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말귀(新話頭) ③

몸뚱어리도 하나의 환상

부처님의 출현도 환상

환상 아닌 진상 구해야

 

새말귀는 시간 따로 필요 없다

눈 뜨면 “몸뚱이가 깼다”

식사할 때도 화장실 갈 때도

‘자체성 없는 나’를 보면

하루 종일이 ‘화두’

 

본래 그 자리가 밝은 것인데 밝은 것이 어떻게 보이나요? 뵈. 봤던 예사로 봐. 밝다는 이런 인식조차도 없어. 원래 밝은 것도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밝은 것이 보여. 또 어두운 것이 보인다 말이지.

그러면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은 이 자리가 진짜라 말이여. 앉을 때는 그걸 봐야 돼. 그걸 한 번 보고 싶다. 이거 보입니다. 앉았어. 캄캄한 데. 밝은 것도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닌 것을 이것을 한 번 보리라 하면 나타나는 거여. 처음에는 이거 나타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있으면 흑백으로 나타나. 그 다음에는 빛깔이 나타나. 광명도 보이고 빛깔도 나타나. 예수교 열심히 믿는 사람들, 불교도 열심히 믿는 사람은 부처님 나타납니다. 그 부처님이 어쨌든지 역시 환상이거든요. 다 지가 만든 것이거든요. 예수가 나타나면 지가 만든 예수 아니에요? 꼭 한가지입니다.

그거 밝은 것도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닌 것이 환하게 나타나. 산하대지가 환하게 봬. 어떨 땐 달도 뵈고 해도 뵈고 별도 봬. 그러나 그건 과정으로서 좋은 거예요.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도 아니라. 그것도 어려운 법이여. 그렇다고 해서 그걸 버릴 필요는 없어. 왜 그러느냐. 우선 여러분이 볼 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몸뚱어리도 하나 환상이거든. 그러면 부처님이 나타났다 말이여. 그것도 환상 아닌가. 우리가 환상을 구하는 것은 아니거든. 진상을 구하는 것이지.

그러하기 때문에 거기에 머물지 않는 거여. 비암비명, 이것도 그대로 넘어가는 거라. 비암비명, 마지막 과정으로서 좋은 과정이에요. 거부할 필요 없어. 나중에는 그대로 넘어가. 그대로 넘어가도 비암비명을 내가 그대로 알아서 써. 그래서 밝은 것이 오면 밝은 것을 써. 어두운 것이 오면 어두운 것을 써.

이런 화두를 솔직한 말로 한 반 년만 더 가져 보세요. 처음에 알아. 이치상으로 알아. “내 손이 핸들을 가졌다. 내 손가락이 주판을 놓는다. 잘 놓아야 되겠다. 잘 놓아야 되겠다는 요 생각 하나 뿐이여. 잘 놓아야 되겠다 하는 이건 성품이 없는 거다. 잘 놓아야 되겠다고 이런 생각하는 자리는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자리이다” 이러한 생각을 미리 가져 놓고 잘 놓아야 되겠다는 것은 간단한 거여.

나중에 생각만 “잘 해야 되겠다” 하면 벌써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자리가 이걸 끌고 다닌다는 이걸 자꾸 재인식하는 거라. 그러하지 않아요? 그리 되는 거여.

처음에는 잘 안돼. 싱거워. 또 안다 하더라도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다 하는데, 글을 쓰든지 뭘 하든지 간에 자꾸 “내가 자체성이 없는 손을 가지고서 글씨를 잘 써야 되겠다 주판을 잘 놓아야 되겠다. 밭을 잘 갈아야 되겠다 운전을 잘 해야 되겠다.” 그러하면 “옳지 요것은 무정물이다 이 몸뚱이는 무정물이다 허공성이다. 그러나 이렇게 잘 놓아야 하겠다는 이 자리는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진짜 내다” 이것이 굳혀질 것 아니에요? 한 반 년만 가져 보세요. 딱 굳혀질 겁니다. 딱 굳혀지면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허공 그 자체가 내 몸이라는 걸 느끼게 될‘ 겁니다. 난 그런 생각도 합니다. 이 수밖에는 도리가 없어. 도리가 없어.

이래 되면 집에서라도 공부를 할 수 있는 거예요. 밥을 하면서 쌀을 씻으면서. 이건 자체성이 없다. 내가 쌀을 씻는다 쌀을 잘 씻어야 되겠다. 불 잘 때야 되겠다, 밥해야 되겠다. 전부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이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진아가, 진짜 내가, 참 내가, 지혜가 없는, 아는 것이 없는 이 손발을 움직여서 밥도 짓고 밭일도 하고 장사도 하고 회사도 나가고 하는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건 사실을 사실대로 알자는 거예요. 다른 것 아무 것도 아니에요. 여기 사실 아닌 것이 어디 있나요?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을 하기를 요걸(몸) 나라고 봤단 말이에요. 물론 이거 내지. 내 관리물이니까 나라고 할 것 아니에요? 나지만 자체성이 없는 거라. 이걸 내라고 해서 엉뚱한 모습에 딱 들어앉았단 말이지. 들어앉았지만 이 모습은 자꾸 변하는 것 아니에요? 자꾸 변하는 거라. 그런 걸 믿어?

그러하기 때문에 이전 어른들도 화두를 내 놓은 거라. 화두를 딱 줘서 다른 생각을 안 하도록, 다른 생각을 못하도록 해서 화두를 전념으로 하도록 만들어 놓는 거라 말이여.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이것이 안돼. 시간이 없어. 하지만, 새말귀를 할려면 시간이 필요 없어. 눈 딱 뜨면 내, 깼다. 내 자체성이 없는 이 몸뚱이가 깼다. 벌써 내다 하면 고런 뜻이 다 들어가. 내다 하면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그 자리를 뜻하는 것이거든. 변소 가더라도 아, 내가 변소 간다. 내가 세수한다. 세수 잘 해야 되겠다. 밥 잘 먹어야 되겠다. 하루 종일 화두에요. 새말귀는.

물론 스님네들이 하는 화두는... 하루 종일 하는 거라. 잠잘 때만 놓았다 뿐이지. 어떤 사람은 잠잘 때도 생각을 해. 잠잘 때도 생각을 한다면 하루 종일 화두거든요. 중생도 내다. 내 일 잘해야 되겠다. 하루 종일 화두에요. 그럼 어쩌다 꿈에도 내다 이래져. 꿈에도 이래져. 하루 종일 화두를 가지는 것은 스님네와 일반 중생과의 그 입처가 다를지언정 하루 종일 화두를 가지는 것은 매일반이라 말이죠.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가 출가할 수 있는 팔자를 못 타고 났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방편만 조금 고치면 우리도 화두를 가질 수 있다 말이여. 도리어 이 화두가 어떠한 면으로 봐서는 더 빠르지 않느냐. 이런 생각도 있어요. 물론 화두를 가지는 것이 이전 화두나 지금 화두나 빠르고 늦는 것이 있겠습니까만, 실에 있어서는 같은 도리이겠지만 이런 생각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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