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무량수경’의 16관법

이미지 범람 시대서 ‘나 지키기’
감각이 나고 사라짐을 관상하는
‘관무량수경’이 해답 줄 수 있어

극락세계 이미지와 소리 표현은
수행 방해물 아닌 깨달음의 방편
일반 수행과 달리 감각들을 수용

현대를 이미지 범람의 시대라고 한다. 매일매일 사진,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디자인, 광고, 게임, 만화, 유튜브, 인터넷 등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미지들이 쏟아지고 있다. 사람들은 길을 가든 지하철을 타든 스마트폰을 보느라 정신이 없고, 젊은이들은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문자메시지나 디지털이미지를 통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한다.

이제 가상과 진상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가상현실이 진짜 현실보다 더 진짜 같고 더 익숙한 것이 되어버렸다. 또한 논리적인 사유나 반성적 성찰보다 눈으로 보고 눈으로 판단하는 디지털적인 감수성이 더 호소력이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의 감각에 호소하는 이미지들은 감각을 깨어나도록 하여 풍부하게하기보다 과도한 이미지 속에서 오히려 전례에 없던 감각의 혹사를 경험하게 하고 있다.

특히 디지털 이미지는 ‘파편처럼 단편적인 양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더욱더 파괴적이다. 그렇다면 범람하는 이미지 한 가운데에서 우리 자신을 지키고 감각을 구제하는 길은 무엇일까?

역설적이게도 감각을 구제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감각의 지멸이다. 따라서 아사세에 의해 궁전에 유폐된 위제희 부인이 부처님이 왕림해주기를 간절하게 요청했을 때, 부처님께서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수행법으로 제시한 첫 번째 방법이 바로 저무는 해를 관상하는 일몰관(日沒觀)이었다.

일상관(日想觀)이라고도 부르는 이 관법은 감각을 통해 감각을 사라지게 한다. 빛은 우주 만물의 근본이고 생명의 근원이지만 동시에 삼라만상의 현상적인 차별을 드러내기 때문에 태양의 저묾은 곧 각양각색의 이미지로 이루어진 현상세계의 사라짐을 의미한다. 지는 해와 함께 조용히 어둠이 찾아오면, 감각도 사라지고 수많은 이미지로 형성된 차별적인 현상세계도 사라진다. 어둠 속에서 마음은 평등하고 차별이 없는 적멸의 세계로 들어가 깊은 휴식을 경험하게 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남편을 잃고 아들에게 배반을 당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겪는 위제희 부인에게 부처님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태양을 말없이 관조하도록 하였다. 서쪽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의식을 집중하자 위제희 부인의 들끓었던 마음도 가라앉았다. 그의 고통과 원망도 사라졌다.

그런데 위제희 부인이 왕생하기를 희망했던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는 모든 차별이 사라져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미건조한 세계가 아니다. 그곳은 가장 즐거운 세계, 따라서 무의식에 침잠한 무(無)의 경계가 아니다. 따라서 감각이 잦아들고 맑고 명징한 정신이 깨어나면, 태양이 저문 그곳이 어둠의 세계가 아니라 맑고 투명한 빛의 세계였음이 드러난다.

두 번째로 맑고 투명한 물을 관상하는 수상관(水想觀)을 통하여 마음을 하나로 통일되면, 명징한 마음은 마치 얼음처럼 투명하게 안팎을 꿰뚫어 볼 수 있다. 극락세계의 유리 같이 투명한 땅 아래로 금으로 만든 당번들이 대지를 떠받치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고, 그 당번이 칠보로 장식되어 있으며 여덟 면에 달려 있는 백가지의 보배구슬이 일만 사천 가지 색으로 광채를 더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처럼 빛으로 가득 찬 아미타불의 세계, 극락정토는 모든 존재가 찬연하게 빛나는 세계이다. 하나의 근원에서만 빛이 유출되는 우리들의 사바세계와 달리 극락세계는 무한한 빛의 부처님인 아미타부처님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모든 존재가 빛을 방출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빛 물결 가운데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는 일미평등한 법계가 펼쳐진다.

네 번째 지상관은 수상관을 분명하게 관하여 그 영상이 눈을 감았을 때나 떴을 때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관무량수경>에서는 ‘이 땅을 관하는 사람은’ 이 관법을 통해 삼매를 얻으면 불국토를 분명하게 보게 되어 “80억겁 생사의 죄를 면하게 되고 죽은 후 극락세계에 태어난다”고 전하고 있다.

▲ 일본 서복사에 소장된 ‘관경십육경변상도(202.8 × 129.8cm, 비단에 채색, 고려 시대)’. 정토삼부경 가운데 하나인〈관무량수경〉의 〈정종분〉 을 도해한 장면이다. 불교의 극락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열여섯 가지 관상법과 그 이후 나투는 아미타 정토의 장엄한 모습을 자세하게 풀어 그렸다. 가운데가 삼단으로 나뉘어 있는데 상품, 중품,하품의 중생들이 연못에 연꽃으로 태어나고 있다.
따라서 극락세계에서 감각은 억제되거나 무시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비추는 진실한 것이다. 유리로 만들어진 땅 위로 난 황금의 도로와 그 위로 쏟아지는 무한한 빛, 온갖 보석으로 장식된 누각과 맑은 바람이 불 때마다 들리는 아름다운 풍경소리. 나무와 연못, 누각까지도 모두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어서 마치 ‘백억의 태양과 달이 한데 모여 비치는 것’과 같이 빛으로 가득 차 있다. 감각은 맑고 미묘한 물소리와 누각에서 천인들이 연주하는 천상의 음악을 섬세하고 또렷하게 지각한다.

감각은 이 모든 다양한 것들을 맑고 또렷하게 꿰뚫어보고 현상세계에서 ‘무상’, ‘고’, ‘무아’를 깨닫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수행자를 기억하도록 한다. 다시 말해, 극락세계에서 소리와 이미지는 감각적 즐거움으로 마음을 흐리는 방해꾼이 아니라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특별한 수단이 된다.

제7 화좌상관(華座想觀)과 제8 상상관(像想觀)은 눈을 감거나 눈을 뜨거나 연꽃 위에 앉아 있는 아미타 부처님을 관상하고, 좌우에 있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나 이 때 무량수불이나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형상은 실재적인 존재가 아니라 상상의 산물이다. 하지만 한번 부처님을 생각하면 내 마음이 한번 부처님이 되고 두 번 부처님을 생각하면 내 마음도 두 번 부처님을 닮게 되는 것이니까 이렇게 적극적으로 부처님과 국토를 상상하면서 내가 진실되게 부처님을 맞으러 가면 부처님이 나를 맞이하러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제9관을 통해 마침내 아미타부처님의 진신을 친견하고, 이어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진신도 친견한다. 아미타불을 뵈었을 때의 감격과 아름다움을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키는 육십만억 나유타항하사유순이며, 미간의 백호는 바른쪽으로 우아하게 돌아, […] 다섯 개의 수미산과 같고 부처님의 눈은 사해의 물과 같이 푸르고 빛난다. […] 온몸의 모공에서 빛이 흘러나와 수미산 같고 부처님의 원광은 백억 삼천대천세계와 같다. 그 광명 속에 백만억 나유타항하사의 화불이 있고 낱낱 화불마다 무수한 화보살이 있다.”

열두 번째 관상법인 보관상관(普觀想觀)은 관상자 자신이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연꽃 속에 결가부좌를 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연꽃 속에서 하늘에 가득찬 불보살님을 뵙고 목소리를 듣는다. 이 단계에서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하나로 통일된다.

열세 번째 잡상관(雜想觀)은 아미타불이 신통력으로 시방세계 어느 곳이든 나타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어떤 때는 큰 몸으로 나타나고 어떤 때는 일장육척의 작은 몸으로 나타난다. 상상의 이미지와 진짜 부처님이 진실로 하나가 되는 단계이며, 극락세계가 모두 아미타불의 광명에 조응하고 삼천대천세계가 모두 그 광명 속에 존재하게 된다. 이로써 극락세계에 대한 관상이 끝나는데, 이를 정선이라고 하여 일정한 수행을 거친 자들이 행할 수 있다고 한다.

남은 세 가지 방법은 삼관구품에 따라 염불하는 것인데, 오역이나 십악을 저지른 흉악한 자들도 임종 때 지극한 마음으로 십념으로 아미타불을 염불하면 80억겁의 죄악을 용서받고 극락왕생하게 된다고 한다. 그 후 12대겁이 지나면 비로소 연꽃이 피는데, 그 때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대비의 음성을 듣고 기쁨을 얻는다. 이를 산선(散善)이라고 한다.

이처럼 극락세계의 지극한 즐거움은 감각적 욕망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관무량수경>에 소개된 극락세계의 이미지를 시각화하는 열여섯 가지 관법은 일반적인 명상수행과 달리 감각을 부정하지 않는다.

“저 부처님을 생각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형상을 관해야 한다. 눈을 감거나 뜨거나 잠무강에서 나는 금빛 같은 보석의 형상이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손바닥을 펼쳐 보이듯 그 영상을 확실하게 보는 것이다. […] 이렇게 관상을 하면 부처님과 보살의 상이 다 광채를 발한다. […] 선정에서 나왔을 때 선정 속에서 들은 것을 기억하여 잊지 말고 경전에 기록된 것과 대조해보라. 만약 맞지 않으면 그것은 망상이고 들어맞으면 거친 세계로 극락세계를 본 것이다.”

일반적으로 여러 가지 보배로 장식된 영락, 일산, 당번, 꽃, 누각 등으로 법당을 꾸미고 도량이나 국토를 엄숙하고 깨끗하게 단장하는 행위를 ‘장엄(莊嚴)’이라고 한다. 극락세계가 이토록 아름답게 장엄된 것은 아미타불이 전생에 비구였을 때 발원한 48가지의 서원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국토는 부처님의 지혜로 이룬 세계이다. 따라서 이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본래의 목적은 그 세계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본 사람들이 청정한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장엄’의 뜻에는 ‘무구(a-mala, mala-visuddhi)’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결국 불교는 번뇌에 오염된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 목표이므로, 극락세계를 관상하는 <관무량수경>의 16관법도 마음을 청정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무량수부처님의 저 아름다운 세계를 관상함으로써 위제희 부인의 죄업이 청정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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