐 단 둘이서만 해 가지고 딴 방향으로써 모든 일처리를 해 가지고선 딱 죽였는데, 그게 죽으면 그냥 없어졌으면 좋겠는데, 싹둑 없어졌으면 좋겠는데 아,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어, 요놈! 내 자식과 내 가정을 파괴를 시키고 이렇게 하고서도 네가 잘 살 수 있겠느냐?’ 해서 항상 그 마음이 그 집 울 안에 항상 맴돌고 있단 말입니다, 그 의식이. 그러니깐 그 왕은 죽지 않고도 죽었단 말입니다. 그러니 죽은 거보다도 죽지 않고 죽은 것이 더 괴로움을, 그냥 시들어서 가면서 길을 걷는 거나 마찬가지죠. 지금만 그런 게 아니라 오백 년 역사에도 그러한 일들이 허다했고….

역시 지금 여러분이 살림살이하는 그 도리도 바로 마음을 잘 써라. 마음을 잘 쓰면 스스로서 우주간 법계에서 돌보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이 한생각을 그렇게, 병에 대해서도, 가난에 대해서도, 우환에 대해서도, 괴로움에 대해서도, 허무감에 대해서도 그것이 내가 그러는 게 아니라 내 속에 들어 있는 고덩어리에서 나오는 거니까 거기에 속지 말고, 나를 테스트하는 거니까 모든 것은 거기에서 나오는 거 거기에다 놓고, 병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이것으로 공부할 수 있는 계기로 인도하는 내 주인공이 감사하구나.’ 하고 생각을 해라 이겁니다.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은 이 오장 육부 이 모든 세포에서 한마음 한뜻으로 바로 진화가 돼 가지고서는 오히려 보살로 화해 가지고 수호신이 돼 가지고 나를 보살피고, 보신이 돼 가지고 보살피고, 보현보살이 돼 가지고 보살피고, 약사보살이 돼 가지고 보살피고 아, 이러니 내 몸은 어느 새 낫는지 모르게 낫고, 어느 새 눈이 밝아지고, 어느 새 ‘아, 이거 이런 줄 모르게 됐어.’ 이렇게 하게끔 되고,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은 스스로서, 스스로서 자비의 칼로서 즉, 자루 없는 칼이 우주 법계를 꿰뚫어서 죽은 세상 산 세상을 넘나다니면서 그 나와 같이 괴롭고 외롭고, 고독하고 가난하고 아프고, 그런 사람을 위해서 서로가 내가 돼 줄 수 있는, 전부 건질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여러분 앞에 주어진다는 얘기입니다. 이거 옛날 얘기 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현실에 그렇게 연결이 돼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불자들이 기독교로 많이 개종하는데…
문) 저는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데요, 인터넷을 통하여 대행 스님 법문을 보면서 나름대로 공부의 길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불자들도 투철한 자기 주관이 없으면 거의 기독교로 개종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불교인들도 좀 더 적극적으로 대책을 마련해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답) 우리가 개종을 하고 개종을 안 하고 그게 없습니다. 우리 마음입니다. 불교는 어느 한군데 국한된 불교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떠한 상점의 상표처럼 생각하고 이건 내 가게 네 가게 할 수가 없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돌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이 지구를 우리 집이라고 한다면 크나큰 일이 있습니다. 우리 몸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그런 능력과 또는 사회와 국가를 지키는 그 마음의 능력과 더불어 세계를 우리가 조절할 수 있는 능력과, 또는 지구를 집이라고 한다면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는 그런 능력도 피치 못할 사정입니다. 널리 생각한다면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과학이 발전되고 있지만 이렇게 기계화로, 물질화로 치달아서 파손시킬 수 있는 그런 핵폭탄이나 수소폭탄, 모두 이런 잠수함을 부수는 그런 그 기계화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인간의 그 생명체가 좀 더 부실하고, 자기가 갖추어 가지고 있는 걸 모르는 사람에 한해서는 좀 더 약해질 수가 있고 마음대로 그 살 수가 없지 않을까, 앞으로는 점점 더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그러한 공부를 하고 진리를 타파하고 어떤 석존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가 있다 하더라도 바로 자기 마음의 그 의식 자체를 넣는다면 두드러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수만 개의 영령을, 영혼을 가지고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고 수없이 빼내도 줄지 않는다는 뜻이죠. 그러한 진리를 배운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마음을 가지고 창살 없는 감옥을 만들어 놓고 자기 몸뚱이를 옴쭉 못하게 해 놓을 수 있는 그러한 소인의 그 생각이라고 그럴까요? 그러면 어떨까요? 지각으로 우리가 살아야지 소견으로 살아서 되겠습니까? 우리는 소견으로 살면은 지각을 이룰 수 없고 통달할 수가 없습니다. 만날 둘로 보고 네가 망하게 해 줬느니, 내가 잘했느니 하고 내 몸뚱이를 나라고 해서는 절대로 그것은 안 된다는 뜻이죠.

여러분이 지금 차를 가지고 운전수더러 가라고 그래야 그 차를 끌고 가는 거지, 만약에 차더러 “야 자가용아, 빨리 가.” 이러고 아무리 외쳐도 그 자가용은 가지 않습니다. 운전수더러 가라고 그런다면 차를 끌고 갑니다. 그런 것같이 우리 믿음도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의 주인공을 믿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주처는 전 우주와 가설이 돼서 통신이 돼 돌아갑니다.
그럼 우리가 지금 미래에,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까 없지마는 과거도 우리가 짊어지고, 지금 달구지에다 잔뜩 짊어지고 현실에 나온 겁니다. 그렇다면 달구지에 짊어지고 나온 그 인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딜 쳐야 가겠습니까. 그 물건을 끌고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소를 믿고, 이 소가 한 짓이니까, 이 달구지에 잔뜩 실은 게 자기가 전에, 내가 나오기 이전에 네가 해서 입력이 된 거니까 그 입력된 데다 다시 맡겨 놓고 ‘네가 한 짓이니까 네가 해. 네가 할 수밖에 없어.’ 하고 주인공에게 모든 걸 맡겨 놓을 때에 비로소 그 인과는 무너지고 업보도 무너지고 또 유전성도 무너지고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겁니다. 삽시간에 무너지는 겁니다. 두고두고 무너짐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믿지 않고, 그러면 누구를 믿습니까? 형상을 믿습니까, 고깃덩어리를 믿습니까, 허공을 믿습니까? 대신 해주 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대신 아파 주기를 합니까 먹어 주기를 합니까? 똥을 눠 줍니까? 자 줍니까? 죽어 줍니까? 누가 해 줍니까? 아무리 친절하지 않아 천에 없어도 대신 해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가 왔고 자기가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기가 와서 자기가 할 일을 하고 가야 한다 하는 것은 자기 몸 떨어지기 전에 자기를 알아야 되겠다 이겁니다. 그러면 이게 내가 불성이 ‘부’라면 지금 현상계에 있는 자기는 바로 ‘자’입니다. 현재의식과 잠재의식, 이거를 놓고 볼 때에 잠재의식은 현재의식 속에 들어 있고 현재의식은 잠재의식 속에 들어 있는 겁니다. 그게 두 가지로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의학적으로 볼 때도 이 머리, 이 골도 반쪽으로 나 있습니다. 그리고 구멍이 뚫려서 왔다 갔다 하지요. 그것이 바로 통신만 왔다 갔다 하는겁니다. 거미줄 얽히듯 말입니다. 이 세포가 바로 법계라고 하는 거죠. 우리 혹성이 지구에도 세포가 있고 인간에게도 세포가 있고 어느 물질에게도 세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포 하나하나가 전부 우리는 가설이 돼 있다는 뜻이죠.

그러니 우리가 그 뜻을 안다면 한국인으로서 긍지를 가지고 한마음으로 뭉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그렇다고 해서 우리 이 선원에만 와라, 이거 아닙니다. 어디든지 내가 배울 데가 있으면 어디든지 가서 배워라 이겁니다. 그리고 꼭 부탁할 건 한 가지 있죠. 어디를 가든지 내 주처는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 이건 잊지 말아라 이겁니다. 몸뚱이는 어디를 못 갑니까. 가고 오는 것도 고정됨이 없고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 만남도 고정됨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공했다고 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공한 것도 공했느니라 이런 거거든요. 분별 없다면 공한 것도 공했느니라. 그 공한 것을 어떻게 체험합니까? 분별을 하지 않는다면, 공했다는 분별을 하지 않는다면 그 공한 것도 체험할 수가 있느니라. 이런 것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렵게 어려운 말을 해서 이렇게 경서를 놓고 이렇게 해서 강의를 하듯 이렇게 하기보다는 우리 생활 속에서 체험하면서 시험하면서 내 주처에 맡겨 놓고 지켜본다. 이것은 아주 과학적이기도 하고 실험입니다, 그게.

그리고 체험을 한다면 자기가 당당해지고 늠름해지고 지각으로 살 수 있는 그런 당당한 인간의 그 자유스런 행이 저절로 나오죠. 그러니 얼마나 슬기롭고 자유스럽고 좋습니까? 그런데 이 도리를 배우는 데 내가 그 절이니까 못 가고, 저 교니깐 가고, 이 교기 때문에 불교에 못 오고 이런 법이 어딨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못 가라, 가라 이러지 말고, 또 나는 간다 못 간다를 떠나서 내 마음 주처, 즉 하나님도 딴 데 있는 게 아니라 자기 하나의 임을 발견을 해야만이 모든 임들을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겁니다. 나의 집에 전화를 놓지 않고 남의 집의 전화를 어떻게 소식을 듣습니까? 내 집에 안테나를 세워 놓지 않고 어떻게 남한테서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감지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너부터 알라고 했습니다.

관을 했는데 명쾌한 답이 안 나와요
문) 주인공에 맡기면 걱정 없이 살수 있다고 하는데 저는 지금 어떤 난관에 부딪쳐서 열심히 그 문제에 대해 관을 했지만 명쾌한 답을 못 들었습니다. 뭐가 잘못된 건지요.

답) 뭘 들으려고 그러세요? 그러니깐 거기까지 통신이 되질 않죠. 나 하나만 버린다면 전체가 다 버려지는 겁니다. 나 하나만 버린다면. 그럼 일상생활을 내가 지금 어떻게 해 나가는가. 어떠한 문제가 생겨도 나는 내가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거기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을 만들어 놓고, 그 사람이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해 나가는데 나는 그저 해 나가는 대로 심부름만 하면 그뿐이에요. 진짜 이거는 여러분이 지금 살아 나가는 데는 해당도 안되는 말이죠. 그러나 그게 해당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진짜로 내 몸뚱이 하나와 더불어 같이 그냥 송두리째 죽고 산다, 뭐 괴롭다 괴롭지 않다를 다, 몸뚱이 하나를 다 당신 주인공에다 일임해 버리면 죽는 거 사는 것도 아랑곳없어요.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아주 ‘왔다’예요. 허허허. 그럼 모든 게 해결 나는 판국인데요, 뭐. 걱정할 게 뭐 있어요? 그러고 천 년 만 년을 사나요, 이 모습을 가지고? 그 좀 허허 웃고 살면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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