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도에 따라 닥치는 대로 주인공에다 굴려놓아라

▲ 그림 최주현

어떠한 용도가 오든
이렇게도 굴리고
저렇게도 굴려서
자기네가 지혜를 낳아서
작용하는 거지
어떻게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가르쳐줍니까.
그러니까 지혜롭게
네 스승을 네 스스로 찾아라 이겁니다.

네 스승을 스스로 찾는다면
그 안에서
다 길잡이도 되고
용도에 따라서
나오는 대로 처리하면서
굴리는 도리가
스스로 지혜롭게 나온다
이겁니다.
자기가 먹어봐야
맛을 알듯이.


(지난 호에 이어서)
질문자1(남): 저희들 생활에서 신행의 자세에 대하여 한 말씀 여쭙고자 합니다. 큰스님 말씀대로 저희들이 주인공 믿음 하나만 가지고 그냥 안으로 녹이고 들어가면 그걸로써 모든 것이 다 끝이지, 그 외에 다른 말씀들은 다 군더더기고 사족인 걸로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만, 또 저희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라든지 업식의 어떤 습관이라든지 저희들의 녹이지 못한 그 인연으로 그냥 모르게 누가 되고 잘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관혼상제 같은 중요한 예법 중에서도 제례, 제사는 한 달에 한 번씩 지내는 분들도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스님 말씀대로 그냥 우주떡 하나 놓고 물 한 그릇 놓고 꽃 한 송이 놓고 그렇게 지내고 싶어도, 그 뒤에 구체적인 어떤 절차라든지 그런 걸 또 몰라서 막상 시행을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우리가 공양을 할 때에 선원에서는 합장하고 공양을 잘하면서 나가서는, 기독교인들은 참 잘하는데 우리는 잘 안됩니다. 그러한 것들도 합장을 먼저 하는 기독교인들 보고 저는 오히려 거꾸로 주인공 생각이 뒤늦게 나거든요. 그렇지만 행이 바로 이렇게 잘 나와지질 않아서 그렇게 마음은 뻔하면서도 제때 제때 발휘가 안됩니다.

또 우리들이 선원에 들어올 때부터 법당에 앉을 때까지의 여러 가지 예법들, 하다못해 절하는 자세도 참 각양 각색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예법도 하나의 행의 규범이 돼서 그걸로 인해서 믿음을 더욱 더 공고하게 해 줄 수 있는 가능성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러한 요식이랄까요, 절차랄까요. 그러한 행하는 자세에 대한 가르침을 스님께서 문서로 하시든지 그렇게 구체적으로 해 주시면 상당히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큰스님: 웬 말이 그렇게 많습니까? 하하하…. 그런데요, 세상살인 말이 많죠. 수억겁을 거치면서 그 습관되고 찌든 문제들이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게 아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네 나무는 네 뿌리를 믿어야 한다 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제 나무는 제 뿌리를 믿기 위해서 모든 거를 거기다가 놔야 되는데, 놓다가 못 놓다가 놓다가 못 놓다가…, 이렇게 실랑이를 하고 갑니다. 그렇게 가다가 ‘이게 조금 미흡하구나.’ 할 때는 거기서 체험을 좀 하게끔 합니다. 자기 그 근본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또 이끌어 주는 마음도 역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체험을 하고서 그 줄을 잡고, ‘아, 이럭하면 이렇게 하는 거로구나.’ 그러곤 그 줄을 잡고, 하나를 잡고 갑니다. 가다 보면 엉뚱하게 또 딴 걸로 돼 가지고 딴 거는 안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도. 그건 왜 그러냐. 세상만사가 그 용도가 천차만별인데 어떻게 한 용도의 한 굴림만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떠한 용도가 오든 이렇게도 굴리고 저렇게도 굴려서 자기네가 지혜를 낳아서 이게 작용하는 거지, 어떻게 그거까지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가르쳐 줍니까. 그러니까 거기에서 스스로 지혜롭게 네 스승을 네가 스스로 찾아라 이겁니다. 네 스승을 네 스스로 찾는다면 그 안에서 다 길잡이도 되고, 용도에 따라서 나오는 대로 처리하면서 굴리는 도리가 스스로 지혜롭게 나오는 거다 이거예요. 먹지 않던 것도 자기가 먹어 봐야 그 맛을 알듯이 본인이 먹어 보지도 않은 맛을 어떻게 알라고 합니까? 그러니까 본인들이 알아서 해야 되는 겁니다, 그것이.

그렇기 때문에 한마디로 요약해서 ‘용도대로, 닥치는 대로 굴려라.’ 하는데, 그것이 용도에 따라 굴리라는 거죠. 아픈 것도 그냥 주인공에다가 굴려서 하면 그게 약사가 되고, 굴림이 이렇게 자꾸 바꿔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하나인데, 아픈 거는 아픈 것대로 통신이 돼서 약사가 돼 주고, 또 가정에 무슨 일이 있으면 그 주인공에서 입자가 나와서 조절해서 관세음이 돼 주고,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것을 입자라는 말을 안 하고 보살이라고 그랬죠. 그러니까 부처님의 마음이 즉, 이름이 보살이요, 바로 그것이 법신(法身)이요, 그것이 화신(化身)이요, 부처님의 마음 자체가 용도에 따라서 이름이 제각기 나오는 거죠.
그러니 주인공은 하나인데, 그 주인공 속에서 천차만별의 이름이 나오니 그건 무슨 연고냐, 이런 말입니다. ‘주인공’ 하면 일체제불의 마음 전체가, 우주 삼라만상 대천세계가 한데 합쳐지는 연고입니다. 그렇게 합쳐지는 그 마음속에서 바로 ‘내가 아픕니다.’ 하니까 거기서 그 마음이 통신이 돼서, 즉 말하자면 약사보살이 탁 응신(應身)으로서 응해 주는 거죠. 예를 들어서, 의사한테서 병명이 나와야 그 밑의 간호사들이 다 움죽거리죠? 통신이 돼야 보살들이 움죽거리죠, 응신으로서. 그러니까 겁날 것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이 공부가.

그래서 조심할 건 바깥으로만 끄달리지 말라 이거죠. 부처님도 그러셨지만 내 생각으로는, 옛날에 예수님도 그랬어요. 내가 지어서 지금 그냥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도 ‘각자 자신을 믿어야지, 너를 믿지 않고 타인을 믿는다면 그건 마구니의 짓이니라.’ 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각자라는 소리를 안 했기 때문에, ‘모두 각자 나를 믿어야지’ 요렇게 해야 되는데, ‘나를 믿지 않고 타인을 믿는다면 전부 마구니의 짓이니라.’ 이렇게 말을 했으니, 모두 예수님 하나로 그냥그냥 들어가 버린 거죠. 그러니까 예수라는 껍데기를 찾아 들어간 거죠. 예수님의 진짜 마음을 자기의 마음이 알아서 예수님의 마음도 둘이 아니게 통신이 돼야 되는 건데, 그러지 못한 거죠. 그런데 부처님은 아주 똑바로 ‘각자 너희들의 자성을 믿지 않는다면 모두가 허깨비 같은 일이고, 모두가 꿈과 같고 바람과 같고 도깨비 같으니라.’ 이러셨거든. 그럼, 두 번째 끝났습니까?

질문자1(남): 예. 이제 마지막입니다. 회향에 대해서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고난과 액난을 바라는 분들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냥 이렇게 믿고 놓고 관(觀)하는 과정에서 그냥 가고가고 돌아돌아 어떠한 고난이나 액난이 그냥 사라져 주길 바라는 그런 마음뿐이고, 또 그 과정에서 좋은 일이 있고 감사한 일이 있으면 회향을 잘합니다. 그런데 실지로 막상 고난과 액난이 닥쳤을 때에는 당황하게 되고 어쩔 줄을 모르는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제 생각에는, 원해서 온 거는 아니지마는 어찌됐든, 어차피 겪어야 될 고난이나 액난이 왔을 때에는 ‘그것이 바로 공부의 재료고 스승이다. 스승님이 나를 가르쳐 주러 오셨다.’ 하는 생각을 내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오히려 그 경계가 하나의 회향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게 함으로 해서 그 고난과 액난을 적극적으로 견뎌낼 수 있고 이길 수 있고 또 거기서 정말 또 한 소식 들을 수 있는 그러한 자리가 있지 않겠느냐. 그래서 회향은 좋고 감사할 때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려울 때에, 힘들 때에 하는 그 회향이 더욱 큰 정진의 거름이 될 것 같다 하는 생각에서 말씀을 드립니다.

큰스님: 회향이라는 것이 천차만별이죠. 지금 현재 살아나가는 생활 속에서 인생의 회향을 어떻게 해야만 잘했다고 하느냐는 회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술을 마시고 집안을 난가(亂家)를 만들고 이렇게 해서 인생의 회향을 마치느냐, 또는 부인을 둘 셋씩 두어서 서로 은혈이 지게끔 해 놓고 회향을 하느냐, 또 그렇지 않으면 수수하게 잘 살다가 회향을 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적극적으로 내가 뿌린 씨는 내가 거둔다는 그러한 일념으로써 살아나가면서 회향을 하느냐, 이런 거죠.

또 이러한 공부를 하는 스님네들의 일체 회향이 있습니다. 일체 회향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서 회향을 해야 하는 겁니다. 죽어서 회향한다는 것은 없습니다. 즉 말하자면, 살아서 회향이 있는 까닭에 살아 나온다 죽는다 이런 언어가 막히는 겁니다. 죽은 뒤에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열반이 되고 회향이 돼야 진짜 그것은 삼세(三世)를, 즉 과거 현재 미래, 삼세를 찰나찰나 나투면서, 우주와 이 대천세계를 찰나찰나 나투면서 보고 듣고 행하고 맘대로 자유권을 얻는다 이런 겁니다. 그렇게 자유권을 얻음으로써 지금 부처님께서 이름을 지어서 말을 했다 하면, 그 넓은 끝없는 바다 가운데서 도장을 받았다, 이 소리나 똑같은 얘깁니다. 해인(海印)을 받았다, 해인을 받는다고 하죠.

그런 까닭에, 죽어서는 부딪침이 없기 때문에 대의의 공부를, 죽고 사는 생사를 다 끊을 만큼 공부를 못 합니다, 몸이 없기 때문에. 부딪침이 없기 때문에 고(苦)도 낙(樂)도 없어서 공부가 아니 되죠. 낙도 고도 있어야 공부가 되는 거지, 자기를 다스리고 공부가 되는 거지, 몸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죽기 전에 열반의 경지에 들어야 생사를 초월하고, 또 이 세상에 부처님이 나오셨다, 가신다, 이런 언어가 끊어지고 살아생전에 회향을 한 겁니다. 그래서 일체지에 회향을 하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그런 뜻이기 때문에 우리가 살면서 일체지를 회향을 한다 이런다면, 그 회향이라는 이름도 방편입니다.

그 회향이라는 이름도 방편이지 회향이라는 그 자체는 찰나찰나…. 예를 들어서 ‘내가 애들을 데리고 나갔으면 집에까지 데려다 놓는다.’ 요게 회향입니다. 애들을 데리고 나갔으면 바깥에다 놔두고 그냥 있을 수는 없죠. 안에다가 데려다 놓는 것까지가 회향입니다. 밥을 했으면 먹고 치운 게 회향입니다. 그리고 남의 일을 무엇을 맡아서 해 준다 그래 놓고 끝을 마치지 못하는 건 회향이 못 되죠. 그래서 그렇게 끝을 마치는 사람은 애당초에 그런 일을 맡지를 않죠.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절대로 맡지를 않죠. 내 능력과 내 분수를 알고 내 능력이 되는 일을 해서 끝을 마치죠. 그게 회향입니다. 그래서 자기 분수를 모르고 들뜬 마음에서 그냥 인생살이를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뿌려 놓고 자기가 회향을 못하고 끝을 마치는 사람들이 많죠. 그러니까 찰나찰나 회향이지 회향이 따로 없다 이런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부담스럽게 살 필요는 없어요. 그저 진실하게 내가 뿌린 거 내가 거둔다. 나는 절대로 양심을 속이지 않는다, 속인다 이런 것도 없이 그냥 스무드하게 남을 나와 같이 생각하고 또 내 아픔같이 생각하고, 그러되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 그렇게 착하기만 하라고 가르친 게 아니라 양면을 다 줬습니다, 법도. 그래서 불(佛), 법(法), 승(僧) 아닙니까?
그러니까 ‘자기 분수를 알고 맡아야 회향을, 끝을 잘 맺는다.’고 했죠. 자기의 분수를 모르고 무슨 좋은 일을 한다고 보증을 서 주거나, 빚 보증을 서거나 그럴 게 아닙니다. 내가 생각해 봐서 만약에 그 집에서 안 갚아도 내가 갚을 수 있는 능력이 될 때에, 또는 그거를 해 주지 않으면 안 될 집이나 보증을 서는 거지, 아무한테나 보증 서는 게 아니죠. 자기 집 한 채 놓고 땅 몇 뙈기 있다고 보증을 탁 서 놓고선 그거 홀딱 뺏기고 거지가 돼 가지고, 식구들까지도 다 거지를 만들고 이러는 건 회향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그렇게 하는 거를 착하다고 한 게 아니에요. 착한 게 따로 있어요. 똑똑하고 착한 게 따로 있는 거죠, 그러니까. 사람이 희미하게 살라고 그렇게 부처님이 가르친 게 아니죠. 정확하고 똑똑하고 그렇게 살라고 하신 거죠. 하하하…. 그리고 인자하고요, 둥글고….

질문자1(남): 오늘 이 질문이 조금이라도 공덕이 된다면, 이 공덕이 우리 선원의 연세 많으시고 몸 불편하신 모든 보살님들에게 회향되어지길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큰스님: 아유, 그렇게 말씀 마시오. 우리들이 지금 말하는 거요, 우주 천하가 다 듣고 있습니다. 내가 예전에 여기 처음 왔을 때, 부처님만 자꾸 섬기길래, 부처님을 갖다가 그냥 바깥에 내다 놓고 부수면서 한 말이 있습니다. ‘당신네들, 이 부처를 믿고 온다면 다 안 와도 좋다.’ 이랬습니다. 다 안 와도 이 법당 안에 꽉 차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이 고깃덩어리를 믿으려고 하지도 말고, 형상을 믿으려고 하지도 말고, 같이 둘 아니게 생각해라. 내 몸과 둘이 아니요, 내 생명과 둘이 아니요, 내 마음과 둘이 아니니까 그 둘이 아닌 걸로만 알고 나가라. 법당에 들어오면 부처님한테 다 일임해서 하나로 만들어서 일념으로써 삼정례(三頂禮)를 하든지, 급하면 일정례를 하든지, 팔정례를 하든지 칠정례를 하든지 그러되, 그 정례가 끝나고 나면 바로 네가 다 가지고 안고 가는 게 주인공이다.’라는 겁니다. 자기 주인공한테 감사하고 또 나가라 이거죠.

그래서 부처는 자기가 가는 데마다 있는 거예요. 부처는 자기가 변소에 앉아 있으면 변소에 계시고, 들에 서 있으면 서 있는 부처가 들에 계시고, 바깥에 나가서 앉아 있으면 앉아 있는 부처가 계시고, 일을 하면 일을 하는 부처가 계시고, 또 방안에서 자면 자는 부처가 계시고…. 이렇게 말해도 못 알아들으시면 큰일이죠. 하하하.

질문자2(남): 광주광역시에서 왔습니다. 지난번 소년소녀 가장돕기 법회를 성황리에 마치게끔 해 주셔서 큰스님, 다시 한 번 광주 시민을 대표해서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우선 질문은 두 가지만 하겠습니다. 제가 지금 상당히 어려운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아마 그것이 이 한마음 공부를 접하게 된 인연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해 봅니다. 그렇지만 선량한 다른 사람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고, 마음에 고통을 준 것을 생각하면 제가 정말 견디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주인공에 관하고 내 마음속에 있는 부처에게 관할 때마다 제 마음이 다 전달되기를 바라지마는, 그 마음이 아마 전달이 못 된 때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제가 과연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큰스님의 말씀을 한번 듣고 싶고, 두 번째 얘기 계속하겠습니다.

제가 이 마음공부를 접하게 된 기간이 아주 길지는 않습니다마는, 아마 일반적인 질문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과연 내가 전생에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과연 내가 전생에 무엇이었으며, 전생에 어떤 일을 하고 살았는가, 아니면 어떻게 지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전생에 가졌던 그 업을 우리가 이승에서 다시 만나서 풀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궁금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 대해서 한 말씀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큰스님: 그 두 가지가 다입니까? 그러면 들어오신 지가 얼마 안 되는군요.

질문자2(남): 예. 한 5개월 됐습니다.

큰스님: 신참이군요. 하하하…. 그런데 내가 아까도 얘기했듯이 “지금 현재에 어떻게 사는가를 보면 과거에 어떻게 살았다는 거를 알 수 있을 겁니다.” 했죠? 댁의 마음이 당차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 아닙니까? 모두가 허점이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죠. 자기가 저질러 놓고 자기가 그 마무리를 못하는 것을 주인공에다 맡기고 하려면 댁의 말마따나 통신이 돼야 하는데 통신은 되지 않고 힘들겠죠. 내 팔자 한탄까지 나오고요. 그렇지마는 절실히 믿고…, 지금 댁과 같은 상황 속에선 옴짝달싹도 못하게 생겼어요, 내가 볼 땐. 하지만 진짜로 믿어서 통신이 된다면 귀인이 나올 수는 있죠. 그러니까 열심히 해 보세요.

사람이 못한다고 해서,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그래서 못 빠져나가는 게 아니에요.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서 불이 났어도 그 불덩이 속에서 빠져나가는 놈은, 벽이 없고 봇장이 없기 때문에 빠져나갈 수도 있는 거지, 문만 찾아서 빠져나가려고 하니까 못 빠져나가죠. 아직은 댁에서 신참이 돼서 그걸 잘 납득을 못할 거예요. 그러니까요, 무조건 댁의 나무는 댁의 뿌리만 믿고 ‘너 뿌리만이 에너지를 줄 수 있어. 뿌리만이 가지와 잎새에 꽃이 피게 할 수 있어.’ 하고서 모든 걸 거기다가 하세요.

사회자: 질문 이제 끝났습니다.

큰스님: 그러세요? 그럼 뭐 다행이로군요. 하여튼 찰나찰나 회향이 있지, 미래에 회향이 있고 이런 게 아닙니다. 우리가 마지 올려 놓고 예불 모시고, 마지 내려가면 회향입니다. 그거와 같이 인생살이도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한 찰나 찰나, 내가 얼마나 뿌리고 얼마나 거뒀는가 그것이 정확해야만이 회향이 찰나 찰나 잘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부처님이 역시, 아주 준엄하게 가르치신 뜻입니다. 참 감사합니다. (합장하시며) 더운데 이렇게 왕림해 주셔서. 하하하. 이렇게 동참하시고….

그랬는데요, 가만히 생각을 해 보면요. ‘야, 우리의 인연도 보통의 인연이 아니로구나. 지금 세(世)에만 만난 게 아니라 수억겁 세에도 우리는 같이 만나서 공부를 했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인연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옛날 옛적 친구라고만 생각하세요. 그러니까 여자 친구도 됐었고, 남자 친구도 됐었고, 그냥 어머니 아버지도 됐었고, 그냥 자기가 자식도 됐었고, 자기가 부모도 됐었고 그냥 겁을 돌았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열심히들 공부하세요. (합창단을 향하여) 음성 공양을, 공양을 또 잘 들어야죠. 공양이란 말 무슨 소린 줄 아시죠? 합창하는 게 공양이에요. 공양!

※위 법문은 1996년 6월 2일 법형제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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