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토요 인문학 정원 남동신 교수(서울대 국사학과)

▲ 남동신 교수는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원효에 대한 사상사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문화재 전문위원을 지냈으며 덕성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특히 한국 고대와 중세 불교사에 큰 관심을 갖고 연구를 펼치고 있다. 저서로는 〈원효(1999, 새누리)〉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이색의 고려대장경 인출과 봉안〉 〈고려 중기 왕실과 화엄종〉 〈고려 전기 금석문과 법상종〉 〈나말여초 전환기의 지식인 최치원〉 등이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원효 … 승과 속 경계 조차 뛰어넘어
한마음 사상 강조하며 백성 아울러
의상 … 승려로서의 본분에 충실하며
불교적 평등사회 건설 꿈꿔


원효(元曉, 617-686)와 의상(義相, 625-702)은 같은 시대를 살아간 동시대인이었다. 둘 다 승려로서 삶의 목표는 같았지만 각자의 기질이라든가 삶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모습 등의 모든 면에서 그들은 대조적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돈독한 우정을 나누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남동신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4월 26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인문학 정원 강연자로 나서 ‘같은 꿈 다른 삶, 원효와 의상’을 강의했다. 다음은 강연의 요지다. 


원효, 승속불이(僧俗不二)의 거사불교(居士佛敎)
원효는 617년(진평왕 39)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慶山)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인 설(薛)씨가 왕족의 성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최근 발견된 자료에 따르면, 설씨가 신라 왕성(王姓)인 김(金)씨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니 그의 신분이 6두품이라는 종래의 통설은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출신성분과 더불어 그의 출가 동기라든가 출가 사찰도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있다.

원효는 650년(진덕여왕 4) 중국 장안(長安) 불교계에서 이름을 드날리고 있던 현장( 602-664)의 소식을 듣고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을 시도했다. 그들은 당항진으로 가는 길에 지금의 직산(稷山) 부근의 동굴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한밤중에 타는 듯한 목마름을 느낀 원효는 근처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는데, 물맛이 감로수다 더 달콤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서야 그 물이 해골물임을 알고는 역겨움을 이기지 못하고 모든 것을 토하고 말았다. 일순간 그는 모든 번뇌와 의혹이 구름 걷히듯 말끔히 해소되는 것을 느꼈다. 그가 그토록 추구해왔던 무엇을 마침내 깨달은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一切唯心造!)”

원효에게 당나라 유학은 더 이상 긴요한 과제가 아니었다. 의상과 헤어진 그는 신라로 돌아와 본격적인 대중교화에 힘썼다.
되돌아보면, 당시 신라는 불교에 힘입어 국가를 경영하려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으므로, 자연 불교는 체제적 성격이 짙었다.
그런데 신라 불교는 위로부터 수용되었기 때문에 지배층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한계를 드러내었다. 대다수 일반민은 장기간의 삼국 전쟁으로 정신적 물질적으로 피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불교적 구원의 손길은 이들에게 미치지 않았다.

이에 지배층 중심의 불교를 반성하고 소외된 일반민에게 종교적 관심을 촉구하는 승려들이 불교계 일각에서 출현했다. 원효가 주로 만나서 교유한 혜공(惠空)이나 대안(大安) 등 비(非) 진골 출신의 승려들이 대표적이었다.
그들은 주로 경주 시내의 저자라든가 경주 외곽을 무대로 이른바 ‘불교대중화운동’에 매진하고 있었다. 원효는 이들과 함께 어울렸다. 그런데 대중들과 몸으로 부대끼며 그들을 교화하다보면 교단이 요구하는 엄격한 계율을 지키기 어렵다. 어부를 교화하려면 물고기도 먹어야 하고 술꾼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술도 마셔야 하며 기생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기방에도 출입해야 한다. 원효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리고 자신의 파격적인 행동을 〈화엄경〉에 근거하여 ‘무애행(無碍行)’이라 이름했다.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파격적인 행동은 그를 교단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러한 그를 대중들은 지지하고 따랐다.

654년 신라 사회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진덕여왕을 끝으로 성골에 의한 왕위 계승은 막을 내렸다. 대신 진골 출신인 김춘추가 김유신의 지원을 받아 중대왕실(中代王室)을 개창한 것이다. 왕실의 교체에 따라 불교 교단의 재편도 불가피해졌다. 중대왕실은 불교 교단을 세속적인 권력 하에 더욱 예속시키는 동시에 대중적 지지를 받는 승려들을 포섭하고자 했다. 한편 원효는 어떤가. 사실 원효가 신념에 따라 불교대중화운동에 종사하였지만, 일련의 파계행으로 말미암아 불교교단으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었다.

파격적이라 할 만큼 자유분방한 교화활동은 반대파에게 더없이 좋은 비난거리였다.
언젠가 황룡사 백고좌회(百高座會)에 추천을 받았지만, 기성 교단의 반대로 참여할 수 없었던 적도 있었다. 더욱이 그에게는 더 큰 시대적 과제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독자적인 철학체계를 수립하는 것과 불교를 대중화시키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의 꿈을 실현시켜줄 후원자가 필요했다.

일연(一然)의 〈삼국유사〉에 남긴 짧은 이야기에 따르면, 원효와 요석공주의 만남은 태종무열왕대(654-661)에 일어났다고 한다. 승려가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것은, 불교에서 바라이(斷頭)죄라고 하는 가장 중한 죄를 범하는 것이 되며, 그 처벌은 세속에서의 사형에 해당하는 교단 추방이었다. 전후맥락으로 보아 원효는 강요당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스스로 자처한 결과였다.
원효의 파격적인 무애행은 궁극적으로 ‘승속불이(僧俗不二)의 거사불교(居士佛敎)’를 지향하는 운동이었다. 기존의 교단질서를 뒤흔드는 파격만큼이나, 위민정책을 추진하며 새로 출범한 중대(654~780) 집권 세력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양자는 정법(正法)으로 백성을 교화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 공감대는 원효와 요석공주와의 파계라는 극적인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를 계기로 원효 스스로 환속하게 되지만 마침내 그는 거사로 돌아가, 각자의 현실적인 처지는 천차만별이나 본질적으로 평등한 중생의 내면적 각성을 촉구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불교적 유토피아(淨土)를 지금 이 땅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원효는 대략 77부 150권의 저술을 남겼다. 그 내용을 보면 당시 주요한 대승불교 사상이 거의 망라되어 있다. 이 정도로 방대한 저술은 교단에서 소외되어 길거리에서 생활하는 승려로서는 불가능하다. 안정된 경제적 후원자가 있어서 동아시아 불교계의 동향을 알려주고 불경 및 그들의 저술을 계속 공급해 주어야 한다. 중대 왕실은 민심을 사로잡은 원효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러니 원효와 요석공주의 인연은 예견된 것이었다.

현재 전해지는 저술은 20여 권 남짓 된다. 그중에서도 현존하는 〈대승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을 비롯하여 많은 책들이 중국이나 일본으로 전해져서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지금은 일부만 남은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은 인도에까지 전해져서 범어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유학도 못한 원효의 저술이 되레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주목받게 된 힘은 무엇이었을까?

원효 사상의 핵심은 ‘한마음(一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한마음은 우주만물의 궁극적 근원이었다. 그는 저술 도처에서 한마음의 구조와 작용을 해명하고자 했고, 이를 바탕으로 수많은 불교쟁론들을 화쟁(和諍)시키고자 했다. 한마음은 단순히 추상적인 관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 내부에 실재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들 모두가 그곳으로 돌아갈 것을 외쳤다. 그리고 자신이 솔선하여 실행에 옮겼다. 어찌 보면 그의 파격적인 행위는 신라인들을 한마음으로 되돌리려는 거룩한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 양양 낙산사 보타전 벽화, 650년 깨달음 직후 해골을 들고 춤추는 이가 원효이며, 뒤돌아보며 당으로 떠나는 이가 의상이다.

의상, 출가자 본연의 길
의상은 625년(진평왕 47) 최고 진골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출가해 승려가 됐다. 그리고 한동안 8년 연상의 원효와 동문수학했고, 드디어 의기가 투합해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그 역시 원효와 똑같이 해골물을 마셨건만, 그는 10년을 기다려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 점 원효와 다분히 비교된다.

의상이 원효와 다른 기질의 소유자임을 보여주는 예화(例話)가 있다. 의상이 중국에 도착했을 때 머무른 신도의 집에 선묘(善妙)라는 아리따운 아가씨가 있었는데, 그녀는 의상의 풍모와 인품에 반해 사모하는 마음을 품게 됐다. 그러나 의상은 세속적인 구애를 뿌리치고 장안(長安)으로 가버렸다. 10년 유학 생활 동안 선묘는 오로지 의상을 기다리며 그의 승복을 만들었다. 그런데 의상은 유학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선묘에게 한마디 기별도 없이 배를 타고 떠나버렸다. 이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선묘가 포구로 달려갔으나, 배는 이미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이에 선묘는 의상을 보호하는 용이 될 것을 다짐하며 바다에 투신해다. 그 후 의상이 귀국해 영주(榮州)에 절을 짓고자 했으나, 이를 방해하는 자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때 한 길이나 되는 커다란 바위가 공중으로 떠오르자, 이를 본 훼방꾼들이 놀라서 도망쳤다. 그래서 절 공사가 끝난 후 절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고 했다. 그 기적의 주인공이 바로 선묘룡이었다고 한다. 이야말로 세속적인 사랑을 종교적으로 승화시킨 한 편의 아름다운 이야기인데,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랑에 비교된다.
의상의 활동 중심지는 영주 부석사였다. 번잡한 경주의 왕성에서 멀리 떨어진 궁벽한 지역이었고, 그만큼 국가 권력이나 왕실의 간섭을 덜 받을 수 있는 장소였다. 이런 곳에서 그는 나름대로의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부석사가 창건되고 나서 문무왕은 의상에게 토지와 노비를 제공하겠다는 호의를 보였다. 676년 부석사 창건 직후에 문무왕이 의상을 흠모해 토지와 노비를 시주하겠다는 호의를 보였을 때, 그는 이런 말로 정중히 사양했다고 한다.
의상은 지위와 신분이라는 세속적인 위계질서를 벗어나 불법(佛法) 앞에서 만인의 평등을 천명했다. 삼국통일의 완수로 권위가 높아진 문무왕의 제의를 거부한 것도 그렇거니와, 거부의 이유로 든 평등사상이 골품제에 배치된다는 점에서 볼 때, 그의 발언은 신라 사회에 매우 신선한 충격을 던졌을 것이다.

물론 그의 평등은 교단 내에 국한된 것이기 때문에, 얼마나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귀족의 가노 출신인 지통(智通)이라든가 빈민 출신의 진정(眞定)이 의상문하에 출가하여, 이들이 의상의 10대 제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적어도 그의 교단 내에서 만큼은 계급평등이 구현되었음을 증명한다. 동시에 교단의 물적 토대의 면에 있어서도 탁발 걸식(乞食)에 의존한 것은, 그가 지역민과의 일상적 접촉을 중시했음을 보여 준다. 이는 방대한 사원소유 토지의 경작이나 귀족층의 시주에 의존한 경주불교계와는 분명 다른 점이다.

의상의 불교적 평등 이념이 교단의 테두리를 뛰어넘어, 골품제적 세속사회에 대하여 과연 설득력을 지닐 수 있었는가. 〈삼국유사〉에 의하면, 문무왕은 경주에 왕성(王城)을 높여 삼국통일전쟁과 나당전쟁 기간 동안 침략에 대비하며 왕실 권위를 높이기 위해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있었다. 문무왕은 의상에게 자문을 구하자, 의상은 편지로 이렇게 대답했다.

“왕의 정교(政敎)가 밝으면 풀이나 흙더미로 경계를 삼더라도 백성이 감히 넘으려 하지 않아서, 재앙을 면하여 복이 됩니다. 그렇지만 정교가 밝지 못하면 뭇사람만 수고롭게 할 뿐이니, 장성을 쌓더라도 재앙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민심은 화려한 궁궐이나 드높은 성곽이 아니라, ‘정교’를 통해서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교란 ‘정도(正道)에 의한 교화’를 의미한다. ‘정도에 의한 교화’야말로 모든 불교도들의 오랜 바램이었다. 특히 의상이 일생에 걸쳐 중시한 〈화엄경〉에서는, 보살이 국왕이 된다면 정도로써 백성을 다스려 나라가 태평해질 것이라는 이른바 ‘보살위왕설(菩薩爲王說)’을 주장하고 있다. 의상은 이러한 〈화엄경〉의 국왕관에 근거하여 문무왕의 자문에 응하였던 것이다. 문무왕이 토목공사를 중단하였음은 물론이다.
이와 같이 의상은 기왕의 사회질서나 국가체제를 그대로 추인하지 않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통일신라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불교적 평등사회의 건설에서 찾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주장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교단 내에서 계급평등을 구현했으며, 세속권력에 대하여도 민을 위한 정치를 촉구했던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전시기 진골귀족 중심의 불교와 분명히 다른 모습이다. 당시 중대 왕실이 실시한 일련의 소농민안정책이 이와 전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상에서 개관했듯이, 같은 시대를 살아간 원효와 의상은 여러모로 대비된다.
출신성분, 중국 유학의 유무, 주요 활동 무대, 국왕과의 관계, 불교 사상, 심지어 동일한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나타나는 기질 등등. 원효가 대승불교사상을 두루 섭렵하여 화쟁사상을 정립하였다면, 의상은 화엄학이라는 특정 유파의 철학에 전념하여 한국 화엄종의 개조가 되었다. 그러나 무어라 해도 가장 커다란 차이는 의상이 승려로서의 본분에 충실하고자 한 반면, 원효는 승려와 속인의 경계조차 뛰어넘고자 하였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끝까지 서로를 존중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불교적 이상이라는 동일한 진리를 추구하는 동반자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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