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봉 스님에게 보낸 편지

‘노봉달도인, 불장어묵대’
서신통해 경봉 스님과 법거량


경봉 스님에게 보낸 편지
삼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점점 서늘해져 가는 이때에 도체(道體, 법체)가 더욱 평안, 청정하시며, 그리고 고인(古人)들의 공용(功用) 없는 대해탈 경계에 이르셨는지요. 멀리서 빌고 또 빕니다. 나는 깊은 산에 칩거하여 아무 장애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다 염려해 주신 덕분인 줄 압니다.
드릴 말씀은 고인(古人)의 게송(偈頌)에 “길에서 도(道)를 깨달은 사람을 만나면 말로도 침묵으로도 대하지 말라(路逢達道人, 不將語默對).”는 말이 있는데, 이미 말로도 침묵으로도 대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오직 원컨대 한 마디 일러 주십시오. 이만 줄입니다. 답의 예를 갖추지 않습니다.
무진(1928년) 8월 14일
한암 중원(漢岩 重遠) 거듭 절하고 올립니다.

이 편지는 1928년 8월 14일에 경봉 스님에게 보낸 편지이다. 짧은 서간인데, 그러나 서간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법거량(선문답)이다. 선어(禪語)에 “길에서 도인(道人)을 만났을 때(路逢達道人) 말로도 침묵으로도 대하지 말라(不將語默對).”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경봉 스님은 어떻게 대할 것인지, 한 마디 말해 보라는 것이다.
자, 어떻게 상대하는 것이 옳을까?
달도인(達道人)이란 도를 깨달은 사람, 각자(覺者) 즉 깨달아서 부처가 된 사람이다. 그는 집착 없는 무심인(無心人)으로서 사량 분별과 정식(情識, 감정이나 理性)이 다 사라진 사람이다. 석인(石人)이나 목계(木鷄), 목석(木石)같은 사람인데, 이런 사람에게 통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언어로도 통할 수 없고, 침묵으로도 통할 수 없다. 손짓 발짓도 안 된다. 그는 이성적인 사고나 감성, 감정 등 언어가 두절되어서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마음이 있지만 감성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장자〉에 보면 목계(木鷄) 이야기가 있다. 아주 싸움을 잘하는 닭이 있는데, 어느 날 나무로 만든 닭[木鷄]을 만나서 일전을 벌였다. 그런데 싸움을 잘 하는 닭은 결국 나무 닭에게 지고 말았다. 왜 졌을까? 아무리 발로 차고 덤벼들어도 목계는 무정, 무심해서 전혀 반응이 없었던 것이다. 싸움닭은 제풀에 나가떨어졌다.
‘노봉달도인, 불장어묵대(路逢達道人, 不將語默對)’는 〈무문관〉 36칙(五祖法演의 路逢達道)에 나오는 공안이다. 〈벽암록〉 82칙에도 나오지만, 노봉달도인 공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설봉의존의 문답을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어떤 납자가 설봉선사에게 물었다. 고인의 말에 길에서 도(道)를 깨달은 사람을 만났을 때는 말로도 상대하지도 말고 침묵으로도 상대하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습니까? 설봉이 말했다. 자, 차나 한잔 마시게(問. 古人有言. 路逢達道人, 莫將語默對. 未審將什?對. 師云. 且喫茶去).”
도(道)를 깨달은 사람은 무심의 경지에 있으므로 어떤 방법으로도 상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놔두고 차나 한잔 마시자는 것이다. 무심의 경지에서 차를 마시는 것, 그것이 무심의 경지에 있는 달도인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일체 생각을 잊고 그대와 내가 차 한잔을 나누는 것, 그것이 상대적인 의식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적인 의식이 없다면 달도인도 별 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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