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인 코믹- 마나베 쇼헤이의 <사채꾼 우시지마>

사채업자를 주인공 내세워
‘자본주의 디스토피아’ 그려
탐욕에 허우적 대는 사람들
‘안수정등’의 비유가 연상돼

▲ 미나베 쇼헤이의 <사채꾼 우시지마> 1권 표지
사채로 대변되는 대부업은 이제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현대인이 가장 많은 여가 시간의 도구로 활용되는 TV, 특히 케이블과 위성 방송에서는 언제부턴가 이 같이 세련된 대부업 광고가 많이 송출되고 있고, 지하철 광고로도 만날 수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는 한 유명 대부업체는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여자 배구단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2~3년 전에는 사채를 다룬 동명만화를 드라마화 한 ‘쩐의 전쟁’ 공전에 히트를 친 적도 있다. 일본 정부의 사금융 제재로 사채 경기가 나빠지자 대규모 야쿠자 자본이 한국에 흘러들어와 한국 사채 경제를 장악했다는 믿기 힘든 루머도 이제는 기정사실화된 이야기가 됐다. 이제 대부업, 사채라고 하는 금융업은 이제 우리 주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상품이 됐다. 이를 통해 현대인들은 자본이라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다는 명제는 날이 갈수록 현재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앞서 한국 만화 ‘쩐의 전쟁’을 말했는데, 만화 천국 일본에도 비슷한 주제의 만화가 있다. 바로 마나베 쇼헤이의 <사채꾼 우시지마>다.

한국의 ‘쩐의 전쟁’이 평범한 인간이 사채꾼으로 입신양명하는 모습을 그렸다면, <사채꾼 우시지마>는 자본으로 피폐해지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잔인할 정도로 디테일하게 보여준다. 실제 <사채꾼 우시지마>는 인간의 탐욕과 그 폐해로 인한 파멸을 보여주는 일명 ‘시궁창 만화’ 중에서 <도박묵시록 케이지>와 더불어 수작으로 손꼽힌다.

<사채꾼 우시지마>의 대략적인 이야기는 이렇다. 대부업체 ‘카우카우 파이낸셜’에는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몰려온다. 주부, 학생, 회사원 등 다양한 군상들은 대부분 도박과 여자,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해 돈을 빌린다.

일본의 법정 최고 금리는 24% 가량. 하지만 주인공 우시지마가 운영하는 카우카우 파이낸셜은 급전을 내주는 대신 특별히 ‘십오’ 즉, 열흘에 50%를 받는다. 5만 엔 빌려주고 선이자 1만5,000엔에 수수료 5,000엔을 떼고, 1일 이자가 1만5000엔, 2일이면 원금회수, 받을 돈은 그대로 5만 엔. 말도 안 되는 살인적 금리지만, 우시지마는 아쉬울 게 없다. 급전을 요구하는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사채꾼 우시지마>는 절대로 사채업의 돈이 어떻게 흐른다, 어떻게 운영된다는 자세한 정보를 보여주지 않다. 도리어 채무자들에게 어떻게 돈을 회수하는 지에 중점을 둔다. 사실 사채업자 입장에서는 돈을 ‘어떻게 빌려주냐’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받아내냐’가 더 중요한 명제이기 때문이다. 제3자 입장에서 덤덤히 보여주는 회수과정에서 바로 ‘사채꾼’의 공포가 있다.
 

▲ <사채꾼 우시지마>의 한 장면. 우시지마는 사채를 회수하기 위해 신용제로의 인간을 교환가치 제로의 인간이 될 때까지 착취한다. 돈의 노예들은 자신의 허영과 탐욕에 빠져 우시지마에게 돈을 빌린다.
사채꾼이 설치한 덫에 걸리는 사람들은 애초 현대 신용사회에서 탈락한 군상들이다. 허영심에 빠진 명품족 여성, 천재라고 생각하는 은둔형 외톨이, 깡 하나로 폼 나는 인생을 살려하는 양아치, 손쉽게 돈을 벌고자 하는 직장인 등은 곧 우사지마의 고객이자 노예가 된다.

우시지마가 자신의 고객(?)들에게서 돈을 회수하는 과정은 매우 가혹하다. 매춘, 마약, 구걸은 기본이고 인신매매도 서슴치 않는다. 애초 신용가치 제로의 인간을 교환가치 제로의 인간이 될 때까지 철저히 부려먹는 것이다.

노예들은 돈 앞에서 마음이 급해진다. 당장 그 돈이 없으면 큰일날 것 같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그 돈이 생긴다고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는 주인공 우시지마는 알고 있지만 채무자들은 모르는 사실이다. 애초 문제는 채무자의 탐욕과 허영이지만 노예들은 “돈이 없어서 문제”라고 답을 한다.

분명 탐욕은 우리네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심신을 해치는 독(毒)이다. <사채꾼 우시지마>에서 탐욕에 허우적 대는 군상들의 모습에서 <불설비유경>의 ‘안수정등’을 찾아볼 수 있다.

황량한 벌판을 걷고 있던 나그네가 갑자기 나타난 성난 코끼리에 쫓기게 된다. 나그네는 넝쿨을 타고 우물로 피신해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고 생각한 순간, 우물 안벽에는 독사 네 마리가 또아리를 틀고 있었고 아래에는 독룡이 나그네가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나그네는 넝쿨을 의지해 버티고 있었다. 그 순간 흰 쥐와 검은 쥐가 나타나 넝쿨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쥐를 쫓아야겠다고 마음먹은 찰나, 어디선가 떨어진 다섯 방울의 꿀에 나그네는 자신의 처지를 잊고 만다.

이 비유는 불교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 어떤 건지 보여준다. 나그네는 인생을, 성난 코끼리는 무상함을, 우물은 사바세계를, 나그네가 의지한 넝쿨은 인간의 수명을 의미하며, 이를 갉아먹는 쥐는 아침과 밤, 부질없이 흐르는 시간이다.  그런 와중 나그네의 얼굴에 떨어진 꿀 다섯 방울은 재물, 애욕, 수명, 음식, 명예에 비유된다.

<사채꾼 우사지마>에서 그려지는 채무자들은 인생을 담보로 ‘꿀’이라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다.

많은 재테크 서적은 ‘돈의 노예가 되지 말고 주인이 되라’고 강조한다 . 하지만 재테크로 포장된 자본주의는 결국 많이 가짐으로서 주인됨을 이야기한다. 진정한 소유는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큰 의미에서 ‘안수정등’의 비유일지 모르겠다. 소비와 욕망의 꿀에 속아 진정한 삶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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