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최주현

마음의 용광로에다 모든 것을 맡겨놓으세요
벽을 치면 봇장이 울리듯이
나는 업이 많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고가 많다고 생각지도 말고
죄가 많아서 이렇다는 생각도 말고
모든 것을 용광로에 집어넣듯 다 놔버리세요.

한마음의 눈빛이, 서로서로를 왕래할 수 있는 자리가 돼서 참 감사합니다. 엊그저께 오며 가며 텔레비전을 보니까 요즘뿐만은 아니겠지만 장애자들이 많이 난다고 합니다. 장애자들이 나오는 것에 대해 우리가 꼭 알아둬야 할 일이 있다고 봅니다.
항상 말씀드리기를 내 내면의 용광로에다가 모든 것을 맡겨놔라 이랬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 있기 때문에 현실에 그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 나온 것이니까 제자리에다 돌려놓으면은 바로 과거에 입력된 게 없어집니다. 그런데 과거에 입력된 그 자체가 그대로 팔자 운명으로 나온다면, 십중팔구 그런 문제들이 대두될 겁니다. 그것뿐만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마음 장난이다. 살아온 관습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생활 자체가 모두 마음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마음의 용광로에다 되돌려 놓는다면 자연적으로 자동적으로 다시 생산이 돼서 나가는 거는 정한 이치다 이겁니다. 인과의 유전성이라든가 업보성이라든가 세균성, 영계성 이 문제도 모두가 다 거기에서 발생되는 것이니까, 어떠한 일이 있어도 모든 것은 거기에다 되돌려 놔야만이 그 문제들이 다 해결되고, 앞서의 입력된 게 다 해결되기 때문에 현실에 생각하는 대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의학적으로 볼 때에도 그렇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두가 ‘어디서 잘못됐느냐? ’ 하고들 야단들이지만은 그것은 바로 한 군데서, 즉 말하자면 가던 길에서 엎드러졌기 때문에 허공을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그것은 일어설 수가 없다. 단 엎드러진 그 자리에서 그 땅을 짚고 일어날 수 있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젊은 사람들이나 또 자라나는 새싹들이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이것은 해결이 돼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장애자들이 외국으로도 가게 되고 또는 한국에서도 대치할 수가 없어서 애를 쓰고 그러는 거를 볼 때, 이것이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돼서 이렇게 됐는지 그거를 알아야 그렇게 안되도록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창창하게 살아나갈 분들도 계시겠지만 연세가 들어서 노인네다 할지라도 지금 모습이 노인네지 마음이 노인네가 아닙니다. 어린애고 어른이고, 젊었고 늙었고 간에 마음은 그대로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옷을 벗고 또 다시 나올 때에 그 문제가 대두되기 때문에 여하간에 모든 것은 우리가 세상에 나왔으면은 이름 그대로 만물의 영장이라는 소리를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실천이 없이 이론으로만 알고, 학설로만 알고, 지식으로만 알고 무슨 공자, 맹자 소리나 해서 그게 되는 게 아닙니다. 팔만대장경을 외로 꿰고 바로 꿴다 하더라도 한 번 실천만은 못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실천궁행하는 것을 가르쳤지 말을 배우라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이 도리를 알아야 하겠기에 그냥 갈 수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냥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왠 줄 아십니까? 자기가 뿌려놓은 자식들도, 자기가 또 뼈와 살을 빌려서 난 부모들도, 역시 그 은혜를 백분지일이라도 천분지일이라도 갚으려면 이 도리를 알아야만 합니다. 이 모두가 한 번 한 생각 잘못해서 장애자가 나온다 한다면, 그것은 장애자뿐만 아니라 그 가정의 식구들도 전부 장애자가 되는 것입니다. 육신장애자보다도 정신장애자가 모두 생깁니다. 그러고도 장애자가 났으면 부모가 기르다가, 부모가 죽으면 누가 맡습니까? 그리고 또 장애자를 낳으면 모두 갖다 버린다고 합니다. 버리면 그 모습만 갖다 버렸을 뿐이지 그 인과의 유전은 절대로 버려지지가 않습니다. 그 대에 그렇게 됐으면 또 그 다음 대가 있고, 2대가 아니면 6대, 7대 이렇게 해서 빨리 나오는 게 있고, 더디 나오는 게 있고 이럴 뿐이지 그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도 그런 아이들이 더러더러 옵니다마는 많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딨느냐 하면 과거에 인과로서의 유전이 된 그 자체가 바로 녹아지기 때문입니다. 이 모두를 생각할 때 하나하나가 장애자 낳는 것뿐만 아닙니다. 그래서 왜 태교가 중요하다고 하는지 아십니까? 모두들 잘 아시겠죠. 이론으로는 저보다도 더 잘 아실 겁니다.
하지만 생활 자체가 모두 바로 내 마음먹기에 달렸다. 애고도 내 마음먹기에 달렸다. 병고도 내 마음먹기에 달렸다. 이 마음먹기에 달렸다가 한두 건 입니까, 어디? 그러니 이 한두 건이 아닌 찰나찰나에 용도가 바뀌면서 나투어서 다가오는 그 모두를 어떻게 타파를 하고 어떻게 해결을 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것 저것 나눌 게 아니죠. 이거는 못하고 하고 이렇게 나눌 게 아니라, 다가오는 모든 것은 바로 불바퀴에다 놓으면은 그냥 타버리게끔 할 수 있는 그런 문제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불바퀴라고 하니깐 그것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아서 숙명통(宿命通), 즉 컴퓨터라고 했습니다. 자동적인 컴퓨터 말입니다. 지금은 더 잘 아시겠죠. 거기다 입력을 하면은 입력한 대로 꺼내서 쓸 수 있고, 입력한 대로 나옵니다. 그러니깐 그렇게 비유해서 얘기한 겁니다. 지금 현실에 나오는 것은 좋든지 나쁘든지 다 입력돼서 나오는 것이니까 입력돼서 나오는 그 자리에다 다시 돌려놓는 그러한 작업을 하는 것만이 우리가 철두철미하게 인생의 자유를 맛볼 수 있는 길입니다.
여러분한테 누누이 수없이 그런 얘기를 반복했습니다. 백 번을 반복해도 그것이 납득이 되지 않는 사람이 있고, 가슴에 와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딴 사람은 닿는데 왜 자기는 닿지 않을까? 그것이 바로 과거의 업이 두꺼워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업 자체가 있다는 생각도 거기다가 모든 걸 놔버려서 아주 말갛게 물리가 터져야 됩니다. ‘나는 업이 많아서 나는 죄가 많아서 이렇게 안될 거야. 나는 힘이 없어.’ 이런 마음조차도 거기다가 되돌려 놓는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몸으로써 지수화풍을 먹고 살며 지수화풍 속에서 그 광력이나 전력ㆍ자력ㆍ통신력에 의해서 우리는 전부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뿐입니까? 이 공기 속에서 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공기주머니에서 살고 있습니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살 듯이 말입니다. 물 바깥을 벗어나면 고기도 죽어요. 그렇듯이 사람도 역시 이 범위 내에서 내 내면세계에서 벗어나면은 이탈이 된 것이고 고기가 물 바깥에 나온 거나 진배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죽겠네 살겠네 하고 야단법석이 나는 거죠. 물이 작으면 작은 대로, 또 물이 아주 없어지면 없는 대로 죽는 거고 그러니 사람과 이 고기가 모두 뭐가 다르겠습니까? 살아나가는 방도에 있어서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들이 자기를 이끌어가면서 자재하면서 모든 거를 감사하게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일단 생명이 유지되니 감사해야 하고, 먹지 못하면 죽으니깐 감사해야 하고, 먹으려니 불이 있어야 하니깐 감사하고, 하하하. 또 땅을 걸어다니고 심어 먹어야 하니까 감사하고 또는 독불장군이 없이 서로 공생(共生)하고 공용(共用)하니까, 공식(共食)하니까 감사해야 하고 ,그리고 부모가 길러줬으니까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게 뭐냐 하면, 한데 합친 자체가 바로 이름해서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따로 있고 생활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종교는 그대로 생활입니다. 도(道)도 생활이요, 바로 부처도 생활이요,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 어떤 것을 나누어서 이것이 부처님 법이고 이것은 부처님 법이 아니다라고 하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다 놓으셔야 됩니다.
아침마다 자식이나 남편을 다 제쳐놓고 그냥 염불을 해야만이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염불을 할 때는 이 지구가 돌아가고 염불을 안 할 때는 안 돌아가는 게 아닙니다. 염주가 왜 생긴 줄 아십니까? 여러분은 염주를 목에 걸고 손에 들고만 다녔지 그 염주가 쉴 사이 없이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간다는 거를 모르고 있습니다. 염주를 돌렸다 놨다, 돌렸다 놨다 한다면 그거는 시공이 끊어지는 거죠. 그러니까 염주를 내 내면 속에 넣고 항상 우리가 생활할 때 나투면서 한 발 딛고 한 발 들고, 한 발 딛고 한 발 들고 하는 것이 그대로 염주를 돌리는 겁니다. 생활 그 자체가 그대로 진리인 까닭에 그것이 도며, 그것이 참선이며 모든 것에 어긋나지 않는 여여함입니다. 그런데 생활을 제쳐놓고 부처님 앞에, 불당에 가야만 부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사대 성인들이 모두 이런 말을 했죠. 너부터 알라고요. 네가 태초요, 네가 바로 부처요, 네가 있으니깐 이 자체가 모두 생긴 것이다. 세상이 벌어진 것도 너로 인해서 벌어졌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여러분, 각자 여러분 한 분이 안 계시다면 모두가 없는 것입니다. 그 뜻을 잘 들으셔야 될 겁니다. 왜냐하면 아, 내가 죽어도 뭐 세상은 다 있고 사람들은 다 있는데 뭐,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그게 아닙니다. 영원한 자체를 알려면 나부터 알아야 영원한 이 길을 상세히 아실 겁니다. 이 길이라 함은 시발점과 종점이 둘이 아닌 까닭에 그대로 여여함이 돼서 여래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을 여러분이 잘 알아들으셔서 벽을 치면 봇장이 울리듯이 나는 업이 많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고(苦)가 많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나는 죄가 있어서 이렇다는 생각도 말고 모든 것을 용광로에다가 넣듯이 다 놓으십시오. 그러면 그 용광로에 놔지면은 어떻게 되느냐? 금은 금대로 생산이 돼서 나갈 것이요, 은은 은대로 생산이 돼서 나갈 것이요, 차원대로 자기가 짓는 대로 그것이 생산이 돼서 나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모든 것을 다 한꺼번에 나온 자리에다가 되돌려 놓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금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질문을 받겠습니다. 오늘은 질문을 많이 받기 위해서 잠깐 했습니다.

질문자1(남): 마음공부를 해나가면서 걸리는 대목이 있어서 큰스님께 질문드립니다. 대구 성서국민학교의 다섯 어린이 실종 사건이 발생한 지 벌써 일 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누가 죽어도 꿈에 나타난다든지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이 되어 알 수 있다고 하지요. 그들의 전생은 어떠한 인연이 있었는지 몰라도 인생은 부모와 자식의 인연으로 만난 질기디 질긴 인연줄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모의 안타까운 심정을 우리들이 만분의 일이라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사회적으로 이 여론이 보도되어 모든 국민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돌아오길 바라고 있으나 많은 세월이 흘러가버린 채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국민들이 한마음을 내었지요. 그중에는 저와 같이 한마음 공부를 하는 사람도 있겠고 불법과 인연이 닿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천만 이상의 사람들이 마음을 내었다고 보는데 공부를 한 자나 인연 없는 중생들 역시 모두가 한마음이라고 했는데, 어째서 이들의 소식은 없는지요.

큰스님: 이런 게 있죠. 과거에 판사가 판결을 냈습니다. 판결을 냈는데 지금 그 판결은 과거로 돌아가고 현실에 판사가 생겼습니다. 과거에 판사가 해놓은 것은 그만한 엄연한 죄가 있기 때문에 해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현실로 도로 온 판사가 그것을 무죄로다가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이런 얘기를 예전에도 했죠.
예전에 못 먹고 주릴 당시에 깨밭에 그 깻벌레를 깡통에다 주워서 모두 오줌통에다 넣어서 죽이고, 개구리를 잡아서 구워도 먹고 삶아도 먹고, 껍데기를 산 채로 벗겨서 이렇게 모두 먹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먹고 보니까 깻벌레나 개구리나 이것이 아주 이 은연중에 가슴에 응어리가 맺혀서 인간으로서 그 집 자식으로서 환생을 했답니다. 그래서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어느 스님이 지나가시다 보시고 “여보시오, 이러이러하니까 내 말을 들으시오. 그 아들 둘이 서당에 갔는데 오기 전에 전부 망으로 된 철사로다가 이렇게 뚱그렇게 치고 거적을 쌓아놓고 거기다 겻불을 해놓고 그러고서 독 안에 들어가서 뚜껑을 덮고 이럭하고 지켜보시오. 그러면 악마구리로 소리를 지르면서 ‘엄마, 엄마! 아버지, 아버지!’ 하고 찾을 테니 그 소리가 다 끝났어도 한 시간 두 시간 지난 후에 나와서 그 둥우리를 보시오. 둥우리를 둘을 해놓으라고 했는데 그 둥우리를 보면 알 바가 있소.” 하더랍니다.
그래서 마음이 아팠지만 실제로 그렇게 진행을 했답니다. 그래서 독 속에 들어가서 있으려니까 “아버지, 엄마!” 하면서 “배고파!” 하면서 들어오더니만 아, 그냥 이리저리 찾아다니고 야단법석이 났더랍니다. 야단법석이 나더니 나중에는 시간이 지나니까 “이 연놈들이 어디로 갔어? 우리를 이렇게 해서 아주 사그리 먹어치우고, 이 연놈들 어디로 갔어? 원수를 갚아야 할 텐데. 이놈들 어디로 갔어?” 하곤 그냥 펄펄 뛰고 시간이 넘으면 이제는 이 인생으로서 잠깐 환생했던 것이, 원수를 갚으려고 했던 것이 없어질 텐데, 이 시간이 넘으면 안 될 텐데, 이 연놈들 어디로 갔느냐고 그냥 펄펄 뛰더랍니다. 그러고는 엉엉 울면서 펄펄 뛰는데 그 소리가 점점점점 작아지면서 “할 수 없다. 할 수 없어. 세상에 원수 갚기도 이렇게 어렵구나.” 하면서 소리가 잦아지더랍니다.

그래 떨리고 무서워서 독 속에서 두어 시간 서너 시간 있다 나와 보니까 하나는 깻벌레고 하나는 개구리고 그냥 얼기설기한 그 쇠에 붙어서 죽어가면서 꿈틀거리면서 이렇게, 자기가 죽인 만큼 수효가 그렇게 많더랍니다. 그 쇠에 꽉 찼더랍니다. 그러니 한 바가지씩 그렇게 잡아다가 그렇게 했으니 얼마나 많겠습니까? 물론 세월이 그래서 그랬지 사람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마는 그래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죠. 그렇게 해서 나와 보니까 너무나 떨리고 어처구니가 없었죠. 그래서 세상에는 하나도 내 생명 아닌 게 없고 어떤 생명이든지 이제는 죽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고 두 부부는, 절간으로 올라가서 자식들이 그렇게 원수로 태어난 것을 빌어주면서 그 개구리나 깻벌레가 인도 환생을 해서 잘 살게 천도를 해달라고 공양주 노릇을 하고 부목 노릇을 하면서 일생을 보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런 얘기 하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수만 마리를 잡아먹었다 하더라도 그 자리에다 되놓을 수 있다면 그것은 잡아먹은 사이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 거기다가 놓으니까 바로 내가 되는 것입니다. 만 마리가 바로 원자에서 입자가 났다가 입자가 원자로 들면은 하나가 되고, 이런 거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빗방울이 수없이 많은 빗방울이 떨어졌어도 골짜기로 해서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에 떨어지는 물이 그렇게 수효가 많아도 바다는 바다입니다. 그와 같이 모든 것은 거기다가 진정코 제자리에다 되놔야만이 그것은 인도환생을 하면서 천도가 되면서, 자기 업보가 없어지면서 그 모두가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질문자1(남): 큰스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두번째 질문 드리겠습니다. 저는 기회 나는 대로 큰스님들의 법문을 통해 나의 전생을 알려면 현세의 나를 볼 것이며, 내세의 나를 보려면 현세의 나를 보라는 말씀을 듣곤 합니다. 그런데 저는 항상 허리, 다리가 아파서 고통을 겪고 있으면서 전생에 제가 어떤 업으로 이러한 고통을 겪는지 해결이 안되어 큰스님께 여쭈며 내세에 또 다시 이런 고통을 맞지 않으려면 어떻게 마음을 비워야 하는지…, 죄송합니다. 좋은 법문 주시기 바랍니다.

큰스님: 여직껏 말씀드린 게 그겁니다. 그래서 공(空)이다 색(色)이다 그게 둘이 아닌 까닭이니라. 병 붙을 자리도 없고 업보가 붙을 자리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애고가 붙을 자리도 없느니라. 모두가 찰나찰나 화해서 돌아가는 까닭이니라. 이렇게 반야심경에도 있습니다. 그렇듯이 모든 것은 여러분의 관습에 의해서, 습에 의해서 마음이 ‘나는 이렇게 병이 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까닭입니다. 또 인간이라면 업보가 있다, 없다에서 판단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병이 있다 없다를 떠나서 모두, 병도 네 몸뚱이 네가 건강하게 해서 심부름하게끔 끌고 가려무나 하면 됩니다. 건강하게 하는 것도 몸과 정신과 이 마음내는 거와 법이 둘이 아닌 까닭입니다. 그것이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부처와 법신과 화신이 둘이 아닙니다. 다 그렇기 때문에 ‘네 몸뚱이 네 시자를 네가 건강하게 해서 끌고 다녀야지, 누가 건강하게 해서 끌고 다녀?’ 하고 거기다가 막바로 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은 한군데서 나오는 거 한군데다 놔야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 있습니다.

유마힐 거사는 문수보살이 병문안을 갔을 때 ‘나는 중생들이 다 나아야 내 병이 낫는다.’ 했습니다. 그러면 내 몸인 이 소우주 소혹성한테서 발견을 해보십시오. 내 몸뚱이 속에 수십억의 중생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중생들이 누구겠습니까? 누구겠습니까? 즉 자기입니다. 중생과 부처가 둘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자기 마음과 자기 몸뚱이 속에 들은 거와 자기 몸뚱이를 죄 다르게 보는 겁니다. 이거는 하나입니다. 한 몸뚱이입니다. 장 공장에서 파워를 일으키면 전체 공장이 쓰러집니다. 전체 공장이 쓰러지면 사람이 쓰러지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한마음 주인공’ 하면은 색(色)과 공(空)이 둘이 아닌 그 모두를 한꺼번에 바로 도리천에 놓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이 모든 것은 되돌려 놓는 거기에서만이 나를 이끌어줄 수 있고 또 거기서만이, 네 몸뚱이 네가 고쳐서 건강하게 끌고갈 수 있는 거는 거기다 하는 그 믿음이 없으면 그렇게 놓을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절대로 놓을 수가 없고 물러섭니다. ‘이거 왜 이래? 이런 게 뭐 어디 있어?’ 하고. 그러나 믿음이 있다면 절대로 물러서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진짜로 믿고 거기에 다 놓을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라도 거기에다가 ‘병도 거기서 나온 거니까 네 몸뚱이 네가 안 아프게 해서 끌고다녀라.’ 하고 놓는다면 아마 체험을 하실 겁니다. 그렇게 놓고 지켜보고 체험하는 것이 참선입니다. 내가 그전에도 말했지만 와선이니, 좌선이니, 행선이니, 입선이니 하는 것이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라 생활 자체가 그냥 참선입니다. 그렇게 돌려서 한군데서 나오는 거 한군데다 돌려놓고 지켜보고 체험하는 것이 참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몸도 건강해질 거고 얼마나 좋습니까? 모든 게 다 좋죠.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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