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한 번 실험하고 나가는 게 진짜 참선입니다

▲ 그림 최주현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이 팔만대장경입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것이 팔만사천의 법입니다.
번뇌가 아니라 법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업보를 지어서 이렇게 번뇌가 일어날까?
죄를 얼마나 지었길래 이런 악한 것이 닥칠까?
이런다면 점점 더합니다.
그냥 불난 데 기름 갖다가 퍼붓는 거나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저 담요로다가 탁 덮으시면 불은 잔잔하게 꺼지듯이
그렇게 하십시오.


(지난호에 이어서)

질문자2(남): 큰스님께서 이렇게 귀한 자리를, 질문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두 가지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첫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서산대사께서 지은 『선가귀감(禪家龜鑑)』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부처님과 조사가 세상에 나오심이 마치 바람 없는 데 물결을 일으킴과 같다. 대자대비로 어리석은 중생 건지심이지만, 한 물건으로 본다면 사람마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이 절로 이루어졌거늘 어찌 남이 연지 찍고 분 발라주기를 기다리리요. 고로 이 세상에 나오심은 잔잔한 물결에 파도 일으킴이다.” 라고 했습니다.
부처님과 조사 스님이 오신 것을 중생의 입장에서 볼 때는 크나큰 복이었는데, 어찌 이런 말씀을 해놓으신 것인지요? 정확한 뜻을 알 수 없으나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가령, ‘큰스님 오심이 바람 없는 데 물결 일으킴이다.’ 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가르침 주시길 바랍니다.

큰스님: 허허허. 어떻게 사람이 웃기만 하고 살 수도 없는 거고, 웃지 않고만 살 수도 없는 겁니다. 그것은 거꾸로 말한다면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 부질없는 짓이다.’ 하는 것이 지금 그 말이죠. 오히려 그 파도를 일으킴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잘 뒤집어서 생각을 한다면요, 사람은 일으킴과 가라앉힘과 동시에 작용이 돼야만이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다라는 말이 됩니다. 만약에 파도로 비유를 한다면 파도가 일지 않으면 고기 떼가 다 죽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왜냐하면은 태양은 물 바닥까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이 항시 돌아야만이 고기 떼가 살 수 있거든요. 그 말을 한번 비유해본다면, 모든 거를 그래서 정(定)에 들게 이끌어주는 겁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한 발, 사람이 이걸 들었다가 놓을 수 (컵 뚜껑을 들었다가 놓아 보이시며) 없다면 그, 사람 노릇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될 수 없죠. 사람의 작용이라고 볼 수 없겠죠. 들기만 하고 놓지 못하면은 병신이요, 놓고 들 줄을 모른다면 병신이요. 어떻습니까?

질문자2(남): 맞습니다.

큰스님: 네. 주먹을 쥐었다 펼 줄 모른다면 병신이요, 또 펴놓고선 주먹을 쥘 줄 모른다면 병신이요. 그러니까 폈다가 쥐었다가 폈다가 쥐었다가 작용을 자기 스스로 잘하는 것을 일축해서 그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러니 그것을 좀 잘 들으셔야죠. 응? 그러니까 바람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선근을 심어주는 일이죠.

질문자2(남): 두 번째 질문을 여쭙겠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세 번을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주인공에 믿고 맡기는 것으로 세 번 죽기가 가능합니까?

큰스님: 허허허.
질문자2(남): 아니면 큰스님께서 해오신 바와 같이 목숨을 떼어놓고 들어가야 합니까?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큰스님: 주인공을 일심(一心)으로 발견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누구나가, 거지든 거지가 아니든, 남자든 여자든, 스님이든 스님이 아니든 막론해놓고 말입니다.

아까 동자 얘기를 했듯이, 사람은 다리 절름발이가 돼서는 아니 됩니다. 즉 무심(無心)과 유심(有心)이 절름발이가 돼서는 아니 됩니다. 동시에 같이 돌아간다는 자체를 아셔야 됩니다. 영원한 생명의 근본과 마음내는 거와 육신이 움죽거리는 거와 동시에 돌아가죠? 어디 따로따로 돌아갑니까? 눈과 귀가 따로따로 돌아갑니까, 어디? 얼굴이?

그러니까 이것을 악과 선도 거기 놔라. 악한 거는 ‘선하게 이끌어줄 수 있지 않으냐.’ 하고 놓고, 선하게 돌아가는 거는 감사하게 놓고, 모든 거를 한군데다가 놓는 것이 자기가 공(空)해서 본래 없는 것인데, 따로 내가 없다 하는 소립니다. 없어서 없는 게 아니라, 따로 내가 없는데 따로 있다고 한다면 이거는 잘못돼 돌아가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나만 따로 독불장군이 될 수는 없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더불어 같이 돌아가고 있죠. 그러니까 그것을 완벽하게 알 때까지는 모든 것을 ‘내가 따로 없으니까.’ 하고 거기다 놔라 이겁니다. 그게 죽는 방법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따로 없는 반면에 모두가 하나로 돌아가, 모두가. 안 그렇습니까? 공생(共生)이며 또는 공체(共體)며 공용(共用)이며 공식화(共食化) 하고 그냥 모두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간다 이겁니다. 그 도리를 완전히 알게끔 하려면 겉으로, 이론적으로, 학술적으로 알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으로서 ‘한마음 속에서 모든 게 들고 나는 그 무쌍한 만법이 그대로 더불어 둘이 아니게 돌아가는구나!’ 하는 거를 말입니다. 그거를 진심으로 자기 속으로 확철히 알려면은 거기다가 또 놓고 돌아가야 하니까 또 두 번째도 죽어야 한다 이 소립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을 하지 말라.’ 이 소리가 ‘죽어야 한다.’ 이 소립니다.

세 번째도 같이 돌아가면서 서로가 인연에 따라서 이 손수건을 쥐었으면 손수건은 들고만 있는 게 손수건이 아니라 땀을 씻는 겁니다. 응? 어디를 씻든지. 그러면 나와 수건과 인연이 마주쳤기 때문에 씻을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건 발전의 작용입니다, 발전의 작용. 그렇 때문에 나툰다고 하는 겁니다. 나툰다. 예를 들어서 목이 마르면 물을 먹고 땀이 나면 손수건을 들고, 말소리를 내려면 이 마이크를 들고. 야, 모든 일체 만물이 만 가지가 다 나 아님이 없이 나투면서 돌아간다는 얘깁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거를 알려면은 또 놓고 가야 된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한 번도 죽어야 하고, 두 번도 죽어야 하고, 세 번도 죽어야 구경경지(究竟境地)에 이를 수가 있다. 그러니 내가 죽지 않는다면 전체 모두가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이치도 모를 거고, 모두가 하나로 돌아가는 그 원리가 바로 공(空)했다는 사실도 모를 것이다. 그거를 알리기 위해서 한 번도 죽어야 하고 두 번도 죽어야 하고 세 번도 죽어야 한다 이런 말을 했던 겁니다.
아까도 그렇게 얘기했지 않습니까? 부처님과 동자가 얘기를 했는데 “차이가 없습니다.” 했습니다. 부처님 발과 그 어린 동자의 발과 차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질문자2(남): 잘 알겠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큰스님: 그럼 또 질문할 사람 있으면….

질문자3(여): 제가 몸이 자꾸 아픕니다, 허리가요. 피가 순환이 잘 안되고요. 겨울 내내 아파가지고 지금도 자꾸 이래 아픈데, 두 번째 왔는데 좀 덜하긴 덜하지만 어찌 하면 몸이 나을는지요. 허리가 영 꾸부정하던 게 조금 펴졌습니다.

큰스님: 허허허. 그것도 그 몸속에서 한마음으로 작용하는 그 모든 의식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게 업식이니까, 모두 업식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보살님 주인공에다 모든 것을 한마음에다 놓으십시오. 그렇게 맡기시고 ‘이놈들아! 이놈들, 네놈이 이렇게 아프게 한 거니까, 네놈이 아프게 하지 말고 끌고 다녀라.’ 이렇게 하세요.

질문자3(여): 예.
큰스님: 그럭하시면 됩니다.
질문자3(여): 그렇고 또 둘째 아들이….

큰스님: 아, 그것도 거기다가 그렇게 맡기십시오.

질문자3(여): 그것도 거기다가 맡기면 됩니까?

큰스님: 네.

질문자3(여): 예. 허허, 고맙습니다.

질문자4(남): 오늘도 이렇게 큰스님을 뵙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큰스님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죽는 쪽도 사는 쪽도 양면을 다 놓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이것을 어느 한 방향으로 해결하기를 바라고 주인공한테 관하는 게 아니라, 그 양면을 다 놓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도(道)라고 이해를 하고 있는데요, 한쪽으로 해결되기를 바라고 관하는 것은 그 중용의 도를 벗어난 것인지요. 그리고 저희들이 어떤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함인데 그것을 중용의 도에서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되는지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큰스님: 모든 일체 만법이, 바로 당신이 이 세상에 났으니까 당신으로 인해 들이고 내시죠?
질문자4(남): 예.
큰스님: 그래서 중심에서 모든 일들을 하시니까 그 중심에다, 당신 뿌리에다가, 뿌리가 있어야만이 모든 가지, 이파리 또는 그 나무가 스스로 열매도 잘 맺고 그렇게 할 수가 있죠? 뿌리 없는 나무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뿌리만이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 뿌리에다 놓는 것이 바로 중용입니다. 모든 것이 뿌리에서 나옴으로써 싹도 있지 뿌리가 없는데 싹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댁도 주인공 그 자체의 뿌리가 있기 때문에 몸이 있는 겁니다. 몸이 있으니까 움죽거리고 있고. 그러니까 모든 거는 그 중심 주인공에 모든 것을 맡겨놓고 그대로 자기 생각 돌아가는 대로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바로 중용입니다. 이리로 저리로 치우치지도 않고, 이리로 집착을 한다 하더라도 집착이 아니요, 저리로 집착을 한다 하더라도 집착이 아니요, 망상이 나온다 하더라도 망상이 아니요, 모든 게 그 속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 속에다 되놓고 활발하게 인연에 따라서 활용해라 이겁니다.


질문자4(남):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 십대제자(十代弟子) 중에서 신통제일(神通第一) 목련존자(目連尊者)와 지혜제일(智慧第一) 사리불존자(舍利佛尊者)가 계셨는데, 하루는 그 두 존자께서 내기를 하셨다고 합니다. 신통력 내기를 했다고 하는데, 모든 사람들은 신통력 부분에 있어서는 목련존자가 위기 때문에 목련존자가 이길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결과는 사리불존자께서 이기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목련존자가 사리불존자한테 가서 그 비결을 사리불존자에게 물으니까, 사리불존자가 하시는 말씀이 “저는 제가 이긴 것이 아니고 부처님께서 이긴 것입니다. 저는 내기를 하는 순간에 부처님께 기도를 하면서 부처님의 힘을 빌려서 제가 이긴 것입니다.” 라고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때 그 사리불존자께서 부처님께 하신 그 기도와 저희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 기복신앙으로 이해를 할 때 그 기도와 어떤 차이가 있는 건지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큰스님: 그게 차이가 있는 겁니다. 사리불이 기도라고 했으니까, 지금 상식으로 생각하면은 상대를 놓고 기도를 한 걸로 돼 있지만 그게 아닙니다. 그건 즉심(卽心)입니다, 즉심! 자기, 지금 이름해서 주인공이라 하고, 이름해서 즉심이라고 하는데 그거는 자기 마음이 지혜롭게, 말하자면은 이 사람한테 이것을 똑바로 있는 대로 대답을 하려니 그쪽에 해가 갈 테고, 똑바로 대답을 안 하자니 거짓말이 될 테고 그런데, 지혜롭게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가 안 가게 지혜로운 마음으로서, 즉심으로서 중용을 했기 때문에, 바로 그건 기도라고 거기다 붙일 바가 없습니다. 즉심입니다.


그러나 목련존자라 그랬죠? 목련존자는 한 번 뺐으면 낄 줄을 몰랐기 때문에 진 겁니다. 자유스럽게 끼고 빼고, 끼고 빼고 지혜롭게 할 줄 알아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지혜와 또 그 신통력과 둘이 아닌 것입니다. 그거는 여러분에게 가르치기 위한 방편이지 지혜와 도력이 어떻게 둘이겠습니까? 그거는 즉심의 도리입니다.
질문자4(남): 감사합니다. 가르침 잘 받았습니다.

질문자5(남): 그 동안 한마음 주인공에 대해서 조금 생각나는 것을 여쭈려고 합니다. 한마음 주인공 수행을 하다보니까 저의 인상에 많이 변화가 있는 것 같고, 또 제 오장 육부를 흔들어서 청소해서 믿음으로 연결이 된 기분이 납니다. 그래서 그것은 제가 이제까지 해오면서 생활하고 시험 관계니 이런 걸 하다보니까 확실히 주인공을 믿으니까는 주인공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인공을, 생활하는 데 주인공을 찾는다고 해서 밑천 드는 것도 아니고 또 믿고 맡긴다고 해서 뭐 세금 내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큰스님: 허허허.
질문자5(남): 그래서 주인공에 대해서 99%는 부정을 하고 1%만 한번은 믿어봤습니다. 며칠 전이죠, 그러니까. 여기 올 때 합장을 하고 들어옵니다. 그리고 들어와서 천수경(千手經), 신묘 독경을 할 때 이 마음이 주인공을 긍정할 때는 한 번도 잘 틀리지 않고 잘되는데, 첫째 스님의 목탁소리와 스님 목소리와 저와 삼위일체가 돼서 잘되는데, 한 번 주인공을 부정을 했더니, 들어올 때 합장도 안 하고 99%를 믿질 않고 들어왔습니다. 들어와서 천수경이니 신묘 독경을 하는데 아주 자꾸 틀려요, 많이. 부정을 하니까. 그래서 왜 그러나 하고 자꾸 노력을 해도 틀리고 틀리고 해서 나중에는 주인공을 찾으려고 하다가 ‘에이, 이왕 내가 한번 끝까지 실험을 해보자.’ 하고 했는데 계속 틀려요.

그래 끝날 때까지 하고선 주지스님 방에 올라가서 또 했는데, 주지스님이 “왜, 지금 문을 닫고 왔습니까?” 그러시더라고요. 아마에 땀이 났던 모양입니다. 굉장히 땀을 흘린 모양이에요. 그래서 나도 나와보니까 사실 땀이 무지하게 났어요. 안되는 거죠. 모든 게 갑자기 잘 안되는 거예요, 부인을 했더니. 그래서 ‘아, 이게 참 그게 아니구나!’ 그래가지고 다시 주인공을 찾아서 긍정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참 주인공이라는 것이 그렇게 묘하고 여러 가지 다각적으로 자기가 편리할 때 제가 찾는데, 뭐 찾는 데는 남녀노소가 없고 때와 장소 배경도 없이 내 옆에서 찾는 것이 항상 이렇게 좋아요. 그러다보니까 99% 부정하고 1%를 믿었는데, 잘 안되는 것이 그 자기 믿음의 척도가 있는지요?

큰스님: 허허허. 그거는 믿음과 믿지 않음이 자유입니다. 척도가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것이지, 그거는 본인들이 너무나 잘 아실 겁니다. 그래서 실험하고 관찰하고 그렇게 지켜보라고 하는 그 자체가 관세음입니다. 그래서 관(觀)해 보고 관해 듣고 관찰하고 말하고, 이 인간 세상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관세음이라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만 바깥으로 들입다 ‘세상아, 세상아!’ 이러고 찾으니 그게 찾아집니까? 그러니까 한 번 한 번 내가 실험하고 나가시는데 그게 진짜 참선입니다. 아주 잘하십니다. 예.
질문자5(남): 감사합니다.

사회자: 오늘 질문은 이것으로써 끝내겠습니다.
큰스님: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하는데 무뚝뚝하게 말을 해? 허허허. 양념도 없이 그냥, 배추 무를 갖다가 쓸어넣고는 그냥 먹으라는 셈이지. 허허허, 무뚝뚝해도 무뚝뚝하지 않게 들어주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말만 여러 시간 듣는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여러분의 마음과 더불어 일심으로써 내면세계를 근중하게 생각하십시오. 여북하면 부처님께서도 “내 고깃덩어리를 믿지 말라. 내 이름을 믿지 말라. 모든 것은 너희들의 마음이 바로 발견이 되면 내 마음도 첨보돼서 둘이 아니니라. 너희가 이 도리를 깨달으면 나와 더불어 같으니라.” 이러셨겠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이 좀 더, ‘왜 우리 대행스님은 부처님 경전 말씀을 안 하시고 만날 저렇게 얘기만 하시나.’ 이러시지 말고 경전이,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이 바로 팔만대장경입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것이 팔만사천의 법입니다. 번뇌가 아니라 법입니다. 그러니까 번뇌라고 해서 이거 내가 얼마나 업보를 지어서 이렇게 번뇌가 일어날까, 업보가 얼마나 많길래 이런가? 죄를 얼마나 지었길래 이런 악한 것이 닥칠까? 이런다면 점점 더합니다. 응. 그냥 불나는 데 기름 갖다가 퍼붓는 거나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저 담요로다가 탁 덮으시면 불은 잔잔하게 꺼지듯이 그렇게 하십시오.
(음성 공양이 끝난 후) 오늘 서산대사의 설을 아주 잘 질문해주셨는데요,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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