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스님 열반 70주년 ‘만해의 길을 가다’- ② 출가·오도처 백담사와 오세암

18세부터 전국 유랑하다가
1905년 백담사서 공식 출가
1917년 오세암서 ‘大悟覺醒’

禪·敎에 밝아… 대중불교 지향
“어느 곳에서도 참선할 수 있다”
깨달은 후엔 생활선 운동 강조

▲ 백담사 만해기념관 전경. 백담사는 만해 스님의 출가 사찰로 이곳에서 많은 저서와 문학작품을 저술했으며, 수행자로서 정진한 곳이다.
1890년대 조선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울한 상황이었다. 1895년에는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동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한 나라의 왕비를 시해하고도 관련자 48명은 본국으로 소환돼 무죄방면됐다. 결국 을미사변은 항일의병활동의 원인과 아관파천(俄館播遷)의 계기가 됐으며, 한국은 러시아의 보호국과 같은 지위로 떨어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 유천(만해 스님 아명)은 길을 잃고 있었다. 왕후의 시해 사건으로 전국에서는 의병운동이 들불처럼 번졌고, 본인도 홍주 의병에 참가하기도 했다. 국제적으로는 청일 전쟁이 발발했고, 나라가 망한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더 이상 유천이 어릴 때부터 배워온 한학(漢學)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남달리 모험심과 개혁의지가 강한 유천은 가만히 앉아서 바라볼 수 없었다. 결국 그런 소문이 흘러나오는 한양을 향해 유천은 발걸음을 옮겼다. 무작정 집을 나와 한양으로 가던 중 오랜 노독과 굶주림에 지쳐 수원 어느 주막에 들어 하룻밤을 보냈다. 주막에서 주린 배를 채우고 누워 유천은 곰곰이 생각했다.

“빈손에 한학의 소양밖에 없는 내가 무슨 힘으로 나라 일을 도우며 큰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한양에만 가면 모든 일이 해결되는가.”

유천의 고민은 곧 인생의 일대사를 해결하기 위한 화두로 바뀌었고, 서울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 속리산 법주사로 향했다. 그곳에서 설악산에 도인이 있다는 말을 듣고 백담사로 향하게 된다.

만해 스님의 출가 시기에 대해서는 19세와 27세 등으로 나뉜다. 이중 기록상 확인되는 정확한 출가 시기는 백담사에서 연곡 스님을 만나면서부터다. 이를 차제하더라도 유천이 출가하는 데에는 일대사를 해결하기 위한 끊임없는 물음이 작용했고, 이는 10대 때부터 이뤄진 것은 분명하다. 실제 만해 스님이 1930년 〈삼천리〉에 기고한 ‘나는 왜 중이 되었나’를 보면 이 부분을 잘 알 수 있다.

영영일야(營營日夜)하다가 죽으면 인생의 무엇이 남나. 명예냐, 부귀냐? 그것이 모두 아쉬운 것으로 생명이 끊어짐과 동시에 모두가 일체 공(空)이 되지 않느냐. 무색하고 무형한 것이 아니냐. 무엇 때문에 내가 글을 읽고 무엇 때문에 의식(衣食)을 입자고 이 애를 쓰는가 하는 생각으로 오륙일 밥을 아니먹고 고로(苦勞)하던 일이 있었다. 이에 나는 나의 전정(前程)을 위해 실력을 양성하겠다는 것과 또 인생 그것에 대한 무엇을 해결해 보겠다는 불 같은 마음으로 한양 가던 길을 구부리어 사찰을 찾아 속리사로 갔다가 다시 더 깊은 심산유곡의 대찰을 찾아간다고 강원도 오대산의 월정사까지 가서 그곳 동냥중, 즉 탁발승이 되어 불도를 닦기 시작했다.

▲ 1997년 백담사 만해기념관 개관식 모습.
도인을 찾아 심산유곡의 산사를 찾아 유천이 당도한 곳은 설악산 백담사였다. 백담사에서 자리를 잡은 유천은 탁발승으로 수행 생활을 시작했다. 1905년 1월 26일 만해 스님은 당시 백담사 주지 연곡 스님을 은사로 출가를 했으며, 전영제 스님에게 수계를 받았다. 법명은 용운(龍雲)이었고, 법호는 만해(萬海)였다. 이후 만해 스님은 백담사 이한암 스님에게 〈기신론〉 〈능엄경〉 〈원각경〉 등의 경전을 배웠다.

불법의 진리에 흠뻑 빠져든 스님은 1907년 강원도 건봉사에서 첫 수선안거를 마쳤으며, 계획한 세계 여행이 실패한 이후에는 안변 석왕사 등을 전전하며 수행을 하다 이듬해에는 유점사에서 서월화 스님에게서 〈화엄경〉을 수학한다.

만해 스님은 선·교에 모두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식적으로 출가한지 꼭 4년만 인 1909년 7월에 강원도 표훈사 불교 강사로 재직하면 후학들을 가르쳤으며, 1913년에는 대찰(大刹)이었던 양산 통도사의 강사에 취임했다. 교학자로서의 능력이 뛰어났다는 것은 ‘불교강구회(佛敎講究會)’ 회장을 36세에 역임하고 〈불교대전〉을 편찬한 부분에서 잘 알 수 있다.

수좌로서도 만해 스님은 꾸준한 정진을 놓지 않았다. 건봉사에서 첫 수선안거 이후 스님은 지속적인 참선 수행을 해왔으며, 10년이 되던 1917년 12월 3일 밤10시 경 오세암에서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한 순간에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후 스님은 이 같은 오도송을 남긴다.

‘男兒到處是故鄕(사나이 가는 곳마다 바로 고향인 것을)/幾人長在客愁中(몇 사람이나 나그네 시름 속에 오래 젖어 있었나)/ 一聲喝破三千界(한 소리 크게 질러 삼천세계 깨뜨리니)/ 雪裡桃花片片紅(눈 속에도 복사꽃이 펄펄 날린다)’

견성한 이듬해인 1918년 만해 스님은 서울로 올라와 월간지 〈유심(唯心)〉을 창간해 발행인 겸 편집인이 된다. 문학인으로서 창작 열정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그럼에도 만해 스님은 선 수행을 계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6년 〈삼천리〉의 기획기사인 ‘당대처사방문’의 만해 스님의 인터뷰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이 시기 스님은 사찰에서 나와 심우장에 기거하면서 비승비속의 삶을 살 때이다.

‘불당(佛堂)같은 심우장에 칩거하는 것은 답답하지 않냐’는 기자의 질문에 만해 스님은 “틈만 있으면 정좌하고 속념(俗念)에 물러나 참선하는 것이 매일 중요한 일과”라면서 “조용하고 틈이 있으면 언제든지 몇 십 분이고 몇 시간이고 하게 된다. 그러나 아침 일찍 세수한 다음 저녁밥이 지난 뒤 잠자리에 들어가기 전에는 매일같이 참선한다”고 답했다.

▲ 만해 스님의 오도처인 오세암 전경.
그렇다면 만해 스님은 불교의 수행법인 참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이는 스님이 만년에 기술한 ‘조선불교의 개혁안’이나 ‘선과 인생’ 등의 저술들을 통해 스님의 참선관을 엿볼 수 있다.

불교의 대상은 물론 일체 중생이다. 이것이 불교의 이상이므로 불교는 일체 중생의 불교요, 산간에 있는 사찰의 불교가 아니며, 계행을 지키고 선정을 닦는 승려만의 불교가 아니다.〈중략〉 ‘산문에서 가두로’, ‘승려로서 대중에’가 현금 조선불교의 ‘슬로건’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중략〉 따라서 (참선은)누구든지 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필요한 일이다. 선은 전인격의 범주가 되는 최고의 취미요 지상의 예술이다. 선은 마음을 닦는 즉 정신수양의 대명사이다.
〈증보 한용운 전집2(1979, 신구문화사)에서 발췌〉

이를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만해 스님은 ‘대중불교’와 ‘생활 속의 참선’을 강조한 것이다.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는 ‘한용운의 대중불교·생활선과 구제주의·입니입수’라는 제하의 논문을 통해 이 같은 주장을 피력했다.

김 교수는 “산중 불교가 아니라 도회지로 나와야 하는 불교, 전 중생 및 대중을 위주로 하는 불교가 돼야 한다는 게 만해 스님의 지론”이라며 “이런 입론에서 스님은 선 수행을 하고 깨달은 이후에는 당연히 구세주의로 나서야 함을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선의 관점에서 본 그의 삶은 대중불교, 입니입수하는 구제주의의 실천의 다름이 아니었다”면서 “이는 그가 지적한 깨달음 이후에는 반드시 대중불교로 나가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의 현실을 여의지 않고, 번뇌 중에 보리를 얻고 그를 실천해야 한다는 대중불교의 실천행이었다”고 강조했다.

공식적인 출가지인 설악산 백담사와 오도처인 오세암은 만해 스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이곳에서 불교를 접하고 수계를 받았으며,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수행을 통해 혼란한 세상으로 나아가 맞설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지금도 백담사를 찾으면 스님의 흉상과 시비, 기념관을 통해 만해 스님의 사상과 문학을 접할 수 있다.

개혁가이면서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시인, 민족독립운동가 등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만해 스님의 가장 깊은 심상에는 ‘불법(佛法)’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해 스님이 제시한 ‘대중불교’와 ‘생활 속의 참선’이라는 두 가지 화두는 지금도 유의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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