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광수공양(廣修供養)

시자·수자·공양물

즉 삼륜은 청정해야 하며

정성껏 성의를 다해야 한다.

봉사 역시 공양을 의미

공양 통해 평안에 이른다.

 

 南無至心歸命禮西方阿彌陀佛(一拜)

以諸最勝華?樂 塗香傘蓋衣服香

燈燭皆如妙高聚 我悉供養諸如來

我以廣大勝解心 深信一切三世佛

悉以普賢行願力 普遍供養諸如來

願共諸衆生往生安樂國

 광수공양은 널리 여러 사람에게 공양한다는 뜻. 공양은 지공하여 영양되는 것을 지어 바친다는 것. 결국 우리는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생명은 먹어야 유지되는 것이다. 안 먹으면 안 된다. 만일에 이 먹는 본능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불가사의한 꿈을 가진 허무 맹랑한 사람이다.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이며 또 아주 중대사라는 것을 생각해 볼 일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요(堯) 임금, 순(舜) 임금 같은 이가 제왕(帝王)의 자리를 자기 아들이 아니고, 나라를 다스릴만한 사람에게 물려줄 때 제위(帝位) 계승의 표로서 솥(鼎)을 전수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 솥으로 만백성을, 모든 인민을 잘 먹게 해 주는 사람이라고 하는 뜻이다. 그래서 임금 자리를 물려 줄 때 솥을 주었다. 우리 불교계의 일로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부처님이나 스승에게서 법(法)을 받을 때, 전발(傳鉢)했다. 의발(衣鉢)을 받았다, 바루를 받았다 하는 것인데 바루는 밥 먹는 그릇이다. 밥 먹는 그릇을 받았다니, 불교 역시 먹는다는 일을 얼마나 중요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먹는다는 일을 우리는 중요시 해야되고 또한 우리가 받아먹는 일도 그렇거니와 남을 위해 먹을 것을 만들어 바친다는 일도 퍽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짐승이나 벌레가 먹는 것과 사람이 먹는다는 일은 다르다. 사람이 먹는다는 일이 어떻게 다른가? 차도(茶道)에서는 불을 피워 물을 익혀 먹는다고 한다. 사람은 물을 익혀 먹는 것이 다르다.

물을 익혀 먹는다는 말 속에는 밥이며, 국이며 음식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데 이를테면 사람은 문화생활(文化生活)을 하는 것이어서 이러한 음식을 또 반드시 그릇에 담아 먹는다. 소나 개 따위 가축에게는 쇠죽통이며 개밥그릇이 없는 바 아니지만 이것 역시 사람이 마련해주는 것이지 어느 짐승이고 스스로 밥 그릇을 만들어 먹는 일이란 없다. 그러므로 문화생활을 한다는 것은 사람이 그릇을 만들어 음식을 여기 담아 먹는다는 일로 상징된다. ‘바루를 받았다’는 것은 그러니까 바루가 이 그릇이므로 인간 문화의 대통(大統)을 이어받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인간사회의 문화생활하는 법을 전수 받았다는 말이다. 인간으로서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밥 그릇을 물려받았으며 또 공양하는데도 이 그릇에 담아 인간으로서의 최고의 대접을 하여 지공해 올린다는 것이다. 공양을 받는 것과 지공해 올리는 일은 이런 점으로 보아 매우 큰 의의를 갖는 것이다.

아주 좋은 음악을 공양하는데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음성 공양이라고 하여 좋은 풍악을, 음악을 연주하여 바친다. 향을, 일산(日傘)과 아름다운 옷을, 소향(燒香), 도향(塗香)과 같은 향을 공양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 옷을 입는 것이므로 의복을 지어 드린다. 뜨거운 햇살을 가리도록 일산(日傘=옛날의 큰 파라솔)을 갖다 바친다.

“그리고 등을 모아 수미산(須彌山)과 같이 만들어 부처님께 공양한다.”

광명 공양이라고 하여 어두운 밤에 등촉(燈燭)을 밝히어 공양한다. 석가가 나신 성탄일엔 관등제(觀燈齊), 관등불사(觀燈佛事)를 하는데 부처님은 세상의 등불이시다 하는 뜻으로 그를 축하하기 위한 것이다.

“넓고 큰 마음으로 삼세불(三世佛)께 드린다.” 어진 행원(行願)의 힘으로 여러 부처님께 두루 두루 공양은 손이 크게, 흠뻑 많이 장만해서 바쳐야 되지 적게 조금 하는 것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저 수미산 덩이처럼 크게 해서 바치라는 것이다. 남에게 반지럽게 보이는 것은 대접이랄 수 없으므로 마음을 크게 풍족스럽게 가져 아주 풍엄하게 공양해야 된다.

그리고 음식을 담는 그릇은 좋은 것으로 골라 정하게, 깨끗히 다루어야 한다. 흔히들 공양하는 것을 보면 음식을 처리하는 것이 매우 신통치를 않다.

장은 더들먹스럽게 담구면 구린내가 나고 잡스런 군맛이 생겨 영 못쓰게 된다. 이런 장으로 만든 음식으로 공양을 한다면, 이건 공양이 아니라 남에게 모욕을 주는 결과가 된다. 싫증이 나게 하는 것이 공양이 아니라, 환희심으로 음식을 달게 먹도록 해야 된다.

우리 절의 식당에서 공양을 지어 올리는 사람을 공양주라, 또는 시주(施主)하는 사람을 시자(施者)라고 하며 공양을 받는 사람을 수자(受者)라고 한다. 시자와 수자와 공양물, 이 세 가지는 깨끗해야 된다. 이를 삼륜(三輪)이 청정하다고 한다. 공양물이 청정해야 한다는 것은 그 물건 자체를 두고하는 소리이기도 하지만, 이를 간수하고 다루는데 있어서 정성껏 진선 진미하게 만들어진 물건이라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양을 하더라도 반지럽게 마지못하여 내는 것처럼 하는 것과 마음껏 성의를 다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넓고 큰 환희심으로써, 보현보살의 넓고 어진 행원의 힘으로써 과거에 있었고, 현재에 있는, 그렇게 우리가 확신하고 있는 일체의 여래 앞에 낱낱이 다 공양해 드려야 된다.

우리는 외출하여 길을 가다가 문득 살펴본다. 지나가던 사람이 길가에 선 나무를 괜히 뚝 분질러 버리거나, 심어 놓은 묘목을 심퉁스럽게 모가지를 딱 떼어 버리는 것을 본다. 이것은 공양이 아니다. 남이야 보건 말건 우리나라를 위하여 나무를 심고, 좋은 일을 하고, 길 가다 다리가 무너졌거나 길이 망가졌으면 이런 것을 고쳐 놓고, 길 한가운데 큰 돌이 나와 있으면 이것을 치우고 이러는 것이 모두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오 공양이란 것이다. 봉사한다는 것이 받들어 지공하는 것이 모두 공양하는 것이 된다. 바라건대 우리는 이와같은 생활을 함으로서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편안하고 즐거운 그 지경에 이르러 이를 누리고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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