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관서 고찰을 가다- 교토 난젠지

거대한 위용의 三門 ‘눈길’
초조대장경 521종 보관돼
‘철학의 길’ 한번 걸어보길

▲ 일본 교토 난젠지(南禪寺)의 산몬(三門). 한 다이묘가 무사들의 영령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
교토의 난젠지(南禪寺)는 수많은 교토 선종 사찰 중 으뜸으로 여겨진다. 그도 그럴 것이 20m는 족히 될 듯한 거대한 산몬(三門)을 비롯해 국보로 지정된 방장(方丈), 카레이산스이 정원 등 유독 볼거리가 많은 사찰이기 때문이다. 특히 정원은 막강한 권력을 지닌 다이묘(大名)이자 뛰어난 다인(茶人)이었던 고보리 엔슈(小堀遠州)가 심미안을 한껏 발휘해 만들어 더욱 유명하다.

동국대 선학과 교수 보광 스님의 저서 <일본선의 역사>에는 난젠지 개창과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불교에 대한 독실한 신심을 가진 가메야마(龜山) 천황은 교토 동쪽에 있던 자신의 별궁을 사원으로 만들겠다고 발원했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불교를 전한 신치 가쿠신(心地覺心) 스님에게 개산조가 돼줄 것을 요청했으나 스님은 고사했다.

▲ 난젠지의 정원. 카레이산스이의 전형이다.
천황은 결국 별궁을 젠린지(禪林寺)라는 선찰로 만든 뒤 스님들을 주석토록 했다. 그 후 갑자기 절에는 밤마다 귀신이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혔고, 신통력이 있다는 스님들을 불러 온갖 기도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무칸 후몬(無關普門, 1212~1291) 스님으로 그는 젠린지에서 선승 20여명과 3개월간 참선수행에 들어갔다. 그렇게 3개월가량을 지속하자 더 이상 귀신이 출몰하는 일이 없어졌고, 가메야마 천황은 후몬 스님을 개산조로 삼았다.

난젠지가 현재의 사격을 갖춘 것은 2대 주지인 소엔 스님(祖圓, 1261~1313) 때이다. 소엔 스님은 20년간 주지를 맡으며 도량을 현재의 규모로 완성해 명실상부한 일본 제일 선종 사찰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무엇보다 난젠지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삼몬이다. 1628년 한 다이묘가 전쟁에서 죽어간 무사들의 명복을 기리기 위해 지어 기증했다고 전해지는 건물이다. 소정의 입장료를 지불하면 맨 위까지 올라가 볼 수 있다. 이를 보기 위해 일본 각지에서 참배객들이 몰리며, 인근 학교 학생들에게는 좋은 휴식처이기도 하다.

난젠지는 한국과의 인연이 깊다. 이곳에 고려 초조대장경이 보관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수량은 521종 1823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초조대장경 전체의 1/3에 해당했다. 고려대장경 조성 1000년을 맞아 초조대장경의 상당 부분을 디지털로 복원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난젠지 스님들의 아낌없는 협조가 절대적이었다.

난젠지에 초조대장경이 수장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한국에서는 임진왜란때 왜구가 가져간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 난젠지의 다실. 정원을 바라보며 차를 마실 수 있다.
고베 젠쇼지(禪昌寺) 주지인 곤도 도시히로(近藤利弘) 스님은 2007년 고려대장경연구소가 개최한 초조대장경 국제워크숍에서 “젠쇼지의 에도(江戶)시대 기록을 볼 때 일체경은 원래 젠쇼지에 있던 것을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에 의해 지금의 난젠지로 옮긴 것”이라며 “원(元)판에 더해 1400년부터 1429년까지 부족한 부분을 고려나 중국 각지에서 출판된 것을 구입하거나 일본에서 추가해 지금의 일체경을 갖췄다. 일체경은 임진왜란 훨씬 이전인 조선 초기에 이미 완성됐다”고 밝힌 바 있다.

일본 난젠지에 들리면 꼭 들려야 할 길이 있다. 바로 ‘철학의 길’이다. 교토대학 근처에 있는 ‘철학의 길’은 교토의 히가시야마(東山) 산기슭, 긴가쿠지(銀閣寺)에서 난젠지에 이르는 2.5km 정도의 길이다.

실개천 옆으로 난 이 길을 오르내리면서 ‘교토학파’의 중심인물인 니시타 기타로(西田幾多郞, 교토대 교수)의 철학이 정립됐다고 한다. ‘종교와 절대무(絶對無)’를 탐구했던 교토학파의 형성은 이 길에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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