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곡차곡 쟁여 있는 습의 종문서를 태워버리세요

▲ 그림 최주현

여러분이 이 마음공부를 하는 데는
무조건 들을 줄 알아야 되고, 무조건 받을 줄 알아야 되고
무조건 삼킬 줄 알아야 됩니다.
하나하나 삼키다보면 나중엔 몽땅 다 삼키게 돼요.
어떻게 한꺼번에 몰락 다 삼키겠어요?

주인공은 무엇이고 어떻게 관하는 것인지요.
문) 얼마 전 인터넷을 통해 스님의 법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은 무엇이며 관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요.


답) 자기 마음이 자기 육체를 끌고 다니죠? 그게 바로 주인공이에요. 자기 육체를 끌고 다니는 자기 마음이 주인공이에요. 그래, 그 근본이 되지요. 말하자면 불성도 될 수 있고, 불성과 영혼 둘이 합쳐진 것이 그대로 한마음이고 말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머니 아버지한테 몸을 받아서 과거에 살던 인과들을 다 이렇게 같이, 의식들을 같이 해서 영혼이 거기에 부합이 돼요. 그래서 삼위일체로서 부합이 돼 가지고 이 세상에 출현하는 거예요. 그래 출현을 하게 되면 그 속에서도 인과가 그대로 자라는 겁니다, 같이. 나 너가 따로 없이 그냥 같이 이렇게 호흡을 하고 작용을 하죠. 그래서 한마음인 거예요. 내 속에 있는 건 따로 무슨 미생물이니 뭐, 세균이니 할 게 없이 모두가 나예요. 그 수억이 다 나예요. 쉴 사이 없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가니까, 그건 어떤 게 나라고 할 수 없는 마당에서 한마음인 거예요.


어떤 것이 운행을 할 때에 나라고 하겠소? 간장 공장에서 운행을 할 때 나라고 하겠소, 소장 공장이 나라고 하겠소? 대장 공장이 나라고 하겠소, 심장 공장이 나라고 하겠소? 어떤 거 할 때 나라고 할 수 없는 까닭에 한마음이라고 그랬거든요. 한마음 그 근본이 바로 나예요, 각자.
그러니까 그것을 가지고 주인이다, 주인이 몸을 이끌어 가지고 가고, 이것도 이렇게 가고 싶어 해서 내 몸이 가게 하고, 말하고 싶어 해서 말하게 하고, 그냥 이런 게 치밀게 해서 치밀게 만들고, 또 나쁜 일도 하게 만들고 좋은 일도 하게 만들고 이러는 게 바로 나예요. 그 근본이 주인이에요, 그 마음 근본이.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 근본이 주인이기 때문에 그 마음으로서 나쁘게 나오는 마음은 다스려서 거기에 맡겨 놔라 하는 게 바로 가르치는 근본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을 주인공이라고 한다 이런 말이죠.

그러니까 주인공에 들이고 내는 거,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작용으로 인해서 우리가 생명이 살듯이, 우리가 살림살이를 들이고 내고 하는 작용으로 인해서 우리는 모든 일체 만법을 커버해 나갈 수가 있는 그 능력이 생기는 거죠.
관한다는 것도, 예를 들어서 ‘지금 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거는 내 한마음 주인공밖에 없어.’ 그렇게 믿고 그렇게 맡겨 놓는 것이 관이에요. 이 관해 본다, 관해 듣는다, 모든 이 세상에서 살고 있다, 말하고 있다, 움죽거리고 있다 이런 게 이름해서 그 관세음이래요, 이름이.
그러니까 그것을 관세음이라고 하기 이전에 나를, 각자 나를 먼저 발견해야 하니까, 나부터 알아야 하니까, 그건 진리니까, 진리 속에서 내가 참구해서 알아야 하니까 내가 있는 것을, 즉 말하자면 내 집 전화부터 놔야 남의 집에 전화도 할 수 있고 전화도 받을 수 있듯이, 나부터 먼저 믿고 알아야 되겠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있다는 것을, 과거에 살던 내 영혼 자체 근본, 불성 자체가 있다는 것을 너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하는 게 참구예요, 관하는 거고.

고 다음에는 일하면서도, 이렇게 사람이 살아나갈 때에 어떠한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 게 있죠, 애로가. 어떠한 애로가, 아프다든가 뭐, 별거 별거 다 닥치죠. 이차적으로 그 닥치는 거는 닥치는 것대로 ‘거기서만이 해결을 할 수 있다.’ 그렇게 거기 맡기고, ‘거기서만이 이끌어 줄 수 있다. 거기서만이 화목하게 이루어 줄 수 있다. 안되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되게 하는 것도 거기서 나올 수 있다.’ 이게 모든 게, 전체 이렇게 관하는 법입니다.

습을 녹이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문) 수억겁 동안 살아오면서 쌓여진 습을 녹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가 봅니다. 한 가지 습을 녹이는 것도 쉽지가 않으니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습들을 다 녹이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요?

답) 여러분은 억겁 전서부터 나오면서 노비 문서를 갖다가 짊어지고 말입니다, 여기서 그냥 저 달나라에 갈 만큼 그냥 차근차근 쟁여서는 무겁게 짊어지곤 살아갑니다. 그 습을 한 번도 떼어 놓지 않고, 그것이 제일이라는 겁니다. 자기 노비 문서가 제일이라는 거예요. 그걸 짊어지고 무거운 체도 안 하고 좋다고 웃으니 말입니다. 그게 사는 거래요. 왜 자유권을 갖고 자유스럽게 살지 못하고, 하나하나 끄달리면서 그렇게 살아야만 합니까? 여러분 앞에 창살이 없는 것 같습니까? 창살이 있고 문지방이 높고 천야만야한 산봉우리가 있고, 이렇게 하니까 사람이 기가 막힐 때가 있고 불이 일어날 때가 있고 건너가지 못할 때가 있고, 이건 한두 건이 아니에요.
우리가 종문서를, 억겁을 거쳐 오면서 우리가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살던 습에 의한 낙관, 습에 의한 종문서. 그 문서는 자기가 지어 놓고 자기가 그 문서를 짊어지고 있는 거거든요. 그러면 지금 사는 것만 짊어지고 있는 게 아니라 억겁 천년서부터 그 살던 습, 즉 종으로 살던 그 습의 종문서. 그것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이 여기서 친다면은 우주 가기만 하다는 겁니다. 그런다면 그것을 몰락 다 그것을 불태워 버릴 수 있는, 삼킬 수 있는 그러한 공부를 하는 데에 우리가 조금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거예요.


그러면은 우리가 쭉 그렇게 가는데, 우리가 그 길을 지금 걷고 있는데 모조리 주인공에다 모두, 만법은 일심으로 들고 일심에서 만법이 나가는 데서, 그 모든 종문서는 거기에 달려 있어요. 그러면 그 한생각 나는 것도 공이거늘, 공에서 나오는 거 일체 그 공으로 돌아가는 걸 다 놓고 가면은, 그 하나하나 놓고 가는 게 종문서를 놓고 가는 겁니다. 거리가 천 리가 된다 할지라도 바로 요 눈썹 아래예요. 그러니 멀다 가깝다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저 산꼭대기로 올라가는데 ‘어휴, 저 산꼭대기 다리 아파서 어떻게 올라가나.’ 한다면은 못 올라가요. 그러나 요 내 한 발자국 떼는 것만 생각하면 언젠가는 올라가게 되거든요.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올라가고 내려가는 그 사이 없이, 그 모두가 한데 합쳐서 떡을 만들어서 고냥 한꺼번에 삼킨다면은 그 얼마나 편안하겠소마는, 우리가 그러한 공부를 하는 데서는 무조건 들어야 하고, 무조건 믿어야 하고,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게 있어요.

예전에 석존으로부터 죽 내려오면서 시간과 공간을 두지 않고 참 그, 참선을 했죠? 그랬는데 그 후부터 화두다 좌선이다 이런 거, 간화선이다 묵조선이다 이런 문제들이 생긴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생기게 되니까 습이, 또 그놈의 걸로 붙어 버려요. 그래서 내가 여기에서, 그걸 몰라서가 아닙니다. 선방의 그 모든 소임을 맡아 가지고 하는 그 일들을 몰라서 그런 게 아니에요. 단지 나는 그걸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그렇게 해 나가다 보면 그 습에 또 걸려 가지고는 아예 나의 문은 도대체 열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통틀어서 뒤죽박죽이 된 것 같지만 본래 진리가 뒤죽박죽이 아니라 뒤죽박죽 된 사이에서 우리는 한생각에 그대로 여여하게 나갈 수 있는 그런 만 가지 능력을 가졌어요. 아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만 가지다 하면 만 가지 숫자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능력을 무수히 가지고 있으면서, 종의 문서를 만날 짊어지고 그렇게 허덕거려야 되겠느냐 이겁니다.

한 소식 얻은 사람도 많죠? 그리고 성장하는 사람도 많고 그렇지마는 한 소식 얻었다고 해서 한 소식 얻었다고 하지 마라 이겁니다. 애가 성장돼야 할 뿐만 아니라, 만약에 애를 낳아 가지고도 애가 깡패로 될 수도 있고 성군이 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가 있는 거기 때문에 오히려 더 미해질 수가 있다. 내가 한 소식 얻었다고 해도 어린애가, 갓난 어린애가 뭐를 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미해질 수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일을 돌아가면서 생활하면서 뭐든 처음에 공부할 땐 그 종문서를, 모든 걸 놓고 ‘아하! 이것이 바로, 성주의 뜻이 바로 나로구나. 여기에서 나오는구나.’ 하고서, 그때에 내가 홀연히 나왔다 하더라도 그 홀연히 나온 것을 다시 되집어넣고, 둘이 아니게 집어넣고 모든 것이 닥치는 대로, 또 체험하면서 돌아가면서 다시 보림을 하고 놔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은 그렇게 성장을 못해요.

여러분이 이렇게 공부하시려고 앨 쓰는 그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얘기를 하려면은 너무도 많아서 어떤 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요. 그러나 여러분이 들을 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받을 줄 알아야 하고 삼킬 줄 알아야 됩니다. 하나하나 삼키다 보면은 몽땅 나중엔 다 삼키게 돼요. 어떻게 한꺼번에 몰락 삼키겠어요?

살생하지 말라 하심은…
문) 우리 생명이 살아가는 것은 서로 먹고 먹히고 하는 먹이사슬의 관계에 의해서 자연이 보존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먹이사슬이 끊어지면은 자연이 파괴된다고 알고 있는데요, 엄밀히 말하면 식물도 생명이 있는 건데 불교에서 살생하지 말라 하심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요.

답) 좀 지혜롭고 풍부하게 생각하신다면 거기에서 다 나옵니다. 먹지도 말아야 하고 안 먹지도 말아야 하고. 그러니까 먹기도 해야 하고 안 먹기도 해야 하고. 양면이 다 있습니다, 거기에. 그러면 왜 그게 양면이 있어야 하느냐 하면요, 고기로 살던 건 잡아먹히지 않는다면 고기로만 살아야죠. 또 사람도 못나게 산다 하면은, 죽지 않는다 그러면은 못나게만 살아야 되죠. 그러니까 모든 게 화해서 돌아가는 이치가 있기 때문에 잘살고 못살고 잘나고 못나고, 이렇게 서로서로 바꿔 가면서 살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공부를 한 분들이 먹으면은 그게 화해서 딴 모습으로다 태어나게 되고 마음공부를 안 하고 그냥 그저 먹기 위해서만 하는 사람이 먹을 때는 그게 업이 된다 이런 말이죠. 살생의 업이 된다. 그건 왜냐하면 생각을 그렇게 남한테 이익하게 하질 않고 그냥 먹고만 싶어서 그냥 먹었으니까 그것이 자기 자식들한테도 해롭고 자기한테도 해롭다 이런 뜻이죠.

그러니깐 마음공부 한 분이 잡수시게 되면 그건 약이 되고 그 영혼은 다시 화하게 된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그냥 그렇게 저건 먹어야지 하는 생각으로만 잡숫는 분들은, 생각이 없이 잡숫는 분들은 그게, 얼른 쉽게 말해서 살생의 업이 된다 이런 말이죠. 생각을 잘하지 못해서 생기는 겁니다, 그게. 이 생각을 잘했다면은 저 생명하고도 나하고 생명은 둘이 아니죠. 사는 생명에 대해서는 둘이 아닌데, 그러면 둘이 아니면은 어째서 살생의 업이 되느냐. 둘이 아닌 까닭에 살생의 업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죠. 바로 사람으로 자기가 화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모든 문제가 한생각 하기에 달려 있다. 한생각 하기에 달려 있고 이 나라를 건설하는 것도 한생각에 달려 있고 짜부러지게 만드는 것도 한생각에 달려 있고. 모두 생각들을 조금만 비틀어지게 하면 비틀어지게 가는 겁니다. 그래서 남을 구하면서 이게 가는 것도 양면을 잘 딛고 갈 수 있게끔 해 줘야 될 텐데, 만약에 양면을 다 잘 딛고 가지 못한다면 문제가 생기죠. 그것이 지혜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더 극난을 받고 더 이상하게 쫓기고, 더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더 쫓기고, 또 지혜로운 사람은 쫓기지 않을 수도 있고, 또 지혜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좀 아주 머리가 정말 잘 돌아가서 그러는 분들은 잘 돌아가는 반면에 외려 더 반 이상이 밑진다 이런 소리죠. 그러니깐 그저 너무 잘 돌아가지도 말고 너무 못 돌아가지도 말고, 그저 평균하게 넘어지지 마시고, 그저 이 정신계의 나와 물질계의 내 모습과 둘이 아니게끔 항상 굴리시면서 관하시면서 가시면 해가 없습니다, 절대. 그러니까 그런 거 그렇게 걱정하고 살 필요는 없죠.

병고액난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요
문) 저는 요사이 탐·진·치로부터 내 자신을 단속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잠자기 전에 내 자신에 잘못된 것이 있나 살펴보고 걸리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서 축원을 하고 고 다음에 관을 하고 잠을 자고 그랬습니다. 이렇게 생활하는데도 만사가 여이하게 풀리질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모든 병고액난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답) 여러분을 보면 답답하게 사시는 현상이 비치는 게 많아요. 어느 사람이 법당에 올라가서 절을 삼배를 올리고 칠배를 올리고 팔정례를 올리고 이렇게 하는데 그거를 꼭 따라서 해야만 되느냐, 그렇지 않으면은 어떠한 마음에서는 일배를 하고도 팔배가 되느냐, 이러고 물었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바쁠 때는 삼배 올릴 거를 일배를 올리고 일어나도 그건 삼배가 되느니라.
그건 아무나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건 말이라는 건 한 사이가 없죠. 걸음을 걸어도 디딘 사이가 없고요. 그러니까 얼른 쉽게 말해서 바쁠 때는 일배를 올리되 삼배를 올리고, 또 이게 말씀을 잘 알아들으실지 모르겠네요. 법당에 와서 절을 일배를 올리고서 일배를 올렸는데 삼배가 되었습니다. 생각을 삼배로 하고 올리셨으면 삼배가 되죠, 급하면은. 지금 저 바깥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어 빨리 나가야 될 텐데 이거 절은 해야겠고, 그런데 삼배를 하려면 늦어서 안 돼요. 그러니까 일배를 삼배로 올린 거죠. 그러고 나가니깐 시간이 딱 맞아서 아주 그 사람도 이익을 보고 자기도 이익을 봤다는 소립니다. 때에 따라서는 급해서 그냥 허덕거릴 때도 있고 그러겠죠.

그러니깐 항상 이렇게 해도 그 값어치가 되고 저렇게 해도 그 값어치가 되게끔 생각을 느긋하게 그냥 하시고 하세요. 그렇게 정상적으로 그냥 그냥 요거를 요렇게만 해야 된다는 거는 없습니다. 요렇게만 해야 된다 이런 것도 없고요, 이건 이렇게만 해야 된다 이런 것도 없고요. 그냥 내 정성이, 마음의 정성이 지극해서 일배를, 삼배를 일배로 그냥 올려도 그게 정당히 맞아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깐 급할 때는 급할 때대로 피하고 괜찮을 때는 괜찮은 대로 그냥 느긋하게 운동하는 셈으로 하셔도 되고. 다 그렇게 모두 생각을 하고 편안하게 사세요. 그리고 관하는 거는 변소에 가서도 관할 수 있고요. 이게 더러운데 왜 변소에서 관하느냐 이렇게 하시는 양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마시고요.

그리고 이게 죄를 지었으면 이렇게 관해 준다 이러는 것도 그것도 더딘 생각입니다. 더딘 생각이니까 빠르게 생각을 하시고 뛰십시오. 어떤 땐 댁에서 더뎌서 못 이루어 가지고 이익을 못 보는 수가 많아요. 정말입니다. 그러니까 더디게 하지 마시고 그냥 그냥 단번에 그냥 해 버리시고 치워 버리시면 아주 그릇이 활짝 비죠. 비는 그릇에는 또 담을 수가 있어요. 그런데 굳이 그냥 많이 담아 놓은 그릇에는 새 것이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하는 소리는 항상 하루 한생각으로 다 치워 버리고 그릇을 비워라 이것입니다. 그릇이 비면은 뭐 길에 지나가다가도 무슨 저거 하면은 또 담을 수가 있고, 담아도 또 비우니까 그냥 넣으면은 비워지고 넣으면은 비워지고 하는 거죠. 그렇게 사세요. 그러면 사시기가 좀 빳빳했던 게 좀 누글누글해지지 않습니까.


그럭하시고 간단히 하세요. 피로하게 그렇게 하시면은 좀 몸에 지장도 올 수가 있고 그러니까요, 피로하게 그렇게 하지 마시고 아주 그냥 단번에 그냥 떼어 버리세요. 한마디로 한생각으로 그냥 떼어 버리시고 다 그냥 쓱싹해 버리세요, 그냥. 그렇게 하셔야지 그릇이 항상 빕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살기가 좀 편리하고요. 모두 여러분의 마음이 말입니다.

하기 싫다는 마음을 냈는데…
문) 생활 속에서 늘 마음을 살피면서 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묘한 게 있어요. 하기 싫다는 마음을 내면 꼭 그 일을 하게 되거든요. 제가 잘못하고 있는 것인지요.


답) 그건 누가 주고 뺏고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꼭 해야 되겠다 하는 것도 거기다 맡겨서, 즉 말하자면 운전을 할 때도 운전을 해야만이 바퀴가 돌아가지 운전대를 쥐고만 있어도 아니 되듯이 자기를 이끄는 운전수에게 맡겨라 이겁니다. 내 몸뚱이를 운전하는 운전수한테다 맡겨라. 맡기고 그대로 행하면 되는 거예요. 그것이 법입니다, 그냥.
그런데 사람에게는 악업 선업이 엄연히 몸뚱이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전자의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자기한테 주어지는 겁니다. 이런 공부 하는 것도, 이 세상을 다 내다보세요. 금은 금대로 모여 있고 무쇠는 무쇠대로 모여 있고, 넝마는 넝마대로 깡통은 깡통대로 모두가 돼 있듯이, 사람도 차원대로 그렇게 서로서로 만나게 돼 있죠. 그래, 금은 금대로 금 찾아서 가게 돼 있어요, 금방으로. 아무리 떨어지고 헤졌어도 금은 금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꼭 해야겠다, 하지 말아야겠다 이런다면은 각자 자기네 마음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내지 못하면은 계발이 되지 않고 발전이 되질 않아요. 마음을 내는 게 있어야만이 발전을 하기도 하고, 계발도 하고 창조력도 기르죠. 창조도 해내고. 이게 과학이에요. 이 생활 자체가 그대로 과학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뭐가 생각난다고 그걸 망상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어폐가 있어요. 생각이 자꾸자꾸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오는 것도 바로 자기의 수행력을 기르기 위해서 나오는 것뿐이에요.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걱정할 것 없어요. ‘네 몸 네가 이끌어 가는 거 알아서 이끌어 가라.’ 하고, 또는 네 마음이 그런 것도 네놈이 마음을 내게 했으니까 그대로 내는 거고, 또 하지 말아야겠다, 이거는 해서는 안 되겠다 하는 일은 자기가 자기를 또 다스리면서 나가야 되겠죠. 다스려서 놓고 해야죠. 이런 공부 하는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자기 몸뚱이로 모든 거를 실험하고 체험해서 공부하는 거니까. 화두를 잡아서 공부한다거나 경을 읽어서 공부한다거나 또는 선지식들이 간 뒷발자취를 따라간다거나 이래서 나를 발견하는 건 아니거든요. 못났든 잘났든 자기가 자기를 실험하면서 바로 바깥의 일들을 전부 알게 되는 거고, 안의 일을 모르면 바깥의 일도 모르게 되는 거죠. 주인 없는 집이 집입니까, 그게? 집이 망가지고 말지. 주인이 있어야 집이 망가지지 않고 잘 윤택하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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