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마음으로서 모든 걸 깊숙한 내면세계에 놓고 가세요

▲ 그림 최주현

어떠한 문제가 다가온다 하더라도
흥! 코웃음 탁 치고 웃을 수 있는
그런 물러서지 않는 믿음으로
모든 걸 타파하고 넘어갈 수 있는
공부재료로 알고 공부들 열심히 하십시오

(지난 호에 이어서)
그럼 여러분이 마음공부 하는데 그냥 왔다 갔다만 하고 애고가 있고 병고가 있다고 해서 금방 그것만 애원하지 말고, ‘그것이 바로 공부할 수 있는 재료다.’ 이렇게 생각을 돌려서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네? 그냥 그것만 앞장 세우고 그냥 애탄지탄하지 마시고 ‘야, 이런 수확이 어딨어? 이런 게 닥쳤기 때문에 내가 공부할 수 있다. 그리고 실험을 해서 체험을 하겠다.’ 한다면 고(苦)도 고가 아니에요. 어디 갈 때, 길을 걸을 때, 지루할 때 말입니다, 차가 갈 때에 그 차가 밀려서 지루하게 쉴 때가 있죠. 어떠한 좋은 생각을 해서 생각을 할 때는 그 차가 쉬는지 안 쉬는지도 몰라요. 길을 걸을 때도 지루하지도 않고요. 그런데 그냥 멀건히 있으면은 얼마나 지루하겠습니까, 그게. 가고 옴이 없이 마음이 가고 오고 뛰는데 뭐가 지루합니까? 그렇다고 그냥 별거 아닌 거를 그냥 꼬투리를 잡아서 자꾸 망상이라고 하지 말고 모조리 다가오는 대로 거기다 놓고 신선한 생각을 한번 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아주 남이 안 하는 신성한 생각. 그래야 발전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여러분이 모든 애고ㆍ병고ㆍ유전성ㆍ영계성ㆍ세균성, 어떠한 문제가 다가온다 하더라도 이거는 닥쳐오면은 “흥!” 코웃음 탁 치고 웃을 수 있는 그런 물러서지 않는 믿음이 돼야 되겠죠. 그리고 ‘허, 이게 공부할 수 있는 재료가 또 생겼네. 네가 그렇게 공부하라고 내놓은 거니까 그렇게 내놓은 것도, 그렇게 아프지 않고 어떠한 고가 닥치지 않게 하는 것도 너 아니야. 요런 재료를 내놓는 것도 너야. 그러니까 체험하게 하는 것도 너고.’ 이렇게 모든 것을 타파하고 넘어갈 수 있는 재료로 알고 공부들 열심히들 하십시오.

그 공부들 열심히 못하시면 여러분 몸속에 있는 중생들이 화해서 응신이 되지 못합니다. 응신으로 화하지 못하면 여러분이 공부를 못 하는 겁니다. 그러니 그 속의 모든 중생들이 화해서, 자생중생이 화해서 천백억화신, 응신으로서 둘 아니게 응해줄 수 있는 그런 분이 돼야, 자기가 그분이 되죠. 자기가 바로 그분이 되죠. 그래서 이 공부 하는 분들은 바로 정신계에 요점을 두고, 내 자생중생을 제도해야 내가 제도가 된다는 뜻이죠. 자생중생이 제도가 못된다면은 내가 제도가 되지 않죠. 그래서 마지막 성불을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자생중생을 제도하려면 내 마음으로써 다스리면서 모든 걸, 아까 다섯 가지 향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그것을 잘 생각해보신다면 모두가 공향으로서, 공양으로서 그렇게 아름다운 밝음이 역력히 여러분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면 질문 있으면 질문들 하십시오. 말씀을 하시려걸랑은 한 구절 한 구절 이렇게 얘기하세요. 한데 뒤범벅을 해놓지 마시고요.

질문자1(남): 오늘 이렇게 질문을 드리게 돼서 대단히 영광입니다. 오늘 질문은 제 개인의 질문보다 우리 여러 불자님들의 질문인 것 같습니다. 질문드리겠습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금생에 깨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깨달음에 이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저희들이 이렇게 마음공부 하다가 깨치지 못하고 옷을 벗게 될 경우에 지금의 이 공부가 어떤 공덕이 되는 것인지 가르침 바랍니다.

큰스님: 우리가 지금 공덕이 돼야 된다고 했습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그 뜻을 아시죠? 이 내면의 세계에 밥 한 그릇을 먹어도 내가 먹는 것만이 아니다. 내가 먹어주는 것이고 그 모두가 다 먹기 때문에 공양이다 이렇게 말했듯이, 모든 거를 주인공에다가 (가슴을 짚어 보이시며) 모든 거를 거기다가 감사하게 놓고 또 구정물을 맑은 물로 만들어서 쓰고 그러는 것도 거기 그 자리고 이렇게 하면은 그냥 그대로 열반입니다. 그대로 공덕으로써 그대로 요다음 생에는 부처로서 법신으로서 응신이 되고 이 세상에 이 굴레바퀴 속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거를 다, 어떤 건 갖고 어떤 건 안 갖고 이러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내면으로도 공양 공덕이요, 바로 외부로서도 공양 공덕이요, 공체ㆍ공심 또는 공용ㆍ공식화 하고 돌아가는 그 도리를 하나로 묶어서 주인공이라고 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아, 그거야 틀림없죠. 더디고 빠르고 이것뿐이지 틀림없습니다.

질문자1(남): 감사합니다. 공부하면서 모르는 것도 많고 의문나는 것도 많습니다. 그런데 저희들 중에는 큰스님을 뵙고 질문을 하려 했다가도 막상 큰스님 면전에 서면 아무것도 질문할 거리가 생각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정의 힘이 약한 탓인가요 아니면 다른 도리가 있는 것인가요.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큰스님: 다른 도리가 있고 말고요. 이거는 자기한테서 의정이 나온 거니까 자기한테서 풀어야지 누구한테서 풀려고 애를 씁니까. 하하하. 이거 보세요. 자기가 모든 것을, 화가 났다 하더라도 그렇고, 이런 게 닥쳐왔다 하더라도 그렇고, 어떠한 의정이 난다 하더라도, 그거는 여러분 그렇게 하십디다. 길을 가다가 엎드러지면 그 땅을 짚고 일어난다. 그 땅을 짚지 않고 딴 사람이 일으켜줄 때를 바라고 있으면 영영 일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허공을 허우적거려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게 있듯이, 그 자리에서 나온 거라면,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상대가 있는 거지 여러분이 나오지 않았으면 상대가 없습니다. 무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탓으로 다 돌려라 하는 건 바로 내가 있으니깐 부딪침도 있고 모든 게 있는 거지 내가 없으면 모든 게 있을 리가 있나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나한테서 나온 거니까 바로 ‘주인공, 너만이 이것을 타파할 수가 있어.’ 하고 맡겨야 그 자리에서만이 이런 의정을 타파해줄 수도 있으니 ‘이건 뭐야?’ 하고 묻는 것도 그 자리에다 물으세요. 그래야 빠릅니다. 그래야지, 제삼자한테 물어봤던들 ‘내가 배가 고프니 밥 좀 대신 잡숴주시오.’ 하는 거나 똑같습니다. 내가 대신 먹어봐야 본인이 배가 부를 리가 없지요. 그러니 어렵더라도, 좀 답답하더라도 ‘응, 네가 이런 답답함을 내놓은 거니까, 네가 답답함의 그 의정을 해소할 수도 있고, 그 의정을 풀어줄 수도 있고 너만이 할 수가 있어.’ 이렇게 하고 그 속에서 나온 거 그 속에다가 푸세요. 그래야 공부가 빨리 되죠.

질문자1(남): 네. 감사합니다. 다음은, 저는 경계에 부딪쳐서 그 순간 감정의 동요가 일어날 때마다 자신의 감정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를 생각해보곤 합니다. 어느 책에서 보니까 공부하는 방법으로 ‘자심반조(自心返照)’와 또는 ‘회광반조(廻光返照)’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말은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자심반조’와 큰스님께서 말씀하시는 관법(觀法)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요.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큰스님: 밝은 마음으로서 그 자리에다가 그대로 놓고 감사하게 맡기고 구정물을 말갛게 만들어서 거기다 놓고 이렇게 모든 걸 거기다 맡겨놓고 돌아가면서 물러서지 않는 것이 그것이 바로 그 도리입니다.

질문자1(남): 예. 감사합니다. 다음은….
큰스님: 회광반조(廻光返照)가 무슨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자심반조(自身返照)도 그것도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밝은 마음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런 마음을 내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을 나에게다 놓고 그 모두를 그 깊숙한 내면세계에 놓고 돌아간다면 그게 바로 그 도리입니다.

질문자1(남): 다음 질문 드리겠습니다. 옛날 어느 선사가 제자를 보고 이런 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네 공부가 조용한 중에는 그만한 편이나 움직이는 중에는 아직 멀었구나.” 하시면서 북두칠성을 보라고 했습니다. ‘남쪽으로 얼굴을 돌려 북두를 보라.’ 함이 무슨 뜻인지 가르침주시기 바랍니다.

큰스님: 우리가 얼른 쉽게 말하면 발은 하늘을 보고 머리는 땅속을 본다 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를 하자면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모든 물질이 다 허망한 것이니 그 허망한 물질이 움죽거림이 움죽거림이 아님을 알면 바로 남쪽으로 얼굴을 돌려서 북방을 볼 수 있다 이런 겁니다. 이 북방을 볼 수 있다 하는 것은 마음세계를 보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이 움죽거리는 것이 여러분이 움죽거리시는 겁니까? 네? 이 물질을 가지고 허망하다 했습니다. 그리고 그 허망한 것이 움죽거리는 것을, 움죽거림이 아님을 알라 한 것도 그것도 바로 마음으로부터 움죽거림이 나오지 마음이 아니라면 움죽거림이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깐 마음의 주인이 하자는 대로 육신은 움죽거리게 돼 있으니 그러한 겁니다.

그러니 누구나가 “아, 칠성이 참 잘생겼다. 아! 고놈, 아주 칠성이 곧잘 생겼는데?” 이러기도 하죠. 그러니 이 밝은 마음, 이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닌 도리를 그 밝음에서 보라, 이 소리나 똑같습니다. 남쪽으로 얼굴을 돌려서 북두를 봐라. 내 마음의 제일 높음을 말하는 겁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인간은 머리가 제일 위입니다. 그런데 머리가 위가 아니라 정신이 위란 얘기죠. 북두, 이 모든 것을 남쪽으로 얼굴은 돌리되 그 내면의 북두를 봐라. 그걸 볼 줄 알아야 어느 일을 하더라도, 어느 걸 하더라도 함이 없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움죽거려도 움죽거림이 아니니라. 그게 움죽거려도 움죽거림이 아니요 움죽거리지 않아도 움죽거림이요, 그 가운데 묘미가 있느니라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모두 이것은 우리가 깨달음을 가진 여러 조사들도 부처님들도 다들 그렇게 앉아서 이 얼굴을 여기다 두고도 팔방미인이었지요. 뒤도 보고 옆도 보고, 땅속도 보고 위도 보고, 다 보기 때문에 어느 거 하나 안 보이는 게 없어서 면경알 같다. 면경에 자기가 비치는 게 자기가 아니고 그 팔방미인이 바로 보여야 된다 이런 거죠. 그러니 사무사유(四無四有) 이 모두를, 한꺼번에 시공을 초월해서 걸림없이 돌아가는 이 소용돌이를 바로 우리는 고개를 이리로 두고도 뒤를 볼 수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과거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바로 현실에, 미래에 이 삼세가 바로 일심(一心) 현실 지금 이 자리라는 겁니다.

삼세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내가 항상 얘기했죠. 바로 삼세가 있으니 네가 태어나기 이전을 찾아라 이러는데, 내가 태어나기 이전을 찾느라고 바깥을 그냥 헤매고 도는데 그게 아니에요. 즉 과거도 자기요, 현실도 자기요, 미래도 자깁니다. 그래서 표현을 그렇게 했죠. 작년 씨를 갖다가 올봄에 심었더니 싹으로 화했더라. 싹으로 화했는데 작년 씨를 어디서 찾는고? 그래서 싹으로 화해서 벌써 열매가 맺혀서 열매가 익어서 그냥 그 열매가, 씨가 그 속에 들어 있는데 아니, 작년 씨를 작년에 가서 찾다니! 그래서 그 표현을 그렇게 했습니다. 작년 씨를 올봄에 심었더니 싹으로 화해서 태어난 것을 ‘작년 씨를 어디 가서 되찾노?’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가정에 어떠한 문제가 닥쳐온다 하더라도 한생각을 잘 내서 새 물로 바꿔쓸 수만 있다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질문하십시오.

질문자1(남): 이건 제 개인이 의심난 건데요. 방생에 대해서 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어느 책에선가 보니까 흥부방생은 하고 놀부방생 같은 것은 하지 말라고 그런 것을 본 것 같습니다. 이 말이 이해를 할 것 같으면서도 저는 어떻게 이해가 잘 안돼서 말씀드립니다.

큰스님: 하하하. 묻는 분도 이상스럽게 묻네요. 허허허. 악한 방생, 선한 방생 그걸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이 소리죠? 사람이 악한 거를 지으면 악한 대로 악업이 되고 선한 일을 해서 선업을 지으면 선업이 되고,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까닭이죠. 예? 그래서 선행을 해라 선행을 해라 하는 거죠. 그리고 선행을 함으로써 선업이 되고요. 선업이 됨으로써 착한 업을 받으니까. 남의 따귀를 물씬하게 때려보십시오. 뭐 당장 악업이 닥쳐서 자기한테 따귀가 들어오지요. 그러는 거나 똑같죠.

그러니까 우리가 공부 가르치는 거는 아까 질문을 하심과 같이 악업은 굴려서, 좋은 생각으로 굴려서 그 자리에 놓고 선업은 감사하게 그 자리에 놓고, 이렇게 한다면 악업도 선업도 다 벗어날 수가 있죠. 예?
질문자1(남): 예. 여러 가지로 잘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질문자2(비구): 큰스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겨들은 바가 있습니다. 제가 들으면서 느낀 거는 아마 마음씀이 고를 때 몸은 자유롭다는 그런 말씀으로 제 나름대로 이렇게 생각이 들고, 또 그러면서 제가 여쭈고 싶은 말씀은 ‘날 밝은 날 눈뜬 자가 눈먼 자의 가는 길에 안내자가 되어주고, 어두운 밤에는 눈먼 자가 도리어 눈뜬 자의 가는 길에 안내자가 되어줄 수 있다는 이치를 생각해보라.’ 는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藥師瑠璃光如來本願功德經)에 있는 말씀이 문득 생각이 나서 제가 말씀을 올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저희들의 역할에 있어가지고…, 개별적인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비구 스님과 비구니 스님의 관계에 있어서, 비구 스님이 부족하고 또 비구니 스님에게 뭔가 배울 것이 있고 이럴 때는 그 마음을 한자리 한마음 그 속에 넣어가지고 볼 수 있는데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 안된다는 그런 차원을 다시 한 번 더 조명해서 말씀을 해주시면은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무연중생(無緣衆生) 불연제도(不緣濟度)’라는 그런 말씀인데 거기에 대해서 한마음 자리에 넣어가지고 그런 중생들마저 같이 이 통 속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스님의 말씀을 한번 제가 나름대로 듣고 싶습니다.

큰스님: 허허허. 그거는 물론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지 않는다면 안되겠죠. 몸은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마음이 서로 오고 감이 없이 오고 갈 수 있다면 되겠죠. 허나 이 비구 스님들은 이러한 경향이 더러 많습디다. 비구니는 성불을 못한다느니, 비구니가 알면 얼마나 아느냐느니 이러거든요. 그런데 그것은 그 비구 스님네들 자기 마음에 불과한 겁니다. 대의적인 문제로 본다면 천(天)ㆍ지(地)ㆍ인(人)이 없으면 같이 돌아가지가 않거든요. 산하대지가 만물을 다 길러내는 어머니나 같아요, 태양으로서 따뜻함을 주는 것은 아버지다 할지라도. 그러니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죠.

그래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둘이 상봉이 됐을 때에 그 가운데서 불이 켜지느니라. 전자와 전자가 한데 합쳐졌을 때 불이 켜질 뿐이니라, 이거와 같죠. 어머니 아버지가, 쉽게 말을 한다면 어머니 아버지가 없을 때는 생산이 되지 않습니다. 불이 들어올 수가 없어요. 만물을 길러낼 수가 없어요.

그런데도 그 좁은 생각에서, 통 속에 들어 있으면 바깥을 내다보지 못하니까 그래서 그런지, 하다못해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도 내 스승 아님이 없고 내 아픔 아님이 없거늘 어찌 비구니가 뭐를 아느냐고 이렇게 배척을 할 수 있는가 이겁니다. 모습은 다를지언정 마음이야 어찌 다르겠느냐 이런 말이죠. 생명의 근본도 다르지 않을 것이요, 마음도 다르지 않을 것이요, 생활도 다르지 않을 것이요, 모습만이 다르다 해서 어째서 그렇게 생각들을 하시나, 이런 분들이 더러더러 계시더라 이런 말이죠.

그래 그 생각이 바로 자기의 그 직접적인 자기 부(父)와 자(子)의 만남을 막는 길이죠. 자(子)와 부(父)가 만남이 있어야만이 상부상조해서 마음을 냈을 땐 자가 되고, 마음을 가만히 쉬었을 땐 부가 되고, 자유자재해서 바로 천백억화신으로 응신이 돼서 자재권을 가질 수 있는데, 이거는 ‘비구니는 성불 못해.’ 이러니까 비구니뿐만 아니라, 그렇게 된다면 비구니로부터 매사 걸 다 버리는 게 되거든요. 구하는 게 되는 게 아니라 버리는 게 되니까 자기 홀로 아무리 해도 그것은 될 수가 없죠, 마음이 넓지 못해서. 그러니까 마음을 좀더 넓게 생각을 해서 그 가운데서 모든 게 일심(一心)으로 돌아가는 거고 일심으로 들이고 내는 거니까 일심에다 놔라. 놓고, 나도 없을 때에 비로소 모든 그 자유권이 생긴다는 얘기죠.

질문자3(남): 저는 큰스님 법문을 듣고 참 이 공부를 하게 된 것에 오늘 진실로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스님한테 꼭 묻고자 하는 것은 좀더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을 찾기 위해서 스님한테 질문을 드려보려고 왔습니다. 지금 불교대학이라고 일 년 만에 마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대학을 제가 원서를 접수를 하려고 그러니까 우리 선원에 다니시는 분들은 불교대학에 접수를 안 해도 충분한 공부를 할 수 있으니까 다니지 마시라 하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 답문을 듣고 나서 원서를 내야 되는 건지, 안 내야 되는 건지 확실하게 묻고 제가 한번 공부를 해보려고 질문을 드립니다.

큰스님: 경서를 듣고 교리를 듣고 이러는 것이 나를 발견하고 나를 발전시키는 게 아닙니다. 나를 발전시키려면 나를 시자로 끌고다니는 내 마음의 주인이, 그놈이 어딨나? 나한테 있긴 있는데 어떤 놈인고? 그것을 공부하라는 거지 교리를 배우고 아무리 말을 배워도 몸 떨어지면 말도 떨어지고 입도 떨어져요. 그러니 공덕이 하나도 될 수가 없죠. 그러니 이, 애고(哀苦) 속에서 벗어날 길은 하나도 없어요. 그거는 자유니까요. 자유니까 맘대로 하세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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