瞋心 줄이기-더 낮추자

총장 선거 낙마 당시
분노를 수행으로 극복
내가 만든 업에
스스로 속지말자

▲ 송석구 前 동국대 총장
평생을 부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가슴이 막히고 시원스럽게 뚫리지 않고, 진정 깨달음이 있는가 물론 깨달음은 각자(覺者)를 의미한다. 그러한 각자(覺者)는 석가모니 부처님 한분이신가? 수 없이 많은가?

대승불교의 가르침은 깨달은 사람은 많고 누구나 부처님의 수행을 따르면 깨달을 수 가 있다 하였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다 불성을 가지고 있고, 그 불성은 청청한 마음이라고 한다. 깨달음은 그러한 청정한 마음이 계속 유지하여 차별없이 하나 같이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할진데, 어찌 우리마음은 이렇게도 변하고 있는가? 물론 내가 아직 깨닫지 못하여 마음이 평정되고 편안하지 않고 있는 것임은 확실하다.

무상(無常)한 이 마음을 무상(無常)함을 깨닫는 것, 한순간만 아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경계에 부닥치더라도 평정하고 일심(一心)을 유지하는 상태, 그리하여 편안하다, 일심이다, 삼매(三昧)다 하는 것도 알지 못하여 자연 그대로의 모습. 마음자리가 각자라고 한다면 나는 아직도 중생이요 무맹번뇌의 존재이다. 그러기 때문에 아직도 할 일이 많고 신심을 내어 수행해야 한다.

수행에는 승속(僧俗)이 따로 없다. 승(僧)도 수행을 하지 않으면 속인(俗人)과 다름이 없으며, 속인(俗人)도 수행을 하면 출가승(出家僧)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수행하는 풍토 이것이 불국토(佛國土)의 지름길이다.
나는 생각한다. 불교(佛敎)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무엇을 깨닫는가! 마음을 깨닫는 것이다.

마음이 어떤것이기에 깨달아야 하는가, 우리 마음은 본래 맑고 깨끗한데 홀연히 무명이 덮혀 그 깨끗하고 맑음이 언제나 밝게 들어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믿음도 바로 이 청정함을 믿는 것이다. 이 무명이란 무엇때문에 일어나는 것인가 두말할 것 없이 탐, 진, 치(貪,瞋, 癡) 세가지 독한 마음의 산물이다.

우리 마음은 낳고 멈추고, 변화하고, 사라진다(生,住,異,滅)라고 한다. 이 세계가 성(成), 주(住), 괴(壞), 공(空)이듯이 마음은 일어났다 변화되고 없어진다는 것이다. 마음이 이러한 것은 깨닫고 그렇게 보고 집착을 하지 않으면 어떠한 대립도 투쟁도 없어질 것이지만 인간은 이러한 마음에 집착하여 온갖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일어나, 살인, 강도, 음란한 성폭행, 거짓말 악한말 이간질 말 사기하는 말 등으로 결행되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탐욕의 마음 분노의 마음 어리석은 마음을 가장 해로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진에의 마음은 우리인간의 근본 번뇌의 하나라고 한다.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경계에 대하여 미워하고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을 편안치 못하게 하는 심리작용을 말한다.

우리가 분노를 일으키는 이유는 물질적인 것(色) 나쁜말(聲) 냄새(香) 맛(味) 감각(觸) 등의 형상적인 것과 보이지 않지만 다른 하나는 의식작용이다. 이러한 경계에 자기마음과 다르면 분노하고 미워하고 그것은 아주 무서운 행위로서 나타나야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살생, 도둑직, 음행, 거짓말, 두가지말 악한말 속이는 말을 방지하는 것이 곧 깨달음의 길인 것이다. 생각생각을 잘 단속하여 이러한 악행을 하지 않아야 만이 새로운 업(業)을 짓지 않는 것이다.

아직도 마음을 가다듬고 억지로 단속해야만 분노의 마음이 사라지지만 그래도 아직 분노의 마음 자체까지 뿌리가 뽑혀지지 않았으니 그 방법을 말하고자 한다.

내가 1990년에 동국대 총장직선에 입후보하여 압도적으로 일등을 한적이 있다. 그해 10월말에 이사회에서 총장선출이 있었는데 웬일인지(이유는 있었지만), 총장선출이 연기 되었다. 1991년 2월에 재차 총장선출 이사회가 열렸고 초반만해도 1등으로 교수회 추천을 받은 내가 유리하였다. 그런데 막상 표를 열고 보니 내가 한표가 적어서 낙방이 되었다.

누구도 만날 수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모두가 모래알 씹는 기분의 상대였다. 그러나 거리를 헤멜 수 없지 않는가? 해가 떨어질 무렵 집으로 갔다. 아이들은 없고 집사람 혼자 안방에 있었다. 나는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말하게되면 이유를 설명하게 되고 설명하게 되면 분노가 폭발할 것이 명약관화하다. 나는 서재에 들어가 좌선을 하려고 결가부좌를 했다.

아무리 화두를 들려해도 배신의 증오가 눈에 어린거린다. 모두가 약속을 했는데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인간이 너무 간사하고 의리가 없고 정의가 없다는 것인가? 목탁을 들고 염불을 시작했다. 고성염불 속에 문득 ‘이 결과는 나의 업장의 결과이다. 그 누가 나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과거에 진 죄업을 갚는 것이다’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지나갔다.

원망하는 것은 고통이다. 나는 오랫동안 수유리 화계사에서 매일아침 108참회와 함께 지장경·금강경 독송을 하고 있었다. 지장경의 죄업 소멸이 머리속에 박혀온다. 나는 이것을 이기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 부처님법을 실천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나의 전생의 업장이 이 일로 소멸되어 새로운 업을 짓지 않도록 해야한다. 지금 나를 찍어주지 않은 분들은 전생에 내가 빚을 많이 진 분이고, 이제 이 고통으로 그 빚을 갚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지고 새로운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나는 저녁늦게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한분한분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제가 전생의 죄업과 빚을 이것으로 갚았읍니다. 업장소멸이 되어 마음이 편안합니다”하고 진정 참회를 하였다.

물론 그후에도 분노의 마음 원망의 마음이 일어났지만 죄업소멸로 이겨냈다. 모든 업은 내가 짓는 것이다. 풀어내는 것도 내가 하는 것이다. 오온(五蘊)이 본래공(本來空)이다. 고액(苦厄)은 없다. 내가 만든 것에 속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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