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부터 알고 자기 중생부터 제도해야 합니다

▲ 그림 최주현

자기부터 알고 자기 중생부터 제도해야 합니다
내 몸뚱이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말고 다 내놔라.
다 내놓게 돼서 다 나 아님이 없을 때에
비로소 하나도 버릴 게 없다.

(지난 호에 이어서)
내가 그전에도 얘기를 했죠. 그 뜨물 한 그릇 얻어먹고 나뭇짐을 해다 주려고 그랬는데, 은사가 그냥 한 번 때려 제껴서는 쓰러뜨려 놓고 “이놈아! 나무 한 짐으로써 무주상 보시가 될 수 있겠느냐?” 그래서 그 말씀을 듣고 행하고 난 뒤에는 “아차, 무주상 보시가 이렇게 광대무변한 걸 몰랐구나. 그 핵심적인 여기에서의 한생각이면 무주상 보시의 행을 할 거를 내가 이 나뭇짐을 하느라고 이렇게 끄달렸구나.” 하곤 그냥 무르팍을 탁 치고, 무르팍 깨진 거를 어루만지면서 “고맙다, 고마워.” 했다는 얘기 말이에요. 이렇게 자비하고 평등하고 묘하고 이런 법을, 우리가 이렇게 모두 재료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른대서야 어떻게 앞으로 실천해 나가며 어떻게 이 혼란한 세상을 헤쳐 나가렵니까. 포교 좀 하고, 다니면서 설법하고, 다니면서 뭐 하나 집어 주고 이러는 게 무주상 보시가 아닙니다. 그거는 새 발의 피예요. 우리가 쌀 수억 가마니를 갖다가 고아원에 줬다고 해도 그건 새 발의 피예요. 물론 물질로도, 물질 아닌 무주상 보시로도 함께 겸용을 해야 이것이 중용이 되죠. 그러나 ‘이거는 아니고 이거는 맞다.’ 이런다면 벌써 그 중용은 그냥 해체가 돼 버리고, 진짜 핵심적인 중용을 할 수가 없는 거죠. 그것도 이름해서.

지금 쿠웨이트나 이란 문제, 세계적인 문제, 이북 문제 등 뭐 이런 문제들이 허다하지만 그것을 사람이 사량으로 얘기하면 온갖 이론이 그냥 쫙 붙어서, “이거는 절대적으로 어렵고, 이렇게 완화될 수도 없다.”고 하죠. 논리적으로 교수들이 얘기할 때, “강대국에서 이럭하니까 이북은 고립될 것이다. 고립이 됨으로써 정책을 완화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 한국이 어떻게 대처를 할 것이며, 이에 따라 이북에서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 이런 문제들이 복잡하게 붙죠. 그런데 부처님 법에서는 안 그래요. 내가 한다면 하고 만다면 말지, 부처님 법에는 이유가 붙지 않는다니까요. 이렇게 말하면 날더러 이제 미쳤다고 하겠죠. 허허허. 어휴, 그러다 보니까 더운데요.
그러나 곰곰이 잘 생각해 보고 실험하시면서 공부 열심히 하세요. 그러면은 내 속을 알 수 있단 말입니다. 자기 속 알면 내 속 알고, 내 속 알면 일체제불의 속을 알 텐데 뭐가 걱정입니까? 일체제불의 속을 안다. 그렇죠! 저 꽃 한 송이의 속도 알 테니까요.

그 전에 외국에 갔을 때입니다. 누가 꽃을 아주 색색가지로 한 아름 꽂아다 놨어요. 그런데 나도 무의식중에 그냥 “아휴, 꽃도 참, 누가 꽂아 놨는지 고상하게 한 종류만 꽂아 놓으면 됐지, 이걸 그냥 색색가지로 갖다가 놔서 어지럽구나.” 그러고선 목마르니까 무의식중에 그냥 냉장고를 열고선 물을 마시는데 그 꽃이 말하는 거 있죠? “내가 이 파란 옷을 입고 나왔지만 당신을 도울 수 있어.” 하는 겁니다. “어떻게 도울 수 있느냐?" 하니까, 그것도 말을 하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예? 허허허.

바로 전에 다리를 뱀한테 물린 사람이 왔었는데 영 낫지를 않아서 구멍이 이만큼 뚫렸으니까 병원에서 가제를, 전부 약을 넣어서 소독을 해서 거기 넣어 줬는데 그게 새 살이 안 나오니깐 엉덩해져서 그냥 그걸 붙들고 아주 쩔쩔매더라고요. 그런데 걔가 그러는 겁니다. 자기를 짓찧어서 그 가제에다 묻혀서 넣으라는 거죠. 자기가 준다 이거죠. 이게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는 반면에 말 없이 말을 듣는다. 말 없이 말을 듣고 말 없이 말을 받아들이고 행하고….’ 이것이 또 가까운 데서만이 그렇게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미국에 있고 여기 있어도 같이 말을 할 수가 있고 그걸 들을 수가 있다. 그리고 볼 수가 있다. 뼈가 몇 개가 달린 거까지도 볼 수가 있고 사마귀가 붙은 거까지도 알 수 있다. 또 과거에 죽은 사람의 형태도 그냥 낱낱이 나온다 이겁니다, 모두가. 이렇게 좋은 공부를 안 하시렵니까? 허허허….

그러니 부처가 따로 없습니다. 여러분이 부처님이자 중생입니다. 왜 그런가 그랬더니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다.’ 그런 소리를 가만히 듣고 생각을 하니까, 그전 일입니다. ‘아하, 몸뚱이 속에 중생들이 우글우글하구나. 몸뚱이 속에 중생들이 우글우글한가 하면, 이 상반신 하반신이 전부 중생들이요, 부처구나.’ 부처 속에서 중생이 나왔고 중생 속에서 부처가 나왔지 딴 데서 온 게 하나도 없더라고.
제가 그전에도 항상 말씀드렸듯이 숙명통(컴퓨터), 타심통(탐지기), 신족통(팩스), 천안통(천체 망원경), 천이통(무전 통신기), 누진통(레이더망) 이것들을 우리가 마음대로 쓸 수 있어요. 이게 말로 이름을 지어 놨다 뿐이지, “물이 넘치면 안 돼!” 할 때 거기 전체가 돌아가는 겁니다, 그게. “물 넘치면 안 돼!” 하는 그 순간에 전체가 돌아가는 게 그냥 딱 집중되는 겁니다. 그게 따로따로 벌어져 있는 게 아닙니다.


보십시오. 눈 따로 있고 귀 따로 있고 이름도 다르죠? 코 따로 있고 혀 따로 있고 몸뚱이 따로 있고. 그렇게 따로 있고 이름이 전부 각각이면서도 한 몸뚱이에 붙었죠. 그래서 눈·귀·코·혀·몸·뜻, 육식(六識), 이것이 바로 한꺼번에 주어져서 한꺼번에 나가는 이치죠. 손가락이 열 개다 하면 새끼손가락 하나만 없어도 뭘 쥐는 데 꼭 쥐어지지 않죠. 그렇게 일을 못 하듯이, 그 나사가 하나가 빠져도 안 되듯이…. 인간에게는 그렇게 시스템이 다 아주 굳건하게 주어져 있는 것이죠. 그렇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지수화풍의 재료를 바탕을 삼아서 광력·전력·자력·통신력이 그냥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기가 적으면 맘대로 끌어서 기를 넣을 수 있는 운전사가 될 수 있고…. 자기가 본인이니까, 핵심이니까 기를 넣을 수도 있고, 병이 났으면 한생각에 그 파업을 중단시킬 수도 있는 겁니다, 자기니까. 여기 공장 하는 공장장들, 직원들이 다 자기야.


그렇기 때문에 그것도 그렇고 모든 게 다 그래요. 가난이든지 뭐든지 전부예요. 그래서 자기부터 알고 자기 중생부터 제도해야 그 중생들이 털구멍을 통해서 오고 감이 없이 오고 가고, 말함이 없이 말하면서 모든 걸 정돈시키고, 보이는 몸뚱이를 턱 봐서 할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인간에게 아주 편리하게 주어져 있다는 거죠.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는 부처라는 것이 주어져 있다 이거죠.
그러면 나만 말했으니까 이제 질문 좀 하세요. 여기 배꼽시계가 조금 갔으니까. 허허허…. 전에 저는 산에 다닐 때요, ‘몇시나 됐나?’ 이러면 ‘이쯤 됐겠구나.’ 또 ‘동쪽이 어딘가?’ 하고 보면 ‘여기쯤 되겠구나.’ 이렇게 알았죠. 그냥 그냥 알아지는 거죠. 그러니까 다니지 어떻게 그 눈 속에 다닙니까? 사방에서 무엇이 나타나서 해칠지도 모르고 어디로 갈 줄도 모르고 그러면 어떡합니까? 그러나 전부 친구예요. 전부 친구이기 때문에, 새들이나 나무들이나 전부 친구이기 때문에 가다 보면 벌써 “야, 이 친구야! 이리로 가지 그리로 가?” 그러고 인사를 하죠. 여러분은 인사하는 걸 못 보죠? 그래서 이리로 가도 저기로 가도 모두 친구요 벗이요, 외로울 게 하나도 없고 고독할 게 하나도 없고…. 내가 공부하려고 해 볼 거는 다 해 봤습니다. 그래서 남한테 의존하지 않고 남한테 기대지 않고 남을 원망하지 않고 내가 극복할 수 있는 거는 다 극복했고 그렇게 해 나가는 거죠. 또 질문하실 거 있으면 질문하세요.
 

질문자2(남): 큰스님같이 고행을 하지 않고도 마음을 깨칠 수 있습니까?

큰스님: 그렇죠. 비유를 해서 말씀드리자면, 왜 예전에는 종이 하나 만들려고 해도 나무껍질을 삶아서 온통 고생을 해 가면서 손으로 했지만, 지금은 그냥 탁 하면 잘라지고, 탁 하면 그냥 나오고, 아주 차곡차곡 나와요, 그렇게. 지금 그런 세상이라고요. 그렇기 때문에 정신도 그만큼 빨라요. 한생각에 그만큼 빨라지는 거죠. 그러니까 무슨, 몸뚱이로 고행을 했다 하는데 예전에 부처님 말씀처럼 몸뚱이 떨어지면 말도 떨어지고 다 떨어지는데, 무슨 몸뚱이로 고행을 하느냐는 겁니다.


그저 이 마음공부를 할 때 어떤 고난이 다가와도 ‘네놈이 하는 거니까, 네가 알아서 고난이 안 되게 할 수도 있고 고난이 되게 할 수도 있으니까 이 친구야, 이렇게 고난을 받게 하지 않아도 알아, 네가 하는 걸.’ 이런다면 그게 금방 바꿔지죠. 금방 바꿔지기 때문에 여러분이 여러분을 안다면, 각자 자기 핵심을 안다면 내가 고행한 것만 아는 게 아니라, 전체 역대의 부처님 역사도 알 수 있으며 병풍 둘러친 듯한 이 세상도 알 수 있는 건데 그까짓 게 뭐가 문제입니까? 모두 나 아님이 없는데…. 연구하는 박사들 머리 속에 들어가 주려면 그만큼…, 그러면 그 박사 머리 속에 들어갔을 때는 그 박사가 고생한 것만치 다 자기, 자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 알게 되는 거예요. 다 알게 되는데 뭘 “똑같습니까? 그것을 알게 됩니까?” 그러면서 여러 소리를 합니까? 그러니까 한 발짝도 떼 놓지 않고 자기 앉아 있는 자리에 자기가 있다는 걸 아셔야 됩니다. 변소간에 앉았어도요. 허허허….

질문자3(남): 어느 스님이 예수도 공자도 또 석가모니도 다 큰 도둑놈이라고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큰스님: 그런데 큰 도둑놈이라고 그렇게 역설적인 말을 할 필요도 없죠. 그것은 그분들을 위해서, 위대하게 보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신 거겠죠.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도둑놈이라고 하기 이전에, 능력이 없어서 도둑질을 못하지 뭐, 도둑질을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 도둑질을? 그러니까 내 말이 그겁니다. 요만한 거 하나도, 내 몸뚱이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말고 다 내놔라 이겁니다. 다 내놓게 돼서 다 나 아님이 없을 때에 비로소 하나도 버릴 게 없다는 얘깁니다.

예수가 삼십이 좀 넘어서 그렇게 됐다던가 그러는데, 둘이 아닌 도리를 알고 있었지만 둘이 아니게 나툴 줄을 몰랐어요, 부처님처럼. 그래서 그분이 몸뚱이, 말로 전파하다가 그렇게 됐지 않습니까? 만약에 부처님처럼 나툴 줄 알았다면 그때 몸뚱이는 그냥 앉혀 놓고도 모든 것을 행해 나갔을 텐데요. 그런 걸 느껴요. 그러니 도둑놈도 조금 설익은 도둑놈이 돼 버린 거죠. 허허허. 도둑놈이 되려면 아주 그냥 몽땅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말고 집어삼키든지요. 그래, 또 말씀하세요. 이렇게 얘기하는 동안에….


질문자4(남): 일전에 영국의 우주 학자가, 그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말도 기계를 조작해서 하는데 노벨물리학상을 탔죠. 이름을 잊어버렸는데, 그 양반이…, 호킹 박사! 그분이 블랙홀이란 얘기를 했는데, 우주가 생성되는 원리를 제일 비슷하게 얘기했다는 것 같습니다. 우주가 생성된 과정을 아무 물체가 없이, 불덩어리가 돌아가고 그 속에는 무(無), 없는 무, 불교에서 말하는 없는 무, 그냥 하나의 그 구멍에서…. 그래서 그 검은 구멍을 블랙홀이라 그렇게 얘기하는 거죠. 스님은 늘 우주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큰스님: 그런데 나는 그 생성 과정을 말하는 게 아니죠. 생성 과정은 모든 사람들이 다 연구해서 알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돌아가는 이 자체, 일체를 늘이고 줄이고 할 수 있는 그런 자유자재권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 이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 지구도 그냥 삽시간에 부숴 버리려면 부숴 버릴 수 있고, 수명을 길게 하려면 길게 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한 것을 우리 몸뚱이에 비유합시다.
지금 우리 중생들이 지구 안에서 살듯이, 이 몸뚱이 내 집 안에서 생명들이 살고 있는데, 그 생명들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니게, 즉 영원한 친구들로서 자재력으로써 이끌어 간다면, 자기가 자기를 죽일 수는 없거든요. 그러니까 살이 굳어 가다가도 자기가 자기를 죽일 수 없으니까 다시 생산이 되는 거죠. 일어나는 거죠.
그러니까 이것이 한마음 한뜻이 된다면 이 몸뚱이도 수명을 더 길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다가 그냥 ‘아, 이대로 그냥 갔으면….’ 하거나 ‘이제는 옷 좀 다시 입고 나와서….’ 하든지, 또는 그런 생각도 없이 ‘아, 이젠 이만하면 됐지.’ 할 때 그냥 옷 벗고 가게끔 돼 있잖아요. 이 별성도 그렇게 돼야만 되겠죠. 수명이 우리보다 길지마는 우리 생명 그 자체의 핵심이 바로 별성이니까요. 별성과 전부 직결돼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우리 수명이 짧은데 이 짧은 거를 길게 할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할 게 있어요. 어린애들을 놔두고서 죽으면 그 애들이 글쎄 얼마나 평지풍파를 겪게 됩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생성적인 문제를 연구할 때는 반드시 이 핵심적인 문제, 즉 중용이 필요하고 그거를 잘 생각해 봐야 된다는 얘기죠. 지금 공부를 한다면, 수명을 길게 할 수도 있는가 하면, 그 몸뚱이를 둘 아니게 이끌어 감으로써 우리가, 하여튼 한 반 이상만 넘으면 그렇게 불국토를 이룰 수 있다는 얘기죠. 그래서 내가 이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참 묘한 법입니다. 내가 ‘지구도 빨리 죽게 할 수도 있다.’ 이러는 건, 이 인간의 몸으로 비유해 볼 때 의식만 빼면 안락사입니다. 그와 똑같습니다. 크지도 작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그 생성 과정을 다 얘길 할 수 있어도,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건 무효입니다. 자재할 수 없다면 무효예요, 알아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이 세상을 다 본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니라. 다 듣는다 해도 도가 아니니라. 또 과거를 다 안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니라. 남의 마음을 다 지켜볼 수 있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니라. 몸이 보이지 않게 오고 감이 없이 오고 간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니라.” 다섯 가지 다 도가 아니라고 그랬어요. 왜냐? 이 속에서 벗어나야만이 누진(漏盡), 즉 자유권을 얻는다는 거죠. 그래서 이 다섯 가지를 다 알아야 생성 과정을 아는데 그 생성 과정을 다 알아도 누진으로써 내가 “이거 물 넘치면 안 된다!” 하는 그런 철통같은 대권(大權)이 없으면 안 되죠. 그건 무효죠. 모든 거를 통달하고, 그것도 이름해서…, 통달했을 때에 거기는 아무것도 붙지 않는다 이겁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이것이 옳기 때문에 바로잡아 주기 위해서 이런 걸 이렇게 말한다.” 했거든. 그렇기 때문에 틀린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거는 틀리고 이거는 옳다 했기 때문에 그만 거기에 걸린 거죠. 그거는 두루뭉수리가 되고 아무 쓸모가 없는, 한데 떨어지는 말이 돼 버리고 말았죠, 법이 아니라.

질문자5(남): 큰스님, 체험담 비슷하게 제가 느낀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조그맣게 사업을 하고 있는데 얼마 전에 회사에 어려운 일이 있어 가지고 진짜 마음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사업도 실질적으로 부처님이 시키는 일일 뿐이다 하는 마음가짐으로 생각을 했어도 도저히 그 어려운 일이 잘 해결이 안됐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도저히 묘안이 나오지를 않아 자연히 차를 몰고 그냥 큰스님한테 오게 됐습니다. 지혜를 좀 주시기를 간청하였더니 말씀을 딱 한마디만 하고 더 이상 얘기를 안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나가서 부처님의 일꾼이라 생각하고 그대로 행을 했더니 그 일이 성사가 잘됐습니다. 그래서 너무 감사하고, 그리고 그 일이 또 해결됐다고 하더라도 제 자신의 뜻이 경솔해지지 않게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게는 한마음선원의 큰스님이 사실 부처님의 인연으로 맺어졌는데, 큰스님이기 전에 부처님의 인연으로 해서 어머니와 자식간의 그 인연으로 생각하고 법문을 들었습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도 읊는다는데 8년을 다녔는데도 사실 아무것도 모르겠더라고요. 누가 질문을 하거나 누가 옆에만 와도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공부가 안되나 하면서도 3년이 넘어 6년이 됐는데도 아무것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날 아까 말씀하신 그 ‘일체제불의 마음’ 노래가 참 가슴 깊게 와 닿았습니다. 그랬는데 듣는 순간에 제 자신이 정말 아주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데, 한마음 주인공 공부를 거기에서 조금 힌트를 얻은 적이 있습니다. 꼭 한 번 말씀드려….


큰스님: 알았어요. 그런데요, 그 한 찰나가요, 지금 정치라든가 우리 나라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어떤 땐 자기 소견으로 잘못 생각할 때도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안된다 하더라도 ‘아이구, 내가 이렇게 실험해도 안되는구나.’ 이러고 물러서지 마세요. 그거는 자기 생각이고 대의적으로 그렇게 하면 안 되기 때문에 안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 게 있어요. 그러면 후퇴를 해 가지고 다시 이기는 점도 있죠.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이게 멀고 가깝고가 없이, 생활 속에서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를 도울 수도 있는 겁니다. 만약에 내가 의심을 하지 않고 무엇을 했다면…, 의심을 하지 않고 한 게 지금 이런 일입니다. 소련이나 미국이나 이런 문제들을 완화시키는 거요. 그렇게 한다면 그냥 그냥 하는 거지, 거기에 뭐가 붙습니까? 네가 나 아님이 없고 내 나라가 이렇게 반동강이로 잘려 가지고 허덕이고 있는데 아니, 내가 그 생각을 하는데 거기에 무슨 이유가 붙습니까? 예?

누가 잘못했다고 하며 누가 잘했다고 칭찬해 주겠습니까? 그냥입니다, 그냥. 그냥 내가 여기서 태어났고 여기서 사니까 그냥 했을 뿐이죠. 거기에 무슨 이유가 붙어요? 거기 부처님 법이다 사람의 법이다 뭐, 이런 것도 붙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과 내가 둘이 아닌 까닭에 그냥 내가 보기에 내가 고생스럽죠. 그 고생을 하는 거, 아픈 거, 모든 거를 지켜보고 나온 사람이거든요. 6·25도 겪어 봤고요. 그랬을 때, 내가 ‘참 이건 안됐다.’ 하고선 이렇게 생각했으면 그뿐이지 거기에 뭐가 붙습니까? 붙지 않는 것이 바로 부처님 법입니다. 여러분의 법이고요.


그러니까 이 정치라든가 세계를 운영해 나가는 그런 문제, 내 가정, 내 몸부터 모두 이렇게 해야 되기 때문에 ‘나부터 알아라.’ 하는 것이 바로 그 얘기죠. 그리고 나를 알기 이전에 꾸준히 생활 속에서 실천을 해나가 보시라 이겁니다. ‘내가 모르니까. 내 거기까지 못 갔으니까.’ 뭐, 이유가 그냥 짜드리짜드리 붙거든요, 여러분은. 실험을 해 보기 이전에 벌써 이유부터 붙어요. 그러니 뭐가 됩니까, 그게? 실험을 어떻게 합니까, 그걸? 이건 무심으로 해야 하는 건데 이게 이유가 붙어, 그냥. 벌써 요만한 거 하나, 애들하고 어디 가는 거까지도 이유가 붙어요. 아이고, 그러니 글쎄 그게 온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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