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백담사와 〈조선불교유신론〉

근세에 짝을 찾기 어려운
명논설 〈조선불교유신론〉
1910년 백담사서 탈고하고
3년 뒤 ‘불교서관’서 발행

승려 교육, 포교, 참선 등은
현재 불교도 ‘반면교사’ 필요
‘결혼 허용’ 주장 제고할 부분
“만해 스님 ‘유신론’을 넘어서
‘제2의 유신론’을 준비해야”


▲ 백담사 만해기념관 설경. 만해 스님은 1910년 백담사에서 명논설인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하고 3년 뒤 불교서관에서 발간했다. 사진제공= 백담사 홈페이지
강원도 인제 백담사는 ‘만해 정신의 산실’이라고 불리운다. 그도 그럴 것이 만해 스님은 백담사에서 출가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님의 침묵’이라는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작을 창작했다. 이와 함께 “문체로 보나 사상으로 보나 근세에 짝을 찾기 어려운 글(개화사상가 운양 김윤식)”이라는 평가를 받은 명논설 〈조선불교유신론〉이 지어진 곳도 백담사이다. 굳이 유학자인 김윤식이 극찬을 하지 않더라도 〈조선불교유신론〉은 한국사에서 중요한 지점에 있는 논고이다.

당시 시대상을 살펴보면 조선은 붕괴됐고, 일제 치하에 들어서게 됐다.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대한제국에게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함을 규정한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이를 공포한다. 일제는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것에 대해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한일합방(韓日合邦)이라 불렀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이날을 국가적 치욕이라는 의미에서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 같이 세상은 새로운 변화를 요구 받고 있었다.

한국 근대사에서 가징 치욕적인 해에 만해 스님은 참담함을 삭히며 〈조선불교유신론〉의 원고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만해 스님은 200자 원고지 1만 매에 달하는 〈조선불교유신론〉을 1910년 백담사에서 탈고하고 발간은 1913년 ‘불교서관’을 통해서 한다. 이 방대한 논고는 학구적인 입장에서 조선불교의 현상을 타개하려는 열렬한 실천론으로 요약될 수 있다.

〈조선불교유신론〉은 서문을 비롯해 △서론 △불교의 성질 △불교의 주의 △불교 유신은 파괴로부터 △승려의 교육 △참선 △염불당 폐지 △포교 △사원의 위치 △불가에서 숭배하는 불상과 그림 △불가의 각종의식 △승려의 인권회복은 반드시 생산으로부터 △불교의 앞날과 승려의 결혼과의 관계 △주지의 선거방법 △승려의 단체 △사원의 통할 △결론 등 총18장으로 구성된다. 매우 목차 구성만 살피어도 논거가 매우 디테일하고 파격적임을 알 수 있다.

▲ 만해 스님의 〈조선불교유신론〉표지.
박걸순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한용윤의 〈조선불교유신론〉 분석’ 제하의 논문을 통해 “만해 스님은 〈조선불교유신론〉을 통해 상호 경쟁을 통해 변화하는 세계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것을 역설했다”면서 “자유·평등사상에 입각해 인간의 자율성, 모험정신, 경쟁정신 및 자본주의적 방식의 도입까지 강조하는 등 투철한 근대시민정신을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서양 사상가들의 논리를 단편적이고 피상적으로 전달한데 그친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수용해 불교라는 특정분야에 합리적으로 적용한 것은 우리 근대사상에서 주목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는 ‘〈조선불교유신론〉과 한국 현대불교’라는 논문에서 〈조선불교유신론〉에 대해 “만해 스님의 불교개혁정신을 대표하는 저술일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 불서를 대표하는 기념비적 저술”이라며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제기한 파격적인 불교의 개혁 및 유신의 내용은 근대불교의 각 분야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지만, 기존 불교의 관행과 질서를 강력히 비판했기에 당시에도 찬반양론이 팽팽했다”고 평가했다.

이 같은 찬반양론의 쟁점은 승려 결혼 허용과 관련된 논고다. 일반적으로 일제 시대의 불교는 승려의 결혼으로 인한 모순이 단순히 계율 파괴 이외에도 사찰 재산 망실, 행정직 장악을 둘러싼 갈등, 총독부와의 유착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만해 스님은 식민지 불교정책의 비판과 자주 불교 지향, 불교 개혁을 강조하면서도 승려 결혼에 대한 모순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근현대불교학자 故 서경수(1925-1986) 박사는 “극히 외형적 피상적으로만 승단의 병폐를 지적했으며, 불교 교리·사상의 근대적 해석이나 주석의 필요성을 강조하지 않았다”면서 “급진적 개혁에 조급해 종교 교단의 근본 원칙이 되는 계율의 해석과 개혁을 소홀히 다뤄졌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김광식 교수는 이 같은 만해 스님의 주장 배경에 대해 근대를 바라보는 인식에서 기인된 것으로 봤다.
김 교수는 ‘한용운의 불교 근대화 기획과 승려 결혼 자유론’이라는 논문에서 “대중불교론을 주창한 만해 스님은 중생을 구제하는 실천을 중요하게 여겼지 승려가 결혼이라는 테두리에 얽매이는 것은 신경쓰지 않았다”면서 “만해 스님은 진화론적 세계관에 입각해 승려 인권론을 제기했는데 여기에는 인간의 기본 욕망에 대한 관대성도 내포돼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찬반논란이 있음에도 만해 스님의 〈조선불교유신론〉 몇몇 부분은 현재에도 유효한 의제다. 앞서 비판적 논거를 제시했던 서경수 박사는 〈유신론〉의 긍정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기술했다. 조선불교의 전반에 걸쳐 다각적인 관찰과 비판을 가했으며 정말 불교의 장래를 누구보다도 아끼는 종교적 열정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서 박사는 “당시 정세와 불교 내부의 완고한 보수성 때문에 불발탄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1910년대에는 가장 선구적이고 혁명적인 논문”이라면서 “한국불교가 낡은 껍질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한용운의 ‘유신론’은 가장 무섭고 날카로운 비판과 개혁의 화살로 한국 불교 승단을 노리고 있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 백담사의 만해 스님 흉상.
실제 승려의 교육과 참선, 포교에 대한 비판과 실천적 의제는 지금도 귀기울여 봐야 할 대목이다. 만해 스님은 조선불교의 승단이 교육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고 봤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보통학 △사범학 △외국유학 등 세가지 방안을 주장한다. 향후 도래할 사회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승려도 보통 사람 수준의 최소한의 학식을 가지고, 인문·자연계열의 지식을 습득하며, 필요하다면 외국 유학도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 만해 스님은 “낡고 부패한 늙은 무리들이 젊은이들의 신교육을 백방으로 방해하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라며 “교육을 저해하는 자는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고 교육을 권장하는 자는 마땅히 선도할 것”이라고 격렬한 어조로 꾸짖기도 했다.

당시 참선 수행의 풍토에 대해서도 만해 스님은 1/10만 진짜 수좌고 나머지는 배부리기 위해 우두커니 앉아 있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선지도 모르는 자들이 우두커니 앉아서 옛 조사의 어록 몇 마디를 수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만해 스님은 모든 조선의 선원을 합쳐서 규모있고 거대한 선학관(禪學官)을 한 두 개정도 건립하고 훌륭한 선지식 몇 분을 스승으로 모셔 참선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승속을 구분하지 말고 받아들여 일정한 시간에 정진토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포교에 대한 중요성에 대한 만해 스님의 ‘일갈’은 지금 한국불교의 사부대중이 반면교사할만 하다. 스님은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조선불교의 쇠퇴 원인을 포교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고 당시 선교에 열중인 기독교의 예를 들면서 불교계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또한 산중 사찰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사찰이 산 속에 있다보니 승려 교육부터 포교, 통신 등 여러모로 이익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조선 불교는 불교의 구세적·포교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 대도시로 나와야 한다는 게 만해 스님의 주장이다.

‘유신(維新)’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한다’는 것이다. 만해 스님은 “유신이란 무엇인가, 파괴의 자손이요. 파괴란 무엇인가, 유신의 어머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참담한 시대를 뒤로 하고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한 것은 불교를 통해 시대를 바로 세우고자 했던 만해 스님의 원력에 기인했던 것이다. 우리가 지금도 발간 100년이 지난 〈조선불교유신론〉을 곱씹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현재의 한국불교는 시대에 맞는 새로운 〈유신론〉을 준비해야 한다. 그것이 시대를 살아가려는 불자들이 해야 할 소명이다.

“〈조선불교유신론〉의 정신은 재평가되고, 제2의 〈유신론〉이 나와야 한다.(중략) 만해 스님과 같은 투철한 민족지사도 필요하지만 불교의 각 분야에서 자기가 맡은 일에 사명감을 갖고 불교의 발전을 위해 묵묵히 일하는 숨은 일꾼이 필요하다고 본다. 〈유신론〉이 풍기는 처절한 비판 정신이 상실돼 가고, 불교의 언론과 공론이 자기 자리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이때에 만해 스님의 정신은 아직도 살아 있는 이정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김광식, ‘〈조선불교유신론〉과 한국 현대불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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