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보살이 상주하는 북한산 이야기-7. 의상봉

원효가 당에 있는 의상 위해 마련
의상 삼매 들어 당에서 건너와


의상봉은 해발 502m로 고양시 덕양구에 속한다. 의상대사가 머물렀던 곳이라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성능대사의 〈북한지〉에는 의상봉이라는 이름이 별도로 기록되어 있지 않고 용출봉 서쪽에 있다는 미륵봉이 의상봉임을 나타내고 있어, 미륵봉과 의상봉이라는 이름이 혼용된 것으로 보인다. 의상봉 아래에 있는 국녕사에서 의상대사가 참선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국녕사는 북한산성 축성 후 총 86칸에 이르는 큰 규모의 승영사찰로 창건되었는데 사찰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사명당 유정이 수도를 하던 터로 추정된다. 창건 후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1991년 화재로 모두 불에 탄 것을 능인선원에서 중창하였다.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의상봉과 원효봉은 신라의 두 고승이며 우리나라 불교의 커다란 맥인 원효와 의상을 상징하는 매우 유서 깊은 곳이다. 원효가 당나라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온 의상을 불러 의상봉에 안내하고 자신은 원효봉에 올라 서로 바라보며 참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오늘처럼 맑은 바람이 부는 밤이면 의상 스님은 삼매에 들곤 했다. 마당의 댓잎을 흔드는 바람 소리를 듣고 있자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깊은 선정을 할 수 있었다. 이 시간만큼은 신라로 돌아가 타국 생활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위로 받을 수 있었다.
당에서 공부를 시작한 지 어느덧 오 년 여의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신라가 생각나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의상 스님은 선정에 들어 고향을 다녀오고, 황복사에 들러 은사스님 안녕하신가를 보고, 그리운 이들의 안부를 차례로 확인하곤 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그토록 보고픈 원효 스님만은 만날 수 없었다. 아무리 정신을 집중하여 몰입을 하여도 원효스님이 계신 곳은 커녕 그의 모습조차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그리움은 커져만 갔다. 오늘은 원효 스님을 뵐 수 있을까.
의상 스님은 읽고 있던 경전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물로 얼굴을 씻은 다음 조용히 앉아 명상에 잠겼다. 잠깐 사이 깊은 삼매에 들어간 그는 오늘, 원효스님을 뵙지 않고는 회향하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을 다졌다. 어느 순간, 바람이 멎고 사방이 고요해지더니 별 하나가 반짝했다 싶었는데 꿈결처럼 원효 스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의상, 의상, 이제 그만 하시고 이리로 오시게. 이제 때가 된 것 같소’
의상은 반갑고 놀라운 마음에 서둘러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갔다. 익숙한 산과 들을 지나 목소리를 따라 도착한 곳은 북한산 봉우리였다.
동이 트려면 먼 시간인데 누군가 봉우리를 손질하고 있었다. 별보다 반짝이는 눈빛하며, 큼직큼직한 손놀림을 보아하니 원효스님이 틀림없었다. 의상은 가까이 다가가 원효 스님을 바라보았다. 원효스님은 이마에 흐르는 땀도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무언가에 열중해 있었다. 그는 봉우리 둘레를 걸으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살피고 있었다. 행여 밤사이 산짐승이 머물다 갔는지, 그래서 깨끗지 못한 흔적이라도 남겼는지, 봉우리 어느 한 귀퉁이라도 바람에 쓸려 떨어져 나갔는지. 그 손길에서 오래된 정성과 세심함이 느껴졌다. 원효 스님은 봉우리위에 함부로 흩어져 있는 나뭇가지며 풀뿌리를 손바닥으로 쓸어 내고는 의상을 향해 앉았다.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이 온 산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어서 오시게, 의상.”
“스님, 원효 스님! 참으로 뵙고 싶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스님을 찾았는지요. 어찌하여 이제야 모습을 보이십니까.”
“허허, 나는 쭉 스님 곁에 있었는걸요. 행여 스님의 공부에 방해가 될까하여 조심한 것 뿐이지요. 오늘 그대의 소식을 들었소. 당나라에선 스님을 일컬어 ’해동의 큰 나무‘라 한다지요. 스승이신 지엄 스님조차 ‘그 나무가 얼마나 큰 지 나뭇가지가 신라를 덮고 당나라도 덮을 것’ 이라고 그대를 칭송한다하니 이 얼마나 큰 기쁨이오. 하여, 내가 오늘 그대를 부른 것이오. 부디 더욱 정진하시어 이 나라에 부처님 법이 두루 펼쳐질 수 있도록 해주시오. 신라의 별이 되어 주시오. 내 그대를 위해 이 봉우리를 마련했소.”
원효스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달리 표현할 수 없었던 의상은 한동안 깊은 숨을 쉬어야 했다.
“스님, 이렇게 훌륭한 수행 처를 만들어 제가 공부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니, 비록 이역만리 떨어진 곳에 있더라도 제가 어찌 공부를 게을리 하겠습니까. 저를 위해 보살펴 주신 이 봉우리에 앉아 정진 또 정진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스님.’
바람이 부드럽게 의상의 얼굴을 훑고는 원효 쪽을 향해 지나가고, 어둠을 밀어내며 첫 새벽이 시작되고 있었다.
산 밑의 사람들 중 누구도 이 봉우리에서 참선하는 의상을 본 사람은 없었다. 다만 산짐승들은 알고 있었다. 당나라에 있는 의상이 높은 법력으로 삼매에 들면 몸을 자유로이 움직여 이 봉우리를 찾아와 원효 스님과 법담을 주고받았다는 것을. 이를 지켜 본 산짐승들 사이에서 이 봉우리는 의상봉이라 불렸고, 세월이 흘러 어느새 사람들도 이곳을 의상봉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신라 ‘화엄종’의 창시자로서 제자 양성에 힘을 기울이고 전국에 수많은 사찰을 세워 신라불교의 번성을 이끈 의상. 그는 원효와 함께 신라 불교의 큰 별이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