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8원소 기본물질

이 순간 조차도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우리가 경험하는 대상이 즐겁거나 괴롭거나 하는 것은
자신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조건 때문에
생겼다가 사라지는 물성들임을 깨달아야


견고성, 응집성, 열성, 이동성 등의 사대성품은 물질이 있는 곳에 항상 존재한다. 이 네 가지 성품 이외에도 “파생된 물성(우빠다루빠)이라는 24가지 물성(루빠)이 있다. ‘앗타살리니’(2, 2권, 3장, 305)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대를 붙잡고 가지 못하게 하면서 파생된 물성들은 사대에 의지한다.”

이같이 파생된 물성은 사대 없이는 생길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파생된 물성이 모든 물질무리가 일어날 때마다 항상 함께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파생된 물성들 중의 네 가지는 물질무리가 일어날 때마다 사대성품과 함께 반드시 일어난다. 그래서 이들은 몸 밖에 있는 물질이든 몸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이든, 물질이 있는 곳에는 항상 존재한다. 이 네 가지 물성은 다음과 같다.
색깔 냄새 맛 영양소
항상 함께 일어나는 사대성품과 네 가지 파생된 물성을 “나누어 얻을 수 없는 (8원소) 기본물질(아위닙보가 루빠)”이라고 한다. 땅 성품이 있을 때는 응집성, 열성, 이동성, 색깔, 냄새, 맛, 영양소가 함께 있다.
색깔을 보면, 이것은 모든 물질이 일어날 때 항상 함께 일어난다. 그것은 오로지 눈이라는 문을 통해서만 경험된다. 그것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이 아니다. 색은 단지 보이는 물성(루빠)일 뿐이다.
색깔은 서로 다른 조건 때문에 다양하다. 그러나 나타나는 어떤 색깔이든 간에 눈이라는 문을 통해서 감지되는 볼 수 있는 물성인 색이라는 것을 주지해야 한다. ‘앗타살리니’(2, 2권, 3장, 318)에서는 봄의 대상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이 모든 물질은 눈에 부딪치는 특성이 있고 안식의 대상과 관련되는 특성 혹은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안식에서 드러나며 사대를 가까운 원인으로 한다.”

보이는 대상은 사대성품을 가까운 원인으로 하는데, 왜냐하면 사대가 없으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대 중 하나의 특성, 예를 들면 견고함이나 따뜻함이 감지될 때 동반되는 색은 동시에 감지되지 않는다.
봄(안식)이 일어날 조건이 된다면 봄의 대상은 지각된다. 눈을 감으면 사물의 모양이나 형태를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물성인 색을 감지하는 것은 아니다. 눈을 감든지 뜨든지 “사물(thing)”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실제 보이는 것을 경험하는 것과는 다르다.

봄의 대상인 색이 무엇인지 알기가 어렵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사물의 모양이나 형태에만 주의를 기울이는데 익숙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것, 예를 들어 의자의 모양이나 형태를 감지할 때 우리는 그 개념을 생각하는 것이다. ‘의자’는 눈의 감성(감각기관)에 부딪칠 수가 없다. 봄은 ‘의자’를 보지 않고 단지 보이는 것만 볼 뿐이다.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다른 순간에 일어난다. 내내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보는 순간도 있다. 그 순간에는 모양이나 형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오직 한순간에 하나의 마음이 한 대상을 경험하지만, 아주 밀착해서 연이어 또 다른 경험이 일어난다. 그것들을 분간할 수 없을 때 우리는 동시에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만일 색이 눈의 감성을 통해서 감지될 수 있는 물성이라는 것을 우리가 주지한다면, 이러한 실재에 대한 바른 지혜가 계발될 수 있다.

앞서 보았듯이 냄새는 8원소 기본물성들 중의 하나인 또 다른 물성이다. 몸 안이든 몸 밖이든 물질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냄새가 있다. ‘담마상가니’(625)에서 유쾌하고 불유쾌한 여러 가지 냄새는 단지 코를 통해 지각될 수 있는 그냥 냄새일 뿐이라고 했다. ‘앗타살리니’(2, 2권, 3장, 320)에서는 냄새를 아래와 같이 정의했다.

“…모든 냄새는 코의 감성에 부딪친다는 특징이 있다. 비식의 대상이 되는 특성이 있고, 후각으로 드러난다….”

이것의 가까운 원인은 사대이다. 냄새는 홀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과 함께 일어나는 사대성품이 필요하다. 냄새 역시 여덟 가지 기본 물성들에 속하는 다른 물성들과 동반된다. 냄새가 나면 우리는 좋거나 싫다는 판단으로 넘어가 버린다. 우리는 향기로운 냄새에 집착하고 역겨운 냄새를 싫어한다. 하지만 냄새란 코를 통해 감지되는 단지 하나의 실재이며 그것은 지속되지 않고 바로 사라진다. 실재에 대한 이해를 계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감각기관을 통해 경험하는 모든 대상의 노예가 된다. 이러한 대상들 때문에 해로운 마음(아쿠살라찢다)이 일어나서 심지어 불선업을 범하기도 한다. 누군가 보이고 만져지고 냄새 맡아지는 것을 소유할 수 있는 실체(자아)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것을 훔치거나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재에 있어서는 이 모든 대상은 무의미한 것이고, 그것들은 생겼다가는 금방 사라질 뿐이다.

‘담마상가니’(629)에서는 신맛, 단맛, 매운 맛 등 여러 가지 맛은 좋거나 역겨울 수 있지만 단지 혀를 통해서 지각되는 그냥 맛일 뿐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앗타살리니’(2, 2권, 3장, 320)에서 맛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모든 맛은 혀의 감성에 부딪치는 특징이 있으며 설식의 대상이 되는 특성을 가지며. 미각으로 드러난다….”

이것의 가까운 원인은 사대이다. 맛은 홀로 일어나지 못하고 함께 일어나는 사대가 필요하다. 맛 역시 8원소 기본 물성들에 속하는 다른 물성들과 동반한다. 우리는 음식에 집착하여 맛이 매우 중요하다고 알고 있다. 우리는 맛있는 것을 맛보자마자 집착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 단지 물질의 한 종류일 뿐인 맛의 실재에 관해서는 망각한다. 우리는 어떤 맛이란 것을 인지할 때, 실은 어떤 개념에 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혀를 통해서 지각한 실재인 맛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실재가 아닌 생각일 뿐이다.

영양소는 모든 물질이 일어날 때마다 함께 일어나는 물성의 한 종류다. 그것은 오직 마음의 문을 통해만 인식할 수 있다. ‘담마 상가니’(§ 646)에서는 살아있는 존재를 계속 살게 하고, 먹어서 소화되어 즙이 될 수 있는 밥, 죽, 밀가루 등으로 기술하고 있다. ‘앗타살리니’(2, 2권, 3장, 330)에서 설명하기를 식품, 삼켜진 덩어리(한입의 입안에 든 음식(까발린까로 아하라), 그리고 “영양소(오자)”가 있다. 삼킨 음식은 위장을 채워서 허기지지 않게 한다. 음식에 있는 영양소는 존재들을 유지하고 살아있게 한다. 조잡한 음식에는 영양소의 함유량이 적고, 정미한 음식에는 함유량이 많다. 변변찮은 곡식을 먹은 후에는 금방 배가 고프지만 버터 같이 정미한 음식을 먹으면 오랫동안 배가 부르다. (앗타살리니, 331)

‘앗타살리니’(332)에서는 영양소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특성에 관해서 말하자면, 단단한 음식은 영양소라는 특징을 갖고 있고, 그것은 (먹는 이에게) 물질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하고 물질을 유지시키는 것으로 드러난다. 가까운 원인은 삼켜진 덩어리이다.”
영양분은 쌀이나 다른 음식에도 있을 뿐만 아니라 바위나 모래에도 있다. 그것은 어떤 물질에도 다 있다. 곤충은 인간이 소화시킬 수 없는 나무도 소화시킬 수 있다. 영양분은 몸이란 물질을 만드는 네 가지 요소 중의 하나다. 나머지 요소들은 업·마음·열이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존재에게 어머니가 먹은 음식인 영양분인 정수가 몸에 퍼지는 순간 영양소에 의해 생성된 물질무리가 생겨난다. 그때부터 영양분은 일생동안 몸의 물질들을 계속 만들어 내고 유지시킨다.
좋은 음식이나 나쁜 음식이 몸에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우리는 영양분이 물질을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쁜 음식이 피부를 거칠게 만드는 반면 비타민을 섭취하면 피부나 머리카락이 건강하게 보인다.

집착 때문에 우리는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는 때가 있다. 우리는 음식이 몸에 필요한 약이란 것을 종종 잊어버린다. 붓다는 비구들에게 몸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최소한 양의 음식을 권했고 더 이상은 먹지 말라고 했으며 먹을 때는 현명하게 잘 성찰하라고 했다. (청정도론 1, 85) 비구는 반드시 자기가 받는 생필품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청정도론에 생필품(가사, 음식, 주거, 약)을 사용하는 바른 방법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1, 124)

“…가사 등을 받았을 때는 받은 자에게 허물이 되지 않도록 사용해야 한다. 그것들을 단지 성품들로 보거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것들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중에 사용하기 위해 남겨두어야 하며, 그것들을 사용할 때 이렇게 성찰해야 허물이 되지 않는다….”

비구들은 반드시 가사나 다른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품, 음식 혹은 약품을 단지 성품들로 보거나 혐오감의 대상으로 보아야 한다. 만일 음식을 혐오감의 대상으로 여기면 거기에 빠지지 않는다. 음식은 조건 지어진 성품으로 구성되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재가자에게도 먹을 때 알아차림 하는 유용한 지침이 된다.

“사띠빳타나 숫타”(염처경)의 주석서에 몸에 대한 알아차림(신념처) 부분에 ‘먹고 마실 때 분명한 앎을 지닌다’는 구절이 있다. 음식을 삼킬 때 음식을 수저나 국자로 떠서 뱃속으로 내려가게 하는 사람은 없으며 그 기능을 수행하는 바람 성품만 있다. 그럼 소화에 대한 부분을 보면,

“…오븐을 올려놓고 불을 지피는 사람은 없고 서서 요리를 하는 각각의 무더기만 있다. 열이 음식 덩어리를 소화시키는 과정만 있고, 막대기나 장대로 소화된 덩어리를 밀어내는 자는 없다. 단지 진동하는 과정(바람 성품인 움직임)에서 소화된 음식을 밀어낼 뿐이다.”

먹고 마시는 자아는 없으며 물성들이 다만 각기 그들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어떤 물질이 일어나든지 사대성품과 형상, 맛, 냄새, 영양소의 네 가지 파생된 물질은 반드시 일어난다. 어리석음(무명) 때문에 우리는 소유물에 집착한다. 인생이 끝날 때 더 이상 어떤 것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순간 조차도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한 순간도 머물지 않는 다양한 성품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보석 같은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것에 집착한다. 하지만 눈을 통해서는 오직 보이는 대상인 색깔과 형상만이 있고, 감촉으로 만져서는 단단함이라는 물성만이 있을 뿐이다. 궁극적인 의미로 볼 때는 만져서 지각되는 돌의 단단함이나 보석의 단단함은 별반 차이가 없다. 우리는 돌과 보석이 다른 가치를 가졌다고 알기 때문에 이러한 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개념을 생각하는 조건들을 축적시켜 왔기에 실재에 대한 이해를 계발하지 않는다. 소위 일컫는 보석이나 그것을 좋아하는 마음도 오래 지속하지 않고 즉시 사라진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재가자들도 자기 소유물을 즐기면서도 사물의 실재에 대한 이해를 계발할 수 있다.

궁극적인 의미에 있어서 삶은 오직 한 순간, 현재 순간만 존재한다. 봄의 순간에 색의 세계가, 들음의 순간에 소리의 세계가, 접촉의 순간에 감촉 대상의 세계가 경험된다. 살아있다는 것은 실제로 한 순간에 하나의 대상을 경험하는 것이다.
“분별론”에는 진리를 일깨우기 위해서 조약돌이나 자갈과 함께 보석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머리카락이나 몸의 털이나 몸의 다른 부분처럼 안의 땅 성품(견고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 다음에 외적인 땅 성품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외적인 땅 성품이란 무엇인가? 몸밖에 있는 딱딱하고 거칠고 단단한 것은 무엇이든지 굳어지고 외적이고 움켜질 수 없는 철, 구리, 주석, 납, 은, 진주, 보석, 묘안석, 조개껍질, 돌, 산호, 은, 동전, 금, 루비, 여러 가지 원석, 풀, 나무, 자갈, 질그릇조각, 흙, 바위, 산 등은….”

물질은 우리에게 즐거움이나 괴로움을 준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할 때 우리는 물질들의 노예가 된다. ‘상윳따 니까야’ (2, 인연의 모음, 14장, 사대요소의 품, 34, 괴로움의 특징에 대한 경)에 사왓띠에서 붓다가 수행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했다.

“비구들이여, 만일 이 땅 성품, 물 성품, 열 성품, 바람 성품에 전적으로 괴로움만 있고 괴로움에만 떨어지고 괴로움에만 빠져들고 즐거움에는 빠져들지 않는다면 중생들은 거기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대가 각각 괴로움이 아닌 즐겁고, 즐거움에 둘러싸여 있고 즐거움에 젖어드는 한 그들을 추구하여 갈구하는 존재들이 있기 마련이다.
비구들이여, 만일 이 땅 성품, 물 성품, 열 성품, 바람 성품에 전적으로 즐거움만 있고 즐거움에만 떨어지고 즐거움 빠져들고 괴로움에는 빠져들지 않는다면, 중생들은 그것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사대가 각각 즐거움이 아닌 괴롭고, 괴로움에 둘러싸여 있고 괴로움에 젖어드는 한 그들을 싫어하여 쫓아버리는 존재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예쁜 옷을 사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우리는 물질에 집착한다. 그러나 다치거나 아플 때는 혐오하여 멀리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대상이 즐겁거나 괴롭거나 그것은 우리 자신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조건 때문에 생겼다가 사라지는 물성들이라고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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