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느끼고 보은한다는

뜻을 가진 ‘나무아미타불’

이는 스스로 사람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행위이며

떳떳이 사람 노릇하고

살아야겠다는 진언이다

8. 십념(十念)

 

南無阿彌陀佛

우리는 참회하는 진언을 읊었다. 이제 다음은 나무아미타불 하는 아주 큰 구호를 외우는 일이다. 아미타불로 돌아가야겠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대성인을 모셔 놓고 이 도량에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일을 하는 것이다.

나무(南無)는 돌아가 의지하는 것. 아(阿)는 없다는 부정사, 미타(彌陀)는 커다란 생명, 이를 번역하면, 수량(壽量), 또는 자비와 사랑의 빛이라는 뜻으로는 광량(光量)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아미타(阿彌陀)는 헤아릴 수 없는 큰 목숨, 무량수(無量壽) 혹은 헤아릴 수 없는 자비의 빛, 무량광(無量光)이라고 하게 된다. 이렇듯 번역이 두 갈래로 벌어져 어렵게 되므로 그냥 아미타라고 칭하는 것이다. 불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① 자기가 깨치고 ② 남을 깨치도록 하고 ③ 깨친 바를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깨친 행동을 구경까지 밀고 나가 실천하고 ④ 동시에 남에게 실천하기를 권하고 요구하는 뜻이 있다.

그래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란 헤아릴 바 없는 대 생명을 깨친 이에게 우리가 돌아가 귀의한다. 또는 헤아릴 수 없는 대 자비를 베푼 부처님에게 돌아간다는 뜻이 된다.

이것을 주문이라 해도 좋고 명호라고 해도 괜찮다. 원래 주문은 간단한 것이다. 이 여섯자는 간단하지만 그 속에 모든 뜻이 다 들어가 있다.

그렇다면 헤아릴 수 없는 대 생명, 헤아릴 수 없는 대 사랑을 베푼 그 어른에게 돌아 간다는 것은 현대어로 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리가 될까?

대 사회관(大社會觀)을 깨쳐서 이를 철두 철미하게 자각하고 추궁하여 대 사회적인 그런 사명을 완수하는 행동으로 나아가겠다는 말이다. 자그마한 개아(個我), 에고에 급급하지 않고, 구차스런 타산에 얽매어 허덕거리는 생활을 청산하고, 대 사회에 뛰어들어 이를 직접 호흡하고 이를 위하여 힘쓰고 성취토록 하려는 그러한 대 인격(大人格)을 실현한 그 분 한테로 돌아가 의지하겠다 하는 소리가 된다.

이러한 대 사회관, 대 사회성(大社會性), 대 사회적(大社會的)인 행동이라는 어휘에서 거창한 이상주의(理想主義)를 연상할지는 모르지만 결코 그러한 어떤 특정한 관념형태(觀念形態)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고 더 알기 쉽게 말한다면 결국 ‘나는 사람이다’하는 인격(人格) 선언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대 사회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은혜를 느끼고 보은 하겠습니다’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나무아미타불은 보은 감사를 표현한 말이다. 인간으로서 보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행위이며, 이제부터는 떳떳이 사람 노릇을 하고 살아야겠다는 말이 된다. 간단한 말이지만 ‘나는 옳은 사람이다. 나를 사람이라고 알아 주시오’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며 지금은 하나의 인간이 사회에 대하여, 전 우주에 대하여 인격을 선언하는 엄숙한 순간인 것이다.

흔히 선종(禪宗)에서 몰지각한 사람들 중에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고 염불하는 것을 근기가 약한 것으로 치고 우둔하고 불교를 모르는 사람이 참선(參禪)을 할줄 몰라 그러는 것이라 착각하고 있는데 그것은 정말 모르는 소리다. 염불만하면 살부모(殺父母)와 같은 중죄(重罪)를 저질렀더라도 다 사죄(赦罪)가 되는 것이며, 임종시에 나무아미타불 열 번만 뇌이면 극락세계(極樂世界)로 간다고 하니 그야말로 미련한 사람 꾀는 소리라고 헐뜯어 말들을 한다. 이런 말 하는 사람은 정토문(淨土門)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할뿐더러 나무아미타불의 뜻도 교리도 아무것도 모르고 덮어놓고 비방만 일삼는 무리다. 가령 그들 말대로 오역죄(五逆罪)를 짓고 극악무도한 짓을 했다 할지라도 ‘내가 인제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제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할 때 그때야말로 참회가 있고, 반성을 하게 되고 인간으로서의 자각이 생기는 때가 아닐까 보냐. 끝내 무지 몽매하고 몰지각(沒知覺)하여 영원히 무명(無明)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지내는 것보다는 제아무리 극악한 죄악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스스로가 그것을 죄악이라고 깨닫고 반성한 나머지 나는 이제 한번 사람 노릇을 하고 죽어가야겠다고 외친다면 이보다 더 대견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것이 제불(諸佛)의 본원(本願)이고 또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인 것이다.

아주 간단한 구호로서 나무아미타불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즉 ‘나는 사람이오’ ‘이제부터는 사람 노릇을 하고 살겠습니다’하고 이렇게 깨닫고 한 시도 이 생각에서 떠나지 않겠다는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에게 나무(귀의)한다. 감사한다. 보은한다. 오늘 하루를 지내는 동안에 대지의 은혜를 받았다. 태양의 열과 온기를 받았다. 수분과 산소와 생명에 유익한 뭇 영양을 섭취하였다.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하물며 곡식과 옷과 일용품(日用品) 주택 문화시설 등 비록 정당한 댓가를 치루고 얻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얼마나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서 눈에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큰 은혜를 받고 있는 것일까. 은혜를 느낄 줄 알고 사회에 보답하고 보은(報恩)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비로소 사람다운 정상적인 자리로 찾아든 것임을 깨닫는다. 이런 모든 생각이 나무아미타불에는 들어 있다.

우리들 수행자(修行者)들이 생활하는 이 도량(道場)에서 우리가 어떠한 일을 해 나가야 될 것인가 하는 인간으로서의 대사(大事)도 결정하였다. 그 대사인즉은 나무아미타불이며 이는 대 사회의 헤아릴 수 없는 신성한 생명을 깨친 그 자리에 귀의한다는 것이며, 대사회의 생명을 깨치고 실천한 대인격자에게 귀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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