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을 하게 되면 그만큼 자기 차원이 줄어들게 됩니다

 

▲ 그림 최주현

주인공에다 모든 걸 놓고 하라, 잘하는 것도 못하는 것도.
구정물 들어오는 것도 맑은 물 들어오는 것도 탓하지 말고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그 물로 바꿔 써라.


천도는 마음으로 마음을 녹이는 거라는데
문) 이제 새해를 맞이하면서 촛불재로 한 해를 시작하게 되는데요, 제가 어느 스님께 절에서 천도재를 모실 때 스님들께서 영가를 보시느냐고 여쭈었더니 조상 영을 보시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마음을 녹여 주시는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천도하는 조상의 모습을 못 보면서 어떻게 재사를 모시는지 궁금합니다.

답) 옛날에 이런 점이 있었죠. 어느 분이 재사를 지내러 왔는데, 처음 오시는 분인데 그 난리 때 어떻게 돌아가셨대요, 부모님이. 그랬는데 내가 왜 부모를 담요에다 이렇게 싸서 그냥 아무렇게나 그냥 묻었느냐 이랬어요. 그랬더니 깜짝 놀라면서 그때 난리 때에 그 담요을 깔고 돌아가셔서 담요 깐 채 그냥 말아서 치웠다는 거예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그런데 “그게 잘못 됐습니까?” 하고 물어요. 지금 우리가 하고 다니는 모습이나 죽어서 그렇게 해 가지고 있는 모습이나 보는 사람이라면 좋지 않지 않겠느냐. 그리고 참 공경이라기보다, 은혜라기보다 그건 떠나서라도 좀 잘 해서 묻었으면 좋지 않겠느냐 이렇게 얘기했더니만 “그렇겠습니다.” 그러고선 인제 말이 없었어요.

고다음에 어느 친척 분이라고 그러면서 이렇게 또 재사를 지내러 왔는데, 법당에 이 조상이 올라가시는데 말이에요, 발뒤꿈치에 이만한 솜 한 덩어리가 달려서 올라가요. 그래서 그것을 자세히 봤어요, 솜 한 덩어리를. 그래서 자세히 보고는 다 지내고 난 뒤에 인제 그랬어요. 왜 조상님 발뒤꿈치의 솜은 떼지도 않고 염을 했느냐 이렇게 물었어요. 그러니까 “발뒤꿈치에 부스럼이 나서 아주 저거 해서 떼지 못하고는 그냥 뒀습니다.” 이러는 거예요. 근데 떼지를 못했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렇게 소독약으로 저거 해 가지고 딱 뭘로 붙여 놓지, 어떻게 그렇게 흉하게 그렇게 했느냐 이러고 했더니만 너무도 기가 막혀 해요. “그거를 떼지 못했습니다.” 그러는 거예요. 그래 내가 그것을 보고서 그것을 봤다고 하는 게 옳겠습니까, 봤어도 보지 않은 것처럼 하고 그냥 떼 버리는 게 좋겠습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지금 그런 분들이 더러 많죠. 6대조 할아버지라든가 5대조 할아버지라든가 증조할아버지라든가 그 할아버지가 할 일을 못해서 태어날 때 그 집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수가 있죠. 그 집으로 다시 태어날 때 그 모습을 아주 닮아서 그냥 나오신다고 그래요. 그러나 그 양면의 모습을 찾는 게 아니라 그 마음을, 그 인연이 된 마음을 찾는 겁니다. 그래서 지낼 때에 ‘그 본다 하더라도 봤다고 하지 마라.’ 한 뜻이 그런 연고로 그런 말을 하지 마라 했던 거고 또 그런 말을 묻걸랑은 “‘마음으로 연결이 돼서 조상님들 다 봤습니다.’ 이렇게 하거라.” 이런 얘기를 한 예가 있습니다.


어느 땐가 인제 여기 스님네들이 안 들어왔을 때 그전 얘깁니다만, 이거 잘 들으셔야 합니다. 조상님이 돌아가 총에 맞아 죽었나 봐요. 알지도 못하는 조상인데 총에 맞아서 피를 줄줄줄 흘리고 이 옷이 뭐 아주 말도 못해요. 줄줄 흘리고 그냥 들어와요. 그런 거 만약에 이 중이 모자란다면 그런 걸 보고 그냥 깨끗이 해 드릴 수 없다면 문제가 크죠. 그런 걸 깨끗이 입혀 드리고 그런 걸 다 닦아 드리고 목욕시켜 드리고 이렇게 해서 올리는 거는 이 중들의 책임이란 말입니다. 모르는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 이 중들의 책임인 것이 뭐냐 하면 ‘함이 없이 하라. 응신이 된다 하더라도 응신으로서 함이 없이 하라.’ 이게 보살행입니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 그분의 조상님, 저 천도시킨 그분의 꿈에 “참 고맙다. 나는 이렇게 잘 입고 목욕하고 이렇게 인제는 아주 세단차를 타고 간다. 참 고맙다. 잘 살거라.” 하고 가더랍니다.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그게 총에 맞으셔서 그랬는데 어느 때에 그랬느냐 하니깐 6·25 초기에 그랬답니다. 묶여서 그냥 그렇게 죽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그거를 씻어 낼 수 없다면, 이 지금 마음공부 하는 분들이 왜 그 공부를 해야 하느냐. 그거를 씻어 낼 수 없다면 이 생시에 그냥 곤욕을 받는 겁니다. 이 보이지 않는 데서 구정물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괜찮은데, 보이지 않는 데서 구정물이 들어와서 진탕 만탕이 된다면 그 고통을 산 사람들이 그냥 받습니다. 그 백지장 하나 사인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관하시라. 놓으라. 아주 믿고 놓으시라. 입력이 돼서 그러니까 그 입력을 없애야만 되니까 그냥 의심하지 말고 놓으시라.” 이렇게 말합니다. 의심을 하고 또 의심 안 하고 했다가 또 의심을 하고 또 의심…. 그러면 줬다 뺐었다 줬다 뺐었다 이게 그냥 망가지죠.

어떤 분은 그 임신을 해서도 아주 어려운 집이죠. “스님, 병원에 가니까 기형아라 그러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기형아가 무슨 기형아야? 기형아 아니야.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자꾸 관해.” 그랬어요. 그 말은 그렇게 아주 간단하고 쉽죠. 근데 그 일을 하는 데도 간단합니다. 간단한데도 그게 그만큼 그 일을 할 수 있게끔 자기를 만든 그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 일을 간단하게 할 수 있게끔 한 자기가 얼마나 고생이 됐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생각을 하니까 고생이 아니에요. 어떻게 내가 그런 공부를 하게 됐고, 어떻게 해서 그런 걸 알게 됐으며, 어떻게 해서 만법이 이렇게 찰나찰나 이렇게 들이고 낼 수 있었을까. 이런 걸 전부 알았을까. 이 한 지구 안에서도 세계적으로 어느 나라 어느 나라, 이렇게 많은 나라가 있지만 말입니다, 그런 거를 그 나라에서 그래도 누가 아는 사람이 있어야만 이게 개선돼 나가죠. 그래서 생김생김이가 그 유달리 참 보기 흉하게 생긴 분들도 저 외국에 보면은 많이 있습디다. 그런 걸 볼 때 참 우리는 인간으로서 그래도 세 번 탄생을 했다가 또 이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그래도 고르게 태어나는구나 하고 감사하게 생각하죠.


그러니까 그것을 막상 그렇게 본다 하더라도 그때에 왜 그것을 떼 주지 않았느냐, 왜 또 그렇게 저 담요에다 말아서 그냥 그렇게 했느냐, 그리고 왜 그 방바닥에 그냥 그 담요가 타서 죽게 만들었느냐, 언제 돌아가셨기에 피를 그렇게 흘리고 총에 맞았느냐. 이게 물은 것이 그 후의 생각에 ‘아이고, 그걸 차라리 내가 안 물었더라면….’ 이런 후회감이 들더군요. 아는 분에게 그렇게 했으면 상관이 없을 텐데 모르는 분한테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 좀 문제가 야릇하게 아는 사람으로 고립되게끔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아예 알면서도 함이 없이 해라, 앎이 없이 해라 이런 말입니다.


우리가 할아버지나 할머니나 함께 살던 분들은 그냥 조상들의 상호를 알 수 있으나 위 조상들은 모르죠. 그러나 이런 말이 있죠. ‘보는 것도, 또 어디서 온 것도, 남의 마음도, 가고 옴도, 듣는 것도 모든 거를 거기다가 개입시키지 말고 그냥 놓고 응신으로서 응용하라. 보는 거를 본다 하지 마라. 그건 도가 아니니라.’ 이랬거든요. 그래서 제가 응용할 때 이거는 항상 여러 스님네들한테 그렇게 말합니다. “봐도 본 사이 없이 봐라. 해도 하는 사이 없이 하라. 가고 옴이 있더라도 가고 온다 말하지 말고 걸림 없어라.” 이런 말을 합니다. 이런 말을 왜 하느냐 하면 이 모르는 분들은, 아는 분은 그러지 않겠지만 모르는 분들은 그 말에 꼭지를 뭅니다. 그래서 잘못 빗나가기가 아주 쉽기 때문입니다.

걸림 없이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문) 마음공부를 하고 있는데도 내 마음은 아직도 걸리는 게 많습니다. 걸림 없이 자유롭게 살고 싶은데 한 말씀 일러 주십시오
.
답) 우리가 내 한 몸뚱이 나를 지팡이에다 걸고 돌아갈 때에 얼마나 힘겨운 그 고통이 오는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서 우리가 일생에 한 철 나고 가는 것뿐만 아니라 이게 세세생생에 자꾸 나고 들고 쳇바퀴 돌듯이 이렇게 괴로우니까 우리 한 생에서 그냥 벗어나게 합시다.
그러면은 내 몸과 가정, 또는 가정에서 사회, 사회에서 이 세계, 세계에서 우주, 우주에서 전 삼천대천세계로 우리는 전부 둘이 아님을 알게 되고 직결돼 있음을 알게 되고, 전부 가설이 돼서 돌아감을 알게 돼 있으니까 우리가 자유스럽게 그렇게 살 수 있게끔 돼야 됩니다. 우리 몸과 가정을 이렇게 타파하고 돌아가는 것만 해도 어딥니까. 그런데 정말 어떠한 뭐, 말로는 형용할 수 없습니다.


내가 그런 소리를 잘하죠. 비가 와도, 비가 안 와야만이 모든 식구가 살겠다 이럴 때 비를 막을 수도 있는 겁니다. 또는 핼리 혜성이나 어떠한 유성이나 그 모든 것이 질서를 지키지 않고 돌아가는 것도 질서를 지키게 할 수도 있고요. 달마 대사가 구렁이를 갖다 끌어다가 물에 집어넣고 딴 길로 가게 하고서 그 구렁이의 무명을 벗기고 또한 사람이 다니는 길에 그렇게 걸리지 않게끔 해 주고, 이런 거와 같이 여러분이 그냥 그렇게 걸리지 않게끔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여러분의 실생활입니다. 실생활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민족이 얼마나 기가 막힌 민족입니까. 남의 나라에 끌려서 이리저리,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이 발길 저 발길에 채이고 얼마나 그랬습니까. 여러분은 상상할 수 없을 겁니다, 아마. 나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는 있지만 말입니다. 정신대다 뭐다 하고 끌고 간다고 하고, 그때 한창 그랬으니까요, 우리 때는요. 토마토 하나를 얻어먹기 위해서 어떻게 저거 하면 그저 발길로 차서 밟아 버리고 이런 시대니까요.

여러분은 아주 복이 많아요. 그러니까 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내 몸과 내 가정, 내 사회, 내 국가 이것만이라도 자유스럽게 할 수 있다면 세계를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세계만 잡습니까? 우주도 잡죠. 과학자들은 무슨 태양이다, 은하계다, 또는 지구가 어떻게 날로 잘못돼 가고 또는 태양계도 축소가 되고, 또는 뭐 타 버리고 이런다는 말들도 많이 하죠. 하지만 그런 것도 우리 마음에 달렸습니다. 절대적입니다, 그건. 뭐 종말이 온다, 어떤 종교에선 또 그러고 야단들을 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모두가, 올려놓는 것도 우리 마음이요, 내려놓는 것도 우리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자유자재,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는 그런 기반의 틀을 기르기 위해서 열심히 하세요. 그래서 심력을 기르고 체험을 하고 실험을 통하고, 이래서 주위에 있는 사람까지도 좀 편하게 살 수 있게끔 해 주세요.

왜냐하면 주위에 가만히 보면요,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고달픈지, 병원에 가면 병원 문이 그냥 미어져요. 이 가정 가정, 한 가정 한 가정에서 이런 것만이라도 타파해 나갈 수 있고, 그 배신하는 거 사랑으로 엮어 줄 수 있는 그런 그 타파가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니까 열심히 하셔야죠.
그리고 여러분의 눈이 내 한 눈이요, 여러분의 귀가 내 한 귀요, 내 몸이요, 내 자리인 것입니다. 삼천 년 전의 부처님 자리가 바로 여러분의 자리일 것입니다. 그러니 그저, 내가 미약하고, 내가 업이 많고, 내가 죄가 있고, 나는 모른다, 이러한 약한 마음을 갖지 말고, 그냥 깡단 있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것이 바로 믿을 만하다. 허공을 믿을 수도 없고, 이름을 믿을 수도 없고, 형상을 믿을 수도 없고, 중의 고깃덩어릴 믿을 수도 없다. 난, 이분이 이렇게 마음의 도리를 얘기해 주셨으니까 그대로 내 마음이 나를 끌고 가는 대로 난 내 주인공! 내 주인공, 개별적인 내 주인공이 아니라 스님, 일체 제불, 일체 중생들이 다 합한 한마음의 그 주인공, 이것만이 난 믿을 게 있다.’ 하고 나가세요.

견성 못해도 함 없는 행을 할 수 있는지
문) 우리가 견성하지는 못하였더라도 그 주인공에 대한 간절한 믿음이 있다면 함이 없는 행을 할 수 있는 것인지요.

답) 그렇죠. 우리 생활이 도예요, 생활이. 딴 데 도가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를 버리고 도가 있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우릴 버리고 부처가 있는 게 아니고요. 그러니까 부처도 우리와 둘이 아니고, 도라는 이름도 우리와 둘이 아니고 그냥 평전한 생활에 다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깐 우리가 도를 깨쳤다 깨치지 못했다 이거를 뛰어넘으세요. 이거를 버리고 뛰어넘으세요. 버리라니깐 아예 그냥 저 개천에다 꼬라박지 마시고 자기 원소에다가, 자기 주인공에다가 그냥 놔 버리세요, 그냥. 그렇게 하는 게 도예요. 별다르게 해야만 되는 게 아니에요.

남 원망 안 하고 실질적으로 남을 괴롭히지 않고, 예를 들어서 여러 말 할 거 없이 내 몸과 같이 생각하고 내 아픔같이 생각하고, 그저 그렇게 하시면서 남을 원망하지 않고 존경하고, 이렇게 그냥 알든지 모르든지 존경하시란 말입니다. 나쁘든지 좋든지 존경하란 말입니다. 무슨 좋은 사람만 존경하고 나쁜 사람은 존경하지 마라 이게 아닙니다. 뭐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생명이 있다 하면은 존경하란 얘깁니다. 존경하게 되면 사람이 아닌 사람은 사람으로 화할 테고, 또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좋은 사람으로 화할 테고 찰나찰나 바꿔지니까요. 그걸 한번 응용해 보시면은, 이게 사람 마음이 모습은 그냥 놔두고도 마음이 뭐 한 찰나에 다른 혹성에도 갈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연관을 한번 지어서 잘해 보세요. 진짜로 믿고. 그러면 자기 주인공이 때로는 보디가드가 되고 때로는 지장이 되고 때로는 칠성이 되고, 때로는 허공신이 되고 때로는 용신이 되고, 그냥 당신이 필요한 대로 돌아가서 화하니까요. 이 소리 잘 알아들으셔야 됩니다.

여러분이 이 소리를 잘 들어서 행하신다면 도인 아닌 도인으로, 알지 못하지만 행은 도인의 행으로서 살게 된다면 그냥 도인이 되는 거죠, 뭐. 머리 안 깎았다고 도인이 아닌 게 아니에요. 그러니깐 이 머리 깎는 것은 우리가 입산할 때에 머리 깎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인간이 태어나서 그저 덧없이 그냥 이렇게 자라는 풀들, 이거 깎아 버리고 원 하나만 남기려고 이렇게 머리 깎는 겁니다. 그런데 머리를 깎고 나면은 뭘 합니까. 깎고 나면은 또 자랍니다. 그 뜻을 알아야 돼요. 이 깎고 나면은 또 자란다. 또 자라면 마찬가지가 되는데 또 자라도 나지 않는, 머리도 나지 않고도 남이 있다면, 그래서 함이 없이 하고, 또 머리 깎지 않으면서도 깎고, 깎으면서도 깎지 않았다. 이런 문제들이 다 나오기 때문에 예전에 선사들이 이 산에서 수염 깎으려야 깎을 수도 별로 없고 머리 깎으려야 별로 깎을 수도 없고, 형편이. 형편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기른 겁니다, 멋으로 기른 게 아니라.

그러니깐 여러분이 그 하나하나를 이해를 할 수 있고 남을 욕을 하지 않을 수 있어야 됩니다. 남을 욕을 하는 것은 그 이해를 못해서 욕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욕을 하게 되면은 그만큼 자기 차원이 줄어드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잘하면은 공신이다. 부처님이 만 개라도 일불이다. 이렇게 되죠. 그러니깐 어떠한 신이든지 그저 부처님과 둘이 아니다 이렇게 하시고요. 그럼 열심히 해 보시기 바랍니다.
꽃이 이렇게 핀 거 보면은 좋죠? 보기 좋죠? 이 우담바라 꽃이라고 하는, 이 연꽃이라고 하는 이 이름을 왜 그렇게 뒀느냐? 너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도 그렇게 그 못지않게 아름다우니깐 바깥으로 내서 방편으로 말씀하신 겁니다. 꽃입니다, 그게. 마음의 꽃. 그래서 우리가 행을 잘 하시면은 이 꽃이 날아다니면서, 허공을 날아다니면서 행하신다고 그랬습니다. 그 꽃이 뭡니까. 그냥 보살의 마음이요, 부처님의 마음이 허공으로 다니면서 찰나찰나 행하신다. 함이 없이 하신다 이겁니다.

집안 식구들이 모이면 다투기만 해요
문) 제사나 명절 때 집안 식구들이 모이면 서로 웃음이 나고 화목하면 좋겠는데 아버지 형제들이 만나기만 하면 서로 다투니 정말 재미가 없습니다. 한식구끼리 화목하게 지내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답) 만날 이런 소리를 많이 하지만 한식구라도 서로 화목하지 못하고 원망을 하죠. 모두 네 탓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고 내 탓은 하나도 없고요. 상대방의 탓으로만 돌아갈 때가 많죠. 근데 따지고 보면 각자 자기가 있기 때문에 그 모두가 있다는 거를 아셔야 남의 탓이 하나도 없게 되죠. 잘했든 못했든 말입니다.
찰나찰나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그거를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삶이 있이 사는 겁니까? 삶이 없이 사는 겁니다. 함이 없이 살고요. 그러니깐 모두가 공했다고 했죠. 그거 한번 잘 생각해 보실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은 여러분이 내가 이렇게 고통을 받고 또 이렇게 살고 이렇다는 게 하나도 없어질 겁니다. 왜냐하면 뻔히 알기 때문에 함이 없어요. 주인공에다 모든 거를 맡겨 놓고 사시라 이렇게 말했던 것도 여러분이 이거 해야겠다 저거 해야겠다, 이거를 원망하고 저걸 원망하고, 이거를 생각하고 저거 생각하느라고 사는 재미가 없이 살아요. 사람이 어디 사는 겁니까, 그게? 그러니까 생각은 안 하더라도 저 건너에 산이 보이면은 내 정원으로 생각되고 내가 웃고 거길 갈 수 있고 그래야 되겠죠.

이런 소리 하면 좀 이상스럽게 생각이 되겠지만 어떤 선지식이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하려니깐 다리가 몹시 아프더랍니다. 그래서 거기다 다릴 떼어 놓고 자기는 산으로 올라갔답니다. 올라갔더니 얼마 있다가 깨어나시라고 자꾸 이렇게 건드리더랍니다. 그래서 시간이 됐나 보다 그러고 얼른 와서 자기 몸에 다시 들어가서 보니깐 다 됐더랍니다. 그래서 그 아픈 걸 면했답니다.

그냥 하는 말로 하는 게 아닙니다. 그거 경험을 해 보지 않고는 이런 소리 못합니다. 이런 거를 어떻게 말로 새록새록이 다 하리까. 사람 사는 데 이런 게 있다고, 이렇게 삶이 있다고 이렇게 단정지어서 몇 마디로 할 수가 없죠. 한마디도 할 수가 없죠. 귀정지어 놓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닿다가도 생기는 일이기 때문에 그냥 가다가 뗏목이 이렇게 걸쳐 있으면 그냥 한다 안 한다도 없이 그거 치우고 갈 겁니다.
그래 부처님의, 즉 말하자면 마음 법은 보살의 응신이 대신하고 있죠. 그런데 보살의 응신으로서의 하는 법은 이렇다 저렇다, 이건 아주 큰 법에서 결정을 하는 거고, 여러분이 통신을 해서 이렇게 결정을 짓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림하면서 결정짓는 건 결정짓지 않고 그냥 함이 없이 하시는 것이 제일입니다. 그래 주인공에다 모든 걸 놓고 하시라. 잘하는 것도 못하는 것도. 구정물 들어오는 것도 맑은 물 들어오는 것도 탓하지 마시고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그 물로 바꿔 쓰시라고 말씀드리죠.
이것을 어떻게 자세히 말을 해야만 알기가 쉽겠습니까. 아무리 펄펄 끓는 물을 갖다가 놓고 여러분한테 얘길 해도 말이니까 그게 단정지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게 몇 도나 되는지 얼마나 찬지 뜨거운지 그걸 모르는 겁니다. 여러분이 맛을 봐야 그것이 얼마나 뜨거운지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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