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가짐새 맑히고

말은 자비를 갖춰서

삼업 맑히면 청정해져

정신 작용 맑혀 나가야

 

2.정삼업진언(淨三業眞言)

‘정삼업’은 삼업을 맑힌다는 것.

옴, 사바빠바, 슈따살빠 딸마, 사바빠바 슈또함.

삼업(三業)이란 신(身), 구(口), 의(意)의 세 가지다. 즉, 우리의 몸과 입과 뜻을 밝혀주는 참된 말이라는 것이다. 진언(眞言)은 인도말로 다라니라고 한다. 참된 말, 진정한 말, 진정코 그렇다 하는 말이다.

우리가 가설해서 하는 가언이란 우리 한국어, 영어, 인도어, 중국어, 일어, 산스크리트어 따위, 이른바 민족어는 그 민족 그 사회가 오랜 역사를 거쳐 은연중 가계약(假契約)으로 이루어 놓은 통용어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언에 대해서 진언이란 참말이오 한 인간의 참된 소리이기 때문에 구태어 상대자를 설정하지 않고 누구에게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자연에게 스스로의 감동을 표출한 것이며 그 소리가 자연스레 한 운율이나 음율을 띄고 있다. 가령 지금을 겨울밤이라고 하자. 우리가 밤새 자는 동안 눈이 수북이 내렸다.

지리산 상상봉에도, 우리들이 있는 이 봉명산 다솔사에도, 이 도량에도 눈이 왔다. 아침에 방문을 열고 내다보며 한 사람이 부지중 ‘아이 눈 봐! 깨끗도 하지’ 한다. 그럴 때 이 말이 진언이다. 누구에게 들으라고 그러한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자연에게 천지(天地)에게 대하여 불쑥 느낀 바 감동을 그대로 읊어서 한 말이며 그러기에 진언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불교에서는 그 유니트가 자기 자신에게 있다. 모든 경전을 공부하거나 어떤 일을 하거나 간에 그 가운데 목적하는 바는 항상 자기 자신에게 단위가 놓여진다. 자기 자신이 늘 가장 중대한 것이다. 이 점은 특히 강조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이 중대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 중대한 것을 따지고 보면 그것은 역시 신, 구, 의, 삼업에 크게 관계되어 있다. 몸으로 하는 노릇, 입으로 하는 말, 뜻으로 생각하는 것 ― 의지력과 정신 작용이 세 가지가 혼탁해지면 그 사람은 잡된 사람인 것이고, 반대로 이 삼업이 맑고 청청하면 거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업을 맑힌다. 몸짓을, 입으로 하는 말씨를, 정신 작용을 맑혀 나간다.

그런데 아주 델리키트한 것은 몸이란 형식적인 것인데 이 몸의 일부분인 성대기관에 정신이 작용하여 형식 속에 정신적인 것이 내포되어 표출되는 것이 인간의 말이다. 하여튼 삼업을 맑히는 것은 불교의 근본 문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일을 해 나감에 있어서 몸의 가짐새를 맑히고, 다시 말하여 자기 몸을 깨끗이 하고, 의복은 어떤 천으로 마련되어 몸을 가리고, 그런 다음 입은 양치질을 하고,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어떻게 하여 자비스럽고 사랑에 가득찬 음성을 낼 것인가. 또 이 말은 자기의 의식작용, 자기의 정신 작용으로서 어떻게 흘러나오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근본 문제가 된다. 어떤 학문을 하든 어떤 일을 하든 간에 불교에서 목표하는 바는 몸과 말과 정신작용으로서의 뜻, 이 세 가지가 근본이 되는 것이다. 첫째는 이를 깨끗이 해야 된다. 이를 청정히 클리어하게 다스려야 된다. 이것이 맨 먼저 문제 되는 바다. 정삼업 진언은 다음과 같은 주문(呪文)이다.

‘옴 사바빠바 슈따살빠달마 사빠바바 슈또함’이를 세 번 외운다. 이 범어(梵語)의 주문은 물론 말인 이상 뜻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일정한 격식에 의하지 않고는 이를 밝히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행원례(行願禮)를 꾸미는데 있어 내가 지금으로부터 35, 6년 전에 그 조직체계(組織體系)의 목표를 어디에 두었느냐 하면, 인생이란 인간이 생활을 영위함을 이름이다. 생활을 영위하는 데는 반드시 사람의 왕래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이 사람의 왕래에다 표준을 삼아 행원례의 수차 그대로 자기 근행(勤行)의 스케줄을 짜 본 것이었다.

정삼업(淨三業)이란 이를테면 사람의 왕래를 위해 집을 깨끗이 소제한다는 것인데,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집은 두 말 할 것도 없거니와 실상은 우리의 몸이 인간의 집이다. 국가도 넓은 의미로는 우리의 집이다. 그래서 첫째로 이 우리 인간의 집을 깨끗이 해 두어야겠다 하는 것이다.

집을 깨끗이 소제한 다음에는 이로써 만족할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여기 향내가 어리도록 향(香)을 피워 놓는다. 부처님 앞에 하는 것처럼 우리 집에도 향을 피운다.

 이 글은 지난해 12월 발간된 〈효당 최범술 문집(편자·효당사상연구회 회주 원화 채정복)〉 전 3권 중 제 2권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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