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과 삼가귀감下-최동락 법사(방송통신대학교 강사)

'유불도' 삼가, 마음 달리 표현하지만
마음 바라보는 근본 관점은 같아
삼가의 존재 이유 알면갈등 극복

삼가에서 추구하는 구경의 경지는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는
순수성,걸림없는 자유
금강경의 무상,무주 뜻 되새기자
 
 
3. 『선가귀감(禪家龜鑑)』
1) 선가의 심(마음은 있는가 없는가)

50여 권의 경론(經論)과 조사(祖師)의 어록(語錄) 가운데서 요긴한 것을 추려 모은<선가
귀감>의 첫 구절은 “여기 한 물건(一物)이 있다.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한 것이기에
일찍이 생겨나지도 않았고 일찍이 사라지지도 않았다. 이름을 붙일 수 없고, 모양으로 그릴
수(狀)도 없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생멸(生滅)도 상(相)도 없는 일물로써 마음을 표현
하고 있으니 참으로 묘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선가귀감>에는 마음으로 들어가는 문이 두 개로 나누어진다고 설명하였다. “석가모니가
세 곳에서 마음을 전했다는 것은 선의 뜻(禪旨)이 되었고, 일평생 설법한 바의 말은 교의
문(敎門)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禪)은 곧 부처의 마음이고, 교(敎)는 곧 부처의 말” 이라
는 것이다. 결국 이 마음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는 선과 교의 두 개 문으로 나누어
깨달음의 내용을 전하였고, “교문에는 오로지 한 마음 법만을 전하고, 선문에는 오로지 본
성을 보는 법만을 전했다”는 말로 그 뜻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가귀감>에서 ‘심
’은 알 수 없는 일물이면서, 견성(見性)을 할 수 있는 성(性)이라고 할 수 있다.

2) 선가에서 마음 닦는 방법(일물(一物)도 없는 경지)
<선가귀감>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선과 교의 양쪽 문을 다 열 수 있어야 한다고 했
다. 또한 무엇보다 공안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공안을 통한 공부의 방법론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은 말로 세세하게 기술되어있다. “수행하는 사람이 본래 공안(公案)을 참구할 때
에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하기를 닭이 알을 품듯이 하고,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하며, 배고
플 때에 밥을 생각하듯이 하며, 목마를 때에 물을 생각하듯이 하고,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듯이 하면, 투철하게 알 수 있는 때(透徹之期)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이는 공부
할 때 간절하고 순수 무구한 몰입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닭이 알을 품을 때는 따뜻
한 기운이 서로 이어지고,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는 마음과 눈이 움직이지 않는다. 배고플
때 밥을 생각하고, 목마를 때 물을 생각하며,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에 이르기
까지, 모두 진심에서 나오는 마음이다. 절실함이다. 절실하지 않으면 마음속으로 몰입해 들
어갈 수 없으며, 몰입이 되지 않으면 의식의 뿌리가 구경에까지 이를 수 없다.
그리고 공안을 통해 하는 “참선의 공부는 거문고 줄을 고르는 원리와 같아서 당김과 풀어
짐에 그 적절함을 얻어야 한다. 너무 부지런하면(당기면) 곧 집착에 가까워지고, 잊어버리
면(풀어버리면) 무명(無明)에 떨어진다. 늘 성성하게 깨어서 역역하게 하면서도, 차근차근
하게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했다. 거문고는 소리를 내기위해 만들어진 악기이기 때
문에 소리를 낼 수 없다면 그 가치를 상실하고 만다. “줄의 늦춤과 당김이 적절함을 얻은
후에야 거문고의 맑은 소리가 널리 퍼지는 것처럼 참선 공부 또한 이와 같아서, 조급하게
하면 혈기가 올라가게 되고, 잊어버리면 귀신의 굴로 들어가게 되니, 늦추지도 않고 당기지
도 않으면, 그 가운데서 오묘한 이치를 얻게 된다” 는 말처럼 연주자가 세밀하게 마음의
흐름을 따라 거문고를 조율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자신만의 감성을 가락에 실어서 풀
어낼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이란 넓은 공연장의 무대 위에서 거문고 연주에 몰입하기 위해
현을 고르는 모습. 이는 바로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스스로의 심법을 조율하는 수도자의
모습이다. ‘일물이 무엇인가’란 주제를 잡고 공연하는 연주자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삼가귀감>에서는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을 깊이 믿어서 스스로
비굴해지지도 말고, 스스로 자만해져서도 안 된다”고 하였다. 수행이란 스스로 자신의 마
음을 믿는데서 출발하지만, 나약함에 빠져 거문고의 줄을 늦추듯이 마음을 늦추면 비굴함에
빠지게 되고, 거문고의 줄을 당기듯이 마음을 너무 당기면 자만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마음의 조율이 안 되면, “이 세상이 환상임을 알아서 곧 이 환상을 떠나면 더는
방편을 지을 것이 없게 된다. 환상을 떠나면 곧 깨달음이니, 또한 점차로 더 닦아갈 것도
없게 된다”는 경지로 나가야 한다.
완벽한 조율은 어떤 상황에 부딪히더라도 늘 아름다운 자기만의 연주소리를 내게 될 것이
다. 실상 세속의 삶이란 이런 환상과 같은 일에 매여 허송세월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삶
의 도구에 불과한 물질세계에 빠져 헤매다가 텅 빈 그림자를 보며 스스로 후회하고 한탄하
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래서 자신만의 가락은 한 번도 연주해 보지 못하고, 막이 내리는
무대 뒤의 어둠 속으로 쓸쓸하게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환상은 망상을 일으키게 되고, 망
상은 멍하니 서 있는 허수아비를 스쳐가는 바람일 뿐이다.
그러므로 “미혹된 마음으로 도를 닦는다면, 단지 무명만 도와줄 뿐이다”라는 말처럼, 모
든 현상계가 미혹된 환상이라는 믿음으로 투철하게 깨달음을 향해 나가는 모습은 곧, “모
름지기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을 비우고, 스스로 내면을 비추어보는” 것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생각을 비우면 마음이 맑고 고요해지고, 고요하고 맑은 의식으로 내면을 비추게 되면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 법이다. 그러면 이러한 본성의 참된 마음이 다시 생활 속에서
드러나게 되므로 저절로 걸림이 없는 삶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가귀감>에서는
“걸림 없는 청정한 지혜는 모두 선정(禪定)으로 인하여 생겨난다”라고 하였고, “본래의
참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첫 번째의 정진”이 된다고 한 것이다. 바로 타고날 때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그 본마음을 청정하게 지키는 것이 선정이고, 정진이고, 견성(見性)이란 말이
다.
이렇게 마음이 선정에 들게 되면 “세상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모든 현상(相)을 알 수
있게 된다. 마치 문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가는 티끌이 어지럽게 움직이고, 맑고 고요한
연못물에 온갖 그림자 또렷하게 보이는” 혜안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막힘없는 청정
한 지혜로써 범부(凡夫)를 넘어 성인(聖人)에 들어가게 되므로 <삼가귀감>에서는 선정을 두
고 “성인의 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이 길 밖에 없다”고 했다. 또한 “수도하는 사람은 마
땅히 마음을 단정히 하여, 타고난 본성의 바름으로써 근본을 삼아야 하며, 표주박 하나와
누더기 한 벌이면 어디를 가나 걸림이 없는” 해탈의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선가귀
감>의 마음수양법이자, 수양을 통해 이르고자 하는 경지가 된다.

▲ 생각을 비우면 마음이 맑고 고요해지고, 고요하고 맑은 의식으로 내면을 비추게 되면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 법이다. 그러면 이러한 본성의 참된 마음이 다시 생활 속에서 드러나게 되므로 저절로 걸림이 없는 삶을 이루게 된다. <선가귀감>에서는 “걸림 없는 청정한 지혜는 모두 선정(禪定)으로 인하여 생겨난다”라고 하였고, “본래의 참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첫 번째의 정진”이 된다고 했다.

<금강경>과 <삼가귀감>의 회통
이상에서 살펴봤듯 삼가에서 바라본 ‘심’에는 각각 그 나름대로의 특색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유가에서는 마음과 하늘이 하나로 통한다고 하여 마음 속에 심어진 하늘은 근원에 이
르면 무한하여 끝을 알 수 없게 된다고 했다. 도가에서 말하는 마음속의 자연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것이니, 본래부터 마음이란 일물이 없다는 선가에서 말하는 발근과 다를 바 없다.
이렇듯 삼가에서 마음을 달리 표현하고 있지만 마음을 바라보는 근본적 관점은 모두 같다.
종교나 사상이 처음 세상에 등장할 때는 그 때 상황에 맞는 비유로 진리를 표현해 낼 수밖
에 없었다. 이는 사시사철 더운 열대지방 사람들에게 한대지방의 얼음 속에서 사는 사람들
의 생활방식으로 진리를 표현할 수가 없었고,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첩첩 산중 사람들
의 생활방식으로 진리를 비유해 낼 수 없었던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을 보지 말고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달을 봐야 하듯, 삼가가 가리키는 본래의 뜻을 분명
하게 보면 세 마음이 모두 같음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삼가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를 정확하게 본다면 갈등 또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종교와 사상이 필요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
고 있는게 현실이다. 모두 자신의 종교와 사상이 우월하다는 독선 때문이다. <금강경>의 “
무릇 있는바 상은 다 헛되고 망령된 것이니, 만약 모든 상이 상아님을 보게 되면 곧바로 여
래를 보게 된다”라고 한 말이나, “만약 보살에게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진정한 보살이라 할 수 없다”는 말과는 어긋나
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나 사상의 상에 얽매여서 타종교나 사상을 배척하고
, 또 우열을 가리려는 분별의 마음을 일으키게 된다면, ‘여래’란 절대 진리의 경지에는
결코 이를 수 없는 것이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는 <금강경>
과도 어긋나게 된다. 갈등이란 고정된 관념 때문에 일어나게 된다. 삼가에서 추구하는 구경
의 경지는 모두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는” 순수성을 추구하는데 있다. 이것이 바
로 걸림 없는 자유이며, 해탈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서산대사가 편찬한 <삼가귀감>을 오늘날 입장에서 재조명해 보아야 할 이유고
, 또한 혜능스님이 <금강경오가해>에서 말한, ‘무상(無相)이면서 무주(無住)이고, 묘유(妙
有)’가 되는 뜻을 되새겨볼 시점인 것이다. 바로 고정관념의 틀도 없고, 고착된 편견도 없
으며, 오직 쉼 없이 변하는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순수한 마음으로 응하는 조화로운 묘유의
세계를 이루어야 한다.
오늘날에는 다양한 종교(宗敎)와 사상(思想)이 마치 물질문화처럼 서로 뒤섞여 곳곳에 흐
르고 있다. 이 흐름을 원만하게 하기 위해서 『금강경』에서 말한 심과 『삼가귀감』에서
말한 삼가의 심이 다르지 않음을 알고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만법(萬法)이 귀일(歸一)하여, 삼가(三家)가 일가(一家)로 만난 방안에 앉아, 서산
대사의 말처럼 서로 바라보며 크게 한 번 웃을 일인 것이다.


이 원고는 본각선교원에서 강의하는 내용을 미리 간추려 소개한 것입니다. 본각선교원
(02)762-4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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