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걸음 한걸음 무겁게 디디면서 진실되게 행해나가야

▲ 그림 최주현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정말 멋쟁이로 삽시다.
당당하고 떳떳하게 인간으로서 진실하게 산다면
무엇이 두려울 게 있습니까.
정말입니다.
자기 양심이 진실하다면 무엇이 두려울 게 있습니까.


(지난 호에 이어서)
그러니 여기서 밝게 켜는 그 장본인의 자가발전소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거지 딴 데서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지구의 주인은 여러분이고, 또 그 지구는 우리의 집입니다. 그 집과 주인과 둘이 아닌 까닭에 지구에서도 대기권이 있고, 나쁜 거는 레이더망이 막아서 이렇게 하고 있는 이런 문제들도 개발되어 알게 되고, 천문학으로써 그걸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죠. 인간에게도, 이 허공에 오고 가는 그 길에도 그저 모습 없는 모습, 생명들이 꽉 차 있어요. 그런데 우리의 내면세계에 그 많은 내 생명들, 내 모습, 내 의식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저항력을 가지고서 밀 건 밀고 당길 건 당기고 그래서 이것을 바로 정리하고 다니기 때문에 이렇게 사는 거죠. 자력이 있기 때문에 이 발바닥이 이 땅에 붙고요. 붙어서 걸어 다닐 수가 있고요. 그러니까 네 가지의 그 재료는, 어저께도 얘기했죠? 광력이나 전력, 자력, 통신력이 우리한테는 그것이 적게 쓰이든지 많이 쓰이든지 그게 재료라고요. 그 네 가지를 끌 수 있고 내놓을 수 있는 그 자력의 재료를 그냥 여기 모두 가지고 있다 이겁니다.

여러 가지로 이렇게 두서없이 말은 했지만 여러분이 살림살이도 두서없이, 체계 없이 체계를 세우면서 살아나가는 것이 여러분의 실상이며 살림살입니다. 금방 가만히 앉았다가도 금방 얘기를 듣고선 뛰어나가야 하는 이런 그 체계 없는 살림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정연하게 체계가 서 있는 이 살림살이.
그래서 도둑이 말입니다, 지키는 사람, 물건 가지고 싣고 가는 사람, 훔치는 사람 이게 다 도둑놈으로 몰려 가지곤 전부 붙잡혀 가더군요. 그러니 계 준 사람이나 계 받은 사람이나, 허허허, 그 뜻을 바로 설하는 그 법설! 그것이 한데 떨어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장땡입니다. 그러나 학설로 이론적으로 방편으로만 하는 이 오계 설법은 한데로 떨어져서 땅에 떨어진다 이겁니다. 우리가 마음의 도리를 공부하지 않으면 절대로 그런 공덕이 될 수가 없는 거죠.

여북하면 달마 대사가 양 무제더러 공덕이 하나도 없다고 해 놓고는 그냥 약사발을 받았겠습니까. 세상에 나를 죽일 거 같으면 벌써 알고 있을 텐데도 거짓말을 못해서 그대로 말을 해 가지곤 약사발을 받은 거 아닙니까? 달마 대사는 죽을 거를 생각하면서도 그 약사발을 받은 거, ‘나는 온 곳이 없기 때문에 갈 곳이 없다.’ 즉, 살았다는 언어가 붙지 않기 때문에 죽었다는 언어도 붙지 않는다 이 소립니다. 달마 대사는 그거를 증명하기 위해서 약사발을 안겨서 죽여서 갖다 묻은 자리에 신발 한 짝을 남겨 놨습니다. 그리고 자기 주장자에 신발 한 짝을 꿰어서 어깨에 짊어진 채 바로 그 사신한테 보였습니다. 양 무제가 심부름시킨 사신한테 자기의 모습을 그대로 보였던 겁니다. 그건 왜냐하면, 산 것도 없고 죽은 것도 없고 항상 밝고 항상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해서 보이느라고 말입니다. 공덕이라는 것은 이게 공덕이지 너희가 그렇게 살고 너희가 그렇게 욕심내고 너희가 그렇게 차지하려고 하는 그것은 공덕이 못 된다고 죽어서도 가르치곤 했죠. 얼마나 멋쟁이입니까. 그래서 그 멋쟁이를 비유해서 낚싯밥으로써 공부하는 학인들한테 던졌던 거죠. “달마 대사가 중국에 온 까닭이 무엇이냐?” 하고 말입니다. “달마 대사는 왜 턱에 수염이 없느냐?” 뭐 별것 다 붙인 거죠. 그 멋쟁이한테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정말 멋쟁이로 삽시다. 우리가 당당하고 떳떳하게 인간으로서 진실하다면 무엇이 두려울 게 있습니까? 정말입니다. 자기 양심이 진실하다면 무엇이 두려울 게 있습니까? 죽인대도 두려울 게 없고 살린대도 뭐, 좋을 것이 없고 항상 중심을 가지고, 평등을 가지고 항상 두루 하면서 굴리면서 자기라는 걸 쑤욱 빼 버리고…. 왜냐하면 여러분이 전부 나 아님이 없고 둘이 아닌데….
아니, 엊그저께도 얘기했죠. 여러분은 한 몸의 이름이 엄마도 되고 또는 며느리도 되고 딸도 되고 또는 아내도 되고 그렇기 때문에 그 이름이 많을 뿐이지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이름이 그렇게 많을 뿐이니, 그 이름에다가 믿음을 갖지 말라 이겁니다. 그러니 요기 놓고 요기 놓고 요기 놓고 저기 놓고 그 이름에다가 놓고 빌면서 여러분은 기복을 하고 있다 이 소립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 분의 이름이 엄마라는 이름이 있는가 하면 바로 아내라는 이름이 있고 딸이라는 이름이 있고 며느리라는 이름이 있고 형제라는 이름이 쭈욱 이렇게 있으면 따로따로 너희는 믿어라 그럴 겁니까? 부처님도 그 뜻을 가르치느라고 문수를 해 놓고 보현을 해 놨는데도 그 뜻을 모르는 사람은 그냥 보현은 보현대로 문수는 문수대로, 관세음보살은 관세음대로 따로따로 있는 줄 알고, 아미타는 아미타대로 미륵은 미륵대로 따로따로 있는 줄 알아요. 이걸 어떡합니까?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해야, 수십 년을 가도 아니 된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끝간 데 없이, 죽고 살고도 없이 언제든, 이 몸을 벗더라도, 안 벗더라도 그냥 끝간 데 없이 그냥 여러분과 같이 지내렵니다 하는 것도, 바로 나의 그냥, 그대로 그냥 가는 길입니다. 나그네의 길이 그런 길이지 뭐, 다른 겁니까? 가다 가다 여러분 만나면 둘이 아닌 까닭에 같이 웃게 되면 같이 웃고 울게 되면 같이 울고 아프면 같이 아프고 이렇게 가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진실되게, 한마디 한마디 할 줄 모르는 말 하더라도 진실되게 알아들으시고, 여러분도 이론으로만 알 양으로 빠득하게 잘났다고 그렇게 하지 마시고, 진실되게 그 행을 하는 데에 역점을 두셔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에 화목과 행복이 깃들기를 바라지, 그래야만이 내가 기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 이름을 따라서 쫓아다니면서 기복으로 하지 마시고 좀 여러분의 마음도 당당하게 떳떳하게 무겁게 두시고 한 걸음 한 걸음 무겁게 디디면서 진실되게 나가신다면 이게 바로 불교입니다.
그렇게 그냥 쌉쌉하고 얍삽하고 이론이고 그렇게 빌고 그러는 게 불교가 아닙니다. 여러분, 그렇게 생각한다면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 부처님이 되기 이전에도 그렇게 했고, 그래서 부처님은 석가라는 인가를 받고 이 세상에 나와서 49년을 설했고 한 명이든지 두 명이든지, 한 명이 없어도, 그 보이지 않는 중생들을 놓고도 항상 설하셨단 말입니다. 잘 때도 설하고 앉아서도 설하고 서서도 설하고, 갈 때도 설하고 똥 눌 때도 설하고 먹을 때도 설하고, 일분일초도 틈을 안 주고 설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입선이요 와선이요 묵선이요 또는 좌선이요 행선이요, 이런 것이 그대로 한데 합쳐서 참선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저것 이름을 따라서 좇아다니면서 노예가 되지 마시고 참여러분의 그 주장자를 세우고, 주장자가 없다면, 예전에 임제 스님께서 “너희들이 주장자가 없다면 내가 너희들의 주장자를 뺏을 것이로되, 너희들이 주장자가 있다면 내 주장자를 너희들한테 줄 것이니라. 만약에 너희 집이 주장자가 비었다면, 주인이 없다면 그 속에서 거미나 모든 벌레들이 전부 그냥 거미줄을 치고 곰팡이가 나고, 빈집이기 때문에 그냥 털구멍으로 드나들면서, 그렇게 만 중생들이 드나들어도, 코를 통해서 드나들고 구멍 뚫린 데마다 드나들어서 그렇게 집을 망가뜨려도 너희들은 어느 뭐가 들어왔는지 그것도 모르느니라.” 집이 비었으니까 썩어 들어가도 모르고 쓰러져도 모르지. 여러분의 병고라는 것이 바로 그런 뜻에서도 아마 그게 해당됩니다.
오늘 그러면 내가 말하는 건 끝마치고 여러분의 질문을 한 분 한 분 받겠습니다. 하고 싶은 분들 있으면, 오늘 들은 거, 여러분이 책 보시고 카세트를 들으시고 이래서 의문나는 점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사회자: 여러분, 질문 있으시면 오늘 큰스님께 질문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이크가 그쪽에 있으니까 가운데 오셔서 말씀하시면 큰스님께서 아주 명쾌한 대답을 여러분에게 주시겠습니다.

질문자1(남): 저의 이름은 OO이라고 하는데요, 이렇게 먼 길을 오시고 좋은 법문을 주시고 스님은 멀리 계시지만 제가 저를 찾는 데 좋은 안내자가 항상 되어 주시니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드리고자 하는 질문은 스님께서는 신통력을 많이 사용하신다고 그러는데, 앉은뱅이를 고쳐 주시고, 돈을 좀 벌게 해 주시고, 그리고 스님 말씀하시기는 그 신통력이 자기 주인공을 찾아가게 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데, 다른 면으로 볼 때는 그 신통력을 사용하시는 스님 자신이 어떤 기복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위험의 소지가 있지 않은지 그 점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큰스님: 여러분한테 나는 신통력이 있다고 하지도 않았고 또 신통력을 부린 예도 없습니다. 단 하나 있다면 길잡이로서, 때에 따라서 급하면 여러분이 주인공을 그렇게 믿고 애원을 할 때, 날더러 그렇게 길잡이로서 가르쳐 달라고 와서 얘기를 해 줬을 때 나도 책임이 있고 여러분도 책임이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길잡이로서 그 마음을, 그 주인공을 한 찰나에 믿고 진실하게 거기다 애원했을 때에, 나도 거기 같이, 둘이 아닌 까닭에 내가 바로 여러분이 되는 거 아닙니까? 그 순간에는 내가 되는 겁니다, 그게. 그러니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며 마음은 전달함이 없이 전달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 전기를 올리면 가는 사이 없이 저기서 불이 켜지듯이, 전력을 우리가 마음대로 크면 큰 대로 끌어 쓰듯이, 작은 모터를 돌릴 때 작은 전력이 올 것이고 큰 모터를 돌릴 때는 큰 전력이 올 것입니다. 그 큰 모터만 해 놨다면 큰 전력이 올 것이고 작은 모터를 달아 놨다면 더 큰 전력을 끌어 쓸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작은 모터대로 전력을 쓰겠죠.

그렇듯이 여러분이 어떠한 용도에 따라서라도 자기 주인공을 진실히 믿고 할 때 ‘스님! 감사합니다.’라는 거를 생각하면서 그 길잡이 생각도 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건 하게 됩니다. 그러니 거기 바로 자기가 되는 건데, 내가 무슨 신통력이 있소? 신통력이 있으면 자기네들이 있겠지. 그거를 바로, 신통력을 당신네들이 생활에서 씀씀이를 가지라고, 굴리라고, 바로 그것으로써 당당하게 일어나라고…. 반야심경에도 있듯이, 그 여러분의 주문은 바로 자기 찾는 데의 주문이다 이거야. 아, 그래서 자기가, 바로 내가 자기가 되는 건데, 순간에. 그런데 둘이라야 뭐, 신통력을 이쪽으로 주고 저쪽으로 주는 거지, 자기가 그냥 하는데 무슨 신통력이 거기 붙고 안 붙고가 어디 있나? 신통력이라는 언어도 붙지 않는 거라고. 응? 그러면서도 언어도 붙지 않고 가고 옴도 없고 전달함도 없이 그대로 여여하게 당당한 것은 바로 이 도법이라.
그래서 나는 여러분의 주인공만이 여러분을 끌고 갈 수 있다고 이날까지, 지금까지 얘기를 했어도 그거 못 알아듣나요? 허허허. 나는 여러분의 길잡이라고 그렇게 해도, 그리고 또 내가 여러분을 생각할 때 둘이 아닌 까닭에 항상 나라는 거를 빼고 살라고 그렇게 했지 않습니까? 공했다고. 여러분이 병이 났다고 할 때에 “스님! 나는 지금 애가 이렇게 아픕니다.” 할 때, 그러면 이것저것 여러분이 다 그렇게 말을 할 때 내가 어떤 것이, 어떤 분이 될 때에 나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난 없습니다.

그래서 역대의 선사들이 ‘무(無)!’ 했던 겁니다. 너무 많이 찰나찰나 그냥 돌면서 빛보다 더 빨리 돌아가는데 거기에 뭐라고 말을 해서 붙이겠습니까? 네? 그러니 ‘무’ 했던 거죠. 그리고 아무 소리 없이 손 하나 번쩍 들었던 겁니다. 말없이 하나는 (왼손 엄지와 검지를 붙여보이시며) 이렇게 했고 하나는 (왼손 검지를 펴 들어 보이시며) 번쩍 들었어요. 자기 발로 그 땅을 디뎠고, 바로 자기 손으로 (왼손 검지를 펴 들어 보이시며) 지붕을 받치고, 손으로 이 세상을 (왼손 엄지와 중지를 붙여 보이시며) 굴렸다 이 소립니다. 그랬는데, 말도 없었는데 무엇으로 부처님은 신통력이 있고 또 스님도 신통력이 있고 그렇다고 누가 말을 했던가요? 그렇게 광대무변하고 이 우주 천하를 그냥 한숨에 요리를 해서 탁 탕! 그 근기대로 먹여 주셨는데. 그릇대로 담아 줬단 말입니다.
내가 엊그저께 그러지 않았습니까? 저 바다의 물이 수증기로 해서, 즉 말하자면 비가 오면 골짜기 물이 돼서, 도랑물이 돼 가지고 바다로 흘러서, 그 바다로 흐르는 물은 핏물, 고름물, 구정물, 맑은 물 할 거 없이 모두가 다 바다로 모여서 그것이 수증기가 돼서 다시 비가 올 때, 독사가 그 빗물을 먹으면 독사가 되는 것이고 풀이 먹으면 풀인 것이고 또 초목들이 먹으면 초목인 것이고 사람이 먹으면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 그 빗물은 똑같지만 먹는 데 따라서 달라진다 이 소립니다. 그렇게 그릇대로 먹여 주는데, 적셔 주고 먹여 주는데 뭘 어떻게 ‘내가 신통력이 있다.’ 그럴 수 있나요? 저 태양이 지금, 내가 이렇게 신통력이 있다 이러던가요? 오히려 신통력이 있고 신통력이 없고 간에 당당하고 떳떳한 사람은 신통력이 있다 없다 그 언어가 붙지 않아요.

그리고 어저께도 얘기했죠. 예를 들어서 얘기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그렇거니와 역대 조사들도 그렇고 나 역시 그렇다 이럴 때, 만약에 달마 대사가 사람들 사는 데에 큰 구렁이가 나와서 서리고 있으니 그걸 멀리 끌어다 놔야겠으니까,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그냥 달마 대사가 구렁이가 됐던 겁니다. 잠시 잠깐 구렁이가 돼 가지곤 구렁이를 끌고 저 멀리 갖다가 던져 놓고선 다시 그 옷을 벗고 나와 가지곤 자기 옷 속에 들어가려고 하니까 아, 자기 옷을 누가 입고 갔더랍니다. 입고 간 놈은 누구고 또 뺏긴 놈은 누구겠습니까? 그건 여러분의 공부를 시키느라고 그렇게 말을 한 겁니다. 나툼! 즉 말하자면 옷을 벗고 입고 하는 나툼을, 이게 둘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건 방편을 쓴 거지, 달마 대사가 어디가 모자라서 옷을 뺏깁니까? 허허허…. 아이구, 참 내! 그걸 믿습니까? 그러니까 앉아서도 달마 대사가 수천수만이 될 수 있는데, 그리고 하나로도 될 수 있고 없을 수도 있는데 어째서 옷을 뺏깁니까? 도둑놈이 자기 옷을 입고 갔대요. 그러는데 옷을 입고 간 놈도 그놈이지만 그 뺏긴 놈도 그놈이죠. 달마 대사예요. 여러분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런 방편을 썼던 거죠.

그래서 “중국에 온 까닭이 무엇이냐?” 할 때 우리가 저 높은 계단을, 우리 지금 집에 계단 올라오지 않습니까? 그러면 계단에 올라온 까닭이 뭐냐고 여러분한테 물으면 뭐라고 그러시겠습니까? “이 계단에 올라오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이런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네? 내려가는 까닭과 올라오는 까닭이 둘이 아니었던 까닭에 나는 그냥 내려가고 올라오고 하는 사람이니까 말없이 발로 퉁퉁 굴렀대요, 옛날에. 이런 말까지 해 줘서 잘못될는지 또 모르죠. 여러분이 또 알지도 못하고 이론으로만 알아 가지곤 그냥…. 그러니 여러분 그 마음, 적은 데서부터, 여러분이 사는 데 생활 속에서 그 뜻을 잘 알아보세요. 동쪽 서쪽이 둘입니까? 한국에 가니까 동쪽이 이쪽이고 서쪽이 저쪽이던데 여기 와 보니까 동쪽이 또 어딥니까? 하하하….

그러니까 ‘동쪽도 서쪽도 둘이 아니며 여자 남자도 둘이 아니니라. 높은 산 얕은 산도 둘이 아니요, 봄 가을도 둘이 아니니라. 모두가 둘이 아닌 까닭에 모두 같이, 근본은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도 마저 없느니라.’ 이 뜻을, 깊은 뜻을 잘 아시려면 그 작업부터 하십시오. 여러분의 주인공, 그 허공과 같은 주인공의 그 그릇은 비어서 항상 넣어도 그냥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용광로에서 다시 생산이 돼서 쓱쓱 자동적으로 나오니까 그 작업부터 하십시오. 그러면 아마, 또 자가발전소도 되겠죠.
그러면 질문 또 하실 게 있습니까? 내가 너무 혼자만 말을 해 가지고…. 왜 나만 말을 하게 합니까? 다 똑같은 사람, 코 달리고 눈 달리고 그랬는데 말입니다. (잠시 후) 그만 하라고? 허허허.
그래, 여기 스님네들도 여러분을 이끌어 줄 수 있는 길잡이로서는 훌륭한 스님네들입니다. 이론으로서 학술적으로서 거짓되게 사는 중들 백 개를 갖다 놔도, 천 개를 갖다 놔도 하나하고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사랑하면서, 또 우리가 생활로서 따진다면 내 동생 같고 내 아들 같고 내 딸 같고 이렇게, 아주 자비한 넓은 마음으로서 항상, 내 언니 같고 또 내 형 같고, 모든 게 이렇게 돌아간다면 얼마나 화목하겠습니까? 높이 올린다면 또 둘이 되고 거북하고, 너무 내린다면 또 거북하고 또 안 되고, 항상 같이 이렇게, 진실하게 이렇게 가야만이 우리가 공부하는 데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이걸로써 마치겠습니다. 그러니 요다음에 이월 그믐께나, 삼월달에나 또다시 오게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그때에 만날 때까지 여기서 이 스님네들의 인도를 받아 가면서 공부 열심히 하십시오. 여기는 충전될 전력이, 광력이, 자력이 풍부합니다. 감사합니다.

※위 법문은 1990년 12월 9일 국외지원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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