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신 ②

가죽주머니는 무정물

색신을 끌고 다니는 법신이

공부를 한다.

법신자리는 나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하면

누만겁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것을 모르면은 남자는 남자 대로 무슨 고민이 있어. 생사문제도 있고 하니까 잘 산다 못 산다는 거. 남자는 남자 몸 대로 고민을 받아야 돼. 여자는 여자 몸 대로 고민을 받아야 돼. 젊으면 젊은 대로 고민을 받아야 돼. 학교 가서 공부하려면 그거 괴롭지 않아요? 사실에 있어서는. 또 늙으면 늙은 대로 고민을 받아야 돼. 전부가 고민이라. 돈이 아무리 있다 할지라도 고민이라. 그러나 그 자리를 딱 캐치해서 안다 하면은 고민이 있을래야 있을 것이 없지 않아요? 그러하니 지금까지 말한 요 대목이 그 대목입니다.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어. 앉는 것도 없고 눕는 것도 없어. 이 도리. 그만 해말쑥한 그 슬기의 자리, 이거를 아는 것은 누만겁을 통해서 공부를 해야만 아는 것이 아니란 그 말입니다. 부처님도 누만겁을 공부를 했어요. 석가세존께서. 우리처럼 간단하게 이리 한 것이 아닙니다. 누만겁을 공부를 했는데, 그렇다면 부처님도 석가모니도 누만겁을 통해서 전생 전생 전생 그 전생에. 공부는 누가 공부를 하느냐 이것부터 알아야 됩니다. 공부는 이 색신, 가죽주머니가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죽주머니는 무정물이거든요. 가죽주머니를 끌고 다니는 법신자리가 공부를 합니다. 이거 하나 여러분들이 생각하면 가슴이 덜렁할 겁니다. 아이고 그렇구나. 나는 색신이 공부를 하는 줄 알았더니만 이 색신을 끄집고 다니는 법신, 이 자리가 공부를 하는구나 이걸 생각하면 금시 내가 말한 것이 이해가 갑니다. 그러니까 석가모니불께서는 그 석가모니불의 삼십이상 팔십종호가 공부를 한 것이 아니고, 공부를 할라 했자 어떻게 공부를 할 거여. 이거는 자성이 없는 물건인데. 느낌이 없어. 느낌이 없는 건데 어떻게 공부를 하겠습니까?

그러하기 때문에 석가모니불이 누만겁을 통해서 공부를 하셨다 하는 것은 법신자리가 한 거 아닙니까? 법신자리는 나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다. 나는 듯해서 색신을 나투었을지언정 나중에 인연이 다하면 거두어들이고 또 다른 색신 나투고. 그러니까 본 뿌리는 그대로 가만히 있거든요. 그러면 공부를 하는 것은 본 뿌리, 법신자리가 하는 겁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색신이 공부하는 것 아닙니다. 여러분의 색신을 끄집고 다니는 그 법신자리가 공부를 하는 것이거든요. 그러하기 때문에 여러분도 지금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하면 여러분도 누만겁을 할 수가 있어요. 몸은 자꾸 바꿔. 나이가 많으면 나중에 또 내버리고 다른 몸 받고, 다른 몸 받을 때 법신이 또 하고 또 이거 쓰다가 내버리고 또 다른 몸 받아. 그러면 법신이 또 공부를 하고. 그리 되는 건데. 여러분도 누만겁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나온 말도 그 말이거든요. 부처님께서 누만겁을 공부를 해서 공덕을 이루어. 그래서 가고 오고 앉고 눕지 않는다는 이런 것을 다 아셨는데 우리도 그리 해야 되지 않겠느냐 이 말입니다.

이거 말마디는 아주 지극히 간단한데 의미가 심상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리 했어요. 누만겁을 통해서 각고 고행을 했습니다. 괴로움을 새겨. 새길 각자, 고행을 했어요. 각고 수행을 했어요. 부처님께서 하신 겁니다. 그런데 사실로 이 자리에 있어서 부처님의 법신분이나 우리의 법신분이나 사실 둘이 아닙니다. 둘이 아닌데 왜 부처님은 부처님이고 내면 내다 이렇게 하느냐. 이 놈. 가죽주머니 이 놈. 이 놈 때문에 지남철(자석)에 끌리듯이 여기에 쓸려서 딱 여기에 들어앉았기 때문에 부처님은 부처님이고 내는 내라고 요렇게 생각할지언정 실은 그건 지 생각뿐이지, 이 색신에 들어앉은 것을 바탕으로 한 생각뿐이지 사실로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그 자리는 부처님의 법신과 하납니다. 하나. 그러니까 이런 의미도 있어요. 이 말을 갖다 여기 써 놓지는 않았는데 그런 의미도 있어요.

가만히 여러분들 생각해 보세요. 지금 여러분 이 자리에서 이 몸을 방하착해 보세요. 이까짓 거 불구덩이나 흙구덩이로 가는데 이까짓 거 뭐 생각할 거 없다 말이야. 그러나 내가 이거 있을 때까지 내 관리물이니까 관리는 하지만 이거 내 아니다 하고 생각해 보세요. 딱 한 번 얼굴 들어 보세요. 뭣이 있는가. 아무 것도 안 봬. 백주(괜히) 잠재의식이 들어서 여긴 내 가슴이다 여기는 내 팔이다 여기는 내 다리이다 그렇게 할지언정 다리라 해 봤든 그거 실다운 거 아니고 팔이라 해봤든 그 실다운 것 아니고 가슴이라 해 봤든 이거 불구덩이나 흙구덩이로 가는 건데 뭐 그까짓 거, 그거 할 거 있어요? 그러하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여러분들이 이걸 방하착을 해. 방하착 딱 하고 허공을 딱 한 번 쳐다봐. 나중에 허공 문제 나옵니다. 아무 것도 없네. 사실로 이거 거짓말 아니여.

지금 나의 분수로 봐서는 나 아무 것도 없어요. 그래도 내 말하고 있거든. 아무 것도 없어. 이래 보니 내가 있긴 있어요. 이래 보니. 하하하. 여러분도 마찬가지에요.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이다 내다 이렇게 분별을 하는 것은 왜 그러냐. 이것 때문에. 너무나 여기에 젖어가 있어. 너무나 여기에 젖어가 있어. 또 이것이 없으면 공부도 못합니다. 하긴 하지만은. 그래서 둘로 보는 거라 말이죠. 둘로 보는 건데, 그걸로 보더라도 우리가 요 도리만 딱 깨치면 바로 성불하는 겁니다. 부처님 자리에 오르는 겁니다. 다른 데 갈 데가 없어. 그러하니 나중에 가서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하면은 오늘은 부처님하고 우리를 둘로 보자 말이야. 실은 하난데, 둘로 볼 수가 없는데. 실은 하나거든요. 하나지만은 둘로 보자 말이야. 둘로 봐서 부처님께서 누만겁을 공덕을 이루었어. 우리는 못 이루었어. 이렇게 보자 말이야. 보면 어떠한 결과가 있느냐. 부처님께서 공덕을 이룬 그걸 갖다가 전부 혓바닥을 굴려서 가짜 혓바닥을 빌어서 말씀을 하셨거든. 그 말씀을 또 우리가 귀를 통해서 이 법신이 듣는다 말이지. 들어 놓으면은 부처님은 고생을 해서 알았지만 우리는 하나도 고생 안 하고 아는 거나 한 가지라 말이여.

진실행 보살, 알아듣소? 그렇지 않아요? 어떻습니까? 부처님께서 고생을 해서 알았다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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