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원성 보살의 바라밀 일기

명절에 모인 식구 보며 ‘행복’ 생각
‘나’보다 ‘너’를 생각하는 삶 살아야

명절의 행복
명절 때면 서울에 살고 있는 아들 딸 네 가족이 아이들을 데리고 이 곳 부산으로 온다. 차례를 장남인 우리 집에서 지내게 된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명절 마다 지내는 차례와 웃어른들의 제사를 여러 해 모셔왔지만 나는 한 번도 그 일이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늘 마음을 내서 하는 일이기에 항상 즐겁다.
서울에서 내려온 식구들까지 모두 6남매의 식구들이 차례를 모실 때는 그 모습이 참으로 든든하고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그 여러 식구들 중에서 나와 마음이 제일 잘 맞는 사람이 있다. 넷 째 시동생이다. 그는 유난히 정이 많고 모든 생활이 모범적이며 정직하고 인내심과 배려심이 깊어서 평소 자랑스럽게 생각해왔다.
내가 시집와서 힘들고 괴로울 때, 그 때마다 말수가 별로 없는 이 시동생의 진심어린 위로와 격려가 큰 힘이 되어주곤 했다.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마음이란 것이 모습은 없지만 진심이 담긴 따뜻한 마음만은 이심전심으로 서로 통하는 것 같다. 어찌어찌 하다 보니 이제 우리 내외가 집안에서 제일 어른이 되었다. 평소에도 경우 밝은 그는 늘 우리 내외를 어른으로 챙기기 시작했다.
차례를 지낸 후 시댁에서 차례를 지내고 온 딸 식구들을 포함해서 가족 모두가 둘러앉아 윷놀이도 하고, 극장에도 가는 등 오랜 만에 많은 식구들이 모여 한가위 분위기를 즐겼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모두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아이들이 용돈으로 쓰라며 돈봉투를 서로 내밀었다. 아이들이 잘 커줘서 기쁘고 대견한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큰 만큼 우리 내외가 늙었다는 생각에 조금은 서글퍼지기도 했다. 아이들이 모두 떠나고 나니 우리 내외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동서들과 함께 북적거리며 음식을 준비하던 주방도 썰렁했다.
평소보다 많이 나와 있는 수저들과 그릇들을 보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식구’에 대한 생각을 새삼스럽게 하게 됐다. 식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 올리니 입가에 미소가 스민다.
제법 늙은 티가 나기 시작한 내외들과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고 있는 손주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모두가 아프지 말고 외롭지 말고 슬프지 말고 늘 즐겁고 행복한 일만 있기를 기도했다.
명절은 식구들이 모일 수 있고 식구들 생각을 하게 되어 좋은 것 같다. 우리 집뿐만 아니라 모든 가정이 행복하기를 아울러 기도했다. 가정마다 행복이 넘친다면 우리 사는 세상의 괴로움이 모두 해결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것이 부처님 공부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다.

생활 속의 수행
살다보면 언제나 ‘나’를 우선으로 생각하고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래서 생각해 본 것인데,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면서 ‘나는’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쓰는 것 같다. 좋은 일에도 좋지 못한 일에도 누구나 말을 할 때면 어김없이 ‘나’로 시작한다.
어쩌면 ‘나’라는 말에 갇히어 생각도 ‘나’에 갇힐 수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렇게 살면서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수 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바른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 그로 인한 것일 수도 있을 수 있다.
어항 속의 물고기를 보면서 물고기의 심정을 알 수가 없고, 나무를 키우면서 나무의 심정을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 아닐까.
인간이 어항 속의 물고기나 숲 속의 나무들과 이야기할 수 없고, 인간들끼리도 서로 소통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이유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새로운 원을 하나 세웠다. ‘나’에서 조금 멀어지는 일을 조금씩 해보려고 한다.
수행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내가 ‘나’에서 멀어지는 일. 그렇게 ‘나’에서 멀어지면 ‘나’를 더 제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하면 늘 새로운 나와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나’가 새로워지다 보면 ‘나’보다 ‘너’를 위주로 생각하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과거에도 오늘과 같이 우리들의 조상들이 살아 있었고, 또 내가 없는 먼 훗날에도 우리들의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을 이 세상이다.
세월은 나이가 없고 우린 나이를 먹고 죽어간다. 이토록 끊임없이 흘러가는 세상이 부처님 말씀대로 흘러갈 수 있으려면 지금의 우리부터 조금씩이라도 ‘나’에서 멀어지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곧 눈에 보이는 것만 보지 말 것이고, 귀에 들리는 것만 듣지 말아야 할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도 볼 수 있어야 하고, 귀로 들을 수 없는 것도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결국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게 되고, 귀로는 들을 수 없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들을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좀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가 알면서도 할 수 없었던 것들을 할 수 있고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는 마음들을 알게 되고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용서’, ‘위로’, ‘사랑’ 등 우리가 나누기 힘든 것들을 좀 더 많이 나눠가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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