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믿고 생활 속에서 하나하나 점검하고 체험해보세요

▲ 그림 최주현

우리는 봄을 기다리는 나무처럼 꾸준히
밑 빠진 구멍에 모든 것을 믿고 놓아야 합니다.
먹고선 싸지 않으면 부작용으로 죽습니다.
싸야 살듯이 놔야 삽니다.
몸이 있을 때 이 공부를 안 하면
세세생생 가슴찢고 울부 짖으며 창살 없는 감옥처럼
그렇게 자유스럽지 못하게 지낼 터이니 어찌하겠습니까.

알음알이로 쉽게 말은 하지만…
문) 불법을 공부한다 하면서 행보다 말이 앞서는 사람들을 보면 참 안타까웠는데 사실은 저도 그러고 있더라고요. 누가 뭐라 하면 ‘둘이 아니잖아.’ 하고 알음알이로 쉽게 말은 하지만 정작 저 자신도 행은 안되거든요. 열심히 해서 이 도리를 알고 싶은데 어찌 공부하면 좋겠습니까.

답) 사람마다 누구나가 다 둘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것을 우리가 둘이 아닌 것이라고 하는 데서 둘
이 아님을 또다시 알아야 하는 것이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것입니다. 둘이 아닌 것은 아나 둘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보통 흔히 말을 하기를 “둘이 아닌데 뭘 그래? 뭐 할 말이 그렇게 있다고….” 이렇게들 시원하게 아주 말로 해 버리는데 물론 물도 얼음도 둘이 아닌 거는 알죠. 그 얼음과 물이 둘이 아닌 줄은 알았으나 그 씀씀이를 하고 돌아가며 배우는 이치, 상황에 따라서 물을 크게도 쓰고 적게도 쓰고, 흘러내리는 물이라도 좀 더 우리가 생각해 봐 가면서 쓸 수 있는 상황이 있고 이렇듯이, 항상 그 물에 의해서 말갛게 씻을 수 있는, 씻는다고 해서 또 물에 항상 물건을 씻는 것만 생각하지 마시고요. 항상 말갛게 씻을 수 있는 그러한 마음 자세는 우리가 선지들의 그 길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일입니다.
아무리 내가 알아도 선지들의 그 큰 발은 너무 커서, 작다 못해 티끌 안에 우주가 다 들어 있다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가 말은 안 해도 마음으로 ‘에이, 그까짓 걸 가지고….’ 이렇게 아주 가볍게 생각을 내는, ‘아이고, 그럼 그렇게 되어 있는 거를 뭘 그래? 뭐, 그 말이 그 말이고, 그 말이 그 말인 걸. 그게 바로 그 도리인 건데, 뭐.’ 이렇게 그냥 알아 버리는…. 쉽게, 아주 간단하고 가볍게 그렇게 안다는…, 안다는 그 생각은 좀 더 우리가 생각해 볼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도 그런 말이 있죠. 선지들께서 말씀하시기를 “얘야, 내가 지금 급하게 오던 길에 아주 무겁고 요지부동한 돌이, 돌계집이 어린앨 낳았어. 그런데 지금 해산간을 안 해 줄 수도 없고 해 줄 수도 없고, 어떡하면 좋겠니? 너희들은 이 뜻을 어떻게 해석을 할 수 있겠느냐?” 하고 “이 한 길을 일러 봐라.” 했습니다. 그랬는데 ‘그것은 방편으로써 말씀하시는 거.’ 하고선 가볍게 말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더랍니다. 돌계집이 따로 있고 애 낳는 게 따로 있겠느냐고 말을 그렇게 가볍게 해 버리기 쉬운 얘깁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그분이 그 말씀을 한 말하고 그 대답하는 사람이 그 대답한 말하고는 천지차이입니다. 알고 대답하는 거하고 모르는 걸 대답하는 말하고는 다릅니다. 우리가 이 공덕이다 또 공덕이 못 된다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예전에도 그런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마는 “부처님은 자비로우셔서 사람을 죽이지도 않고 살생도 안 하고 해하지도 않고 모든 일을 착하게만 하시는데, 범부들은 항상 죽이고 먹고 이렇게 살생을 해서 우리는 항상 지옥에만 갈 처지인데 부처님께서는 어찌 범부와 부처와 둘이 아니라고 하십니까?” 이런 질문을 했어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 지금 해가 만물을 다 비춰 주는 것도 중생을 위해서고 저 서산에 지는 것도 중생을 위해서니라.” “그러면 그렇게 뜨는 것도 중생을 위해서고 지는 것도 중생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 거기에 부처입니까?” 했어요. 그러니까 이 주장자 들고 있던 걸로 탕탕 발목을 치더랍니다. 그런데 법상을 쳤는데 왜 발목을 쳤습니까? 그 한 대목이 관문입니다. 이 한 구절이 바로 일차적인 관문을 통하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법상을 쳤는데 어째서 발목을 쳤다 하느냐? 이 소식을 한 구(句) 일러 봐라 하는 뜻입니다. 이 모두가 우리가 방편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실천이자 현실이자 과거도 미래도 없는 현실입니다. 깨달은 분이 없다고 하는 말, 바로 그것을 듣고 귀동냥으로 해서 사량으로 알고 이론으로 알고 그래서 ‘아, 그거 그냥 둘이 아닌데. 그냥 무(無)야.’ 하고선 이렇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래서 이 만법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나에게 있다. 우리가 자도 숨을 쉬고, 깨도 숨을 쉽니다. 이게 그대로 참선입니다. 우리가 사량적으로 잘못해 놓고 또 뒤에 생각을 하고 거론을 하고 이런다면 그것은 또 걸리는 법입니다. 잘못한 데다가 또 잘못이 또 거듭거듭 붙어요. 만약에 가정에서 잘못하든 어디에서 잘못하든 잘못해 놓은 거라면 그것 또한 자기 성품에 의해서 그것이 요리 용(用)을 하고 조리 움죽거리고 조리 생각해서 하고, 이런 것을 일일이 걸린다면은 그것은 더더기가 붙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잘못해도, ‘이건 주인이 하는 거니까. 다 놓으라고 그랬으니까 잘못해도 이건 내가 한 게 아니야.’ 이렇게 회피를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 도리가 쉬우면서도 까다롭고 까다로우면서도 쉬운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이렇게 말을 하니까 쉬운 걸로 생각을 하시는데 “마음은 허공을 갈 수 있고 허공을 돌 수 있고 이 지구를 벗어날 수가 있지만 육신으로서는 벗어날 수도 없고 또 이 온 누리를 돌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고 말을 하니까 그게 쉬운 줄 알고 그냥 그러시는 분들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쉬운 게 아닙니다. 그러나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나 하나 깨닫는 데는 너무도 당연하고 쉬운 것입니다. 그건 왜? 모든 게 진심스럽고 믿고 물러서지 않는다면 모든 게 우리가 지금, 그전에도 말했지만 억겁을 거쳐 나온 그 습이 지금 현실의 나한테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 모두 찰나찰나 놓고 가면, 우리는 한꺼번에 놔지는 게 아닙니다. 찰나찰나 놓고 가다가 보면 몰락 다 놓게 되는 것이죠. 또 그걸 놓고 깨닫는다고 해도 깨달아서도 찰나찰나 금방 그것이 다 체험이 가서 성불의 길로 드는 게 아닙니다. 찰나찰나 가면서, 아까 얘기했듯이 씻고 또 씻고 씻고 또 씻고 가다 보면 그렇게 되는 거죠.

사람이 지혜가 넓으면 저 바다의 물처럼 더러운 물 깨끗한 물이 다 들어가도 받아들일 수 있는 큰 손이 되지만 만약에 그렇지 못한다면 고인 물에 아마 더러운 물이 들어간다면 왈칵 뒤집히듯 할 겁니다.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생각해서 지혜를 넓히고 응용을 하더라도 그 하나하나를 모두 이것이 어디서 나고 드는가 하는 참구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봄을 기다리는 나무처럼 꾸준히, 항상 밑 빠진 구멍에 모든 것을 놓는다. 믿고 놓는다. 줄창 말을 하지만, 항상 먹고선 싸지 않으면 우린 부작용으로서 죽습니다. 싸야 삽니다. 싸야 살듯이 놔야 삽니다. 몸이 있을 때에 공부를 안 하면 세세생생에 여러분이 가슴 찢고 울고불고 참, 창살 없는 감옥처럼, 그리고 끌려가는 것처럼 자유스럽지 못하게 항상 지낼 터이니 어찌 하겠습니까?

무조건적인 믿음을 갖고 싶어요
문) 마음공부를 하려면 일단 자신에 대한 믿음이 중요한데 이런 저런 분별심 때문에 무조건적인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믿고 갈 수 있을까요?

답) 나도 의문입니다. 왜 그렇게도 쉽고 그렇게도 빠르고 그런 게 자기한테 주어져 있는데 어찌 그렇게 모두 믿지 못하고 그렇게 앨 쓰고 즐겁지 못하게 살고 울고불고 야단들인가 하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날더러 당신은 그렇게 해 왔으니까 알겠지만 우리는 모르지 않겠느냐 이렇게 말하겠죠?
진짜 왜 못 믿나. 그 생명이 그 생명이고 바로 그 몸이 그 몸이고, 그 행이 그 행이고, 그 사람이 만법을 행하고 있는데 자기를 자기가 못 믿어요. 전 어려서부터 그렇게밖에는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참, 이상하구나.’ 내가 살아온 걸로 봐서는 나는 남을 의지한 게 없고 그 못난 자기만을 의지를 했는데 어째서, 왜 자기를 못 믿고 의지 못하고 그럴까. 자길 의지했기 때문에 자기를 발견했고, 자길 발견했기 때문에 수많은 그 행과 법칙과 그 모든 게 나한테 주어져 있다는 걸 알고, 과거에 내가 어디서부터 거쳐 왔다는 것도 알게 되고 그렇게 되는데 어찌 자기를 모를까? 왜 자기를 믿지 않을까? 그냥 깨닫고 안 깨닫고 그건 떠나서라도 왜 자길 못 믿을까 이겁니다.
문제는 그런 데에 있습니다. 이거는 깨닫는다 안 깨닫는다, 못 깨달아서 못한다, 깨달아야만 한다 이런 걸 떠나서 자기를 못 믿는 겁니다. 난 어떤 때는 그런 생각도 합니다. 없는 사람이 어떤 때는 자기의 손가락에 끼웠던 반지 하나를 빼 놓을 때도 있습니다. 물론 소중한 그거라도 빼 놓을 수 있는 그 정성이 지극하겠지만 그거 하나 빼 놓을 수 있는 정성보다도 나는 자기를 좀 믿어 줬으면 하는 겁니다. 그것도 못 믿기 때문에 빼 놓는다는 겁니다. 참 이거, 내가 참 답답한 게 많습니다.

여러분이 깨닫고 안 깨닫고, 그것이 본래 깨닫는다는 언어도 붙지 않았고 깨닫지 못한다는 언어도 붙지 않은 것이다.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주어져 있고 행할 수 있는 그런 그 광대무변한 이치를 우리는 그대로 가지고 수여하고 있다는 얘깁니다.
어느 날 비가 왔습니다. “스님, 아이고 이거 그냥 가시면 안 됩니다. 비 맞으면 안 됩니다. 우산을 쓰고 나가셔야 됩니다.” 이런단 말입니다. 그래서 내 말이 딱 그랬습니다. 이거는 내가 자랑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한테 체험을 드리기 위해서 얘깁니다. 모든 걸 믿고 생활하는 데 하나하나를 점검하면서 체험하면서 돌아가십시오. 그렇게 되면은 자기한테 모든 일체 만법이 주어져 있다는 거를 스스로 알게 됩니다. 그것을 느껴 보지 않고 생각도 안 해 보고 지켜보지도 않았다면은 그냥 무의미하게 그냥 넘어가 버리고 말지요.
그래서 내 말은 거기에서 그랬습니다. “이거 봐. 모든 것이 환경에 따라서 이 공기와 바람, 또는 그 무중력의 전자력을 이렇게 중단시키면은 일로 바람, 그것이 오질 않아. 그것은 이 허공에도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에 의해서 울타리가 쳐질 수도 있고 울타리가 안 쳐질 수도 있어. 그러니까 비 맞아도 좋아. 그 비를 맞으면 외려 생기가 날 텐데.” 거꾸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빛보다도 더 빠른 인간의 참마음이, 그 참마음 한 점이 우주의 일체 만법을 우리 삶과 더불어 같이 조화를 이루면서 자유자재할 수 있다는 그 점을 여러분은 그렇게 아시라는 얘깁니다.
그러니 얼마나 자유스럽고 걱정이 없을 겁니까. 죽을까 봐 걱정할 겁니까. 더 잘살자고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왜? 전부 내가 아닌 게 없으니까 말입니다.

어려운 일 닥치면 점술인을 찾게 돼요
문) 보통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것을 빨리 해결하기 위해서 무속신앙이나 점술인을 찾아서 해결하려고 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정법은 너무 어렵다고 생각해서 기피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특히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도 잘되는 쪽, 쉬운 쪽을 갈구하지, 어렵고 힘든 쪽은 거의 기피하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 저희들이 어떠한 마음으로 포교를 해야 할는지요.
답) 지금 그렇게 말씀을 하셨지만 그 말씀은 오히려 더뎌 가는 거고 그거는 기필코 빠르게 가는 길이 못됩니다. 그러니까 항상 내 주인공은 내 보디가드처럼 항상 지니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항상 어느 때에나, 즉 말하자면 아프거나 그래서 관하면 의사로 찰나에 바꿔지고, 또 어떠한 일이 생겼다 하면 관세음이 되고, 좋은 데로 간다 하면 지장이 돼 주고, 칠성부처가 돼 주고 지신이 돼 주고 용신이 돼 주고 허공신이 돼 주고, 별거 별거를 다 돼 줍니다. 그렇게 찰나찰나 바뀌는데 뭐가 답답해서 그렇게 바깥에 가서 묻고 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바빠 죽겠는데. 말을 해도 얼른 자기한테 하는 게 다 빠르지 나가서 하는 게 빠릅니까?
예를 들어서 자기한테는 곧바로 그냥 통신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바깥에 나가서 하는 게 그렇게 듣느냐 안 듣느냐도 문제지만 올바로 나가는 게 못되고 또 빠른 길이 못됩니다. 그러니까 항상 나와 내가 그렇게 빠르다는 걸 아셔야 됩니다. 나와 내가 더 빠르지 누가 더 빠릅니까? 그래 정히 답답하면 ‘야, 아무개야!’ 자기 이름을 자기가 세 번 부르고 ‘너만이 할 수 있잖아.’ 하고 아귀를 지어라,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아도, 말소리를 내지 않고도 얼마든지, 길에 가다가도 하고 앉았다가도 하고 섰다가다 하고 뭐, 그 누구하고 같이 있다가도 할 수 있는 거고. 그러니까 항상 무슨 급한 일이 있으면 그렇게 해서 통신을 하게 되면은 그냥 재빨리 통신이 된단 얘깁니다. 그렇게 빠른 거를 가르치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시면 어떡합니까? 이게 부처님에 직속, 즉 말하자면 통신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아니면 제삼자가 자기를 대신 살아 줄 리 없고요. 그러니깐 꼭 여러분 개개인이 꼭 자기 아닌 자기를 꼭 믿어야 합니다. 믿고 그렇게 통신을 해야 합니다.

어떠한 일이 생기고 그런다 해서 나가서 그렇게 물어보고 그렇게 해야 빠른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내가 듣고 다니면서 잘못된 거는 거기다가 관하시란 얘깁니다. 거기다 관하시면 그것이 슬금슬금 이게 돌아서 해결이 됩니다. 그게 굴레 없는 수레라고 합니다. 이 보이지 않는 데에 연기처럼 구름이 돌아가듯 이렇게 돌아가서 통신이 되는 것이 그것이 진짜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 살기에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 도리를 다 알면은 뭐 천지가 뒤집힌다고 그래도 걱정 없지만 그게 스르르 이렇게 돌아서 해결이 돼야지 억지로 강제적으로 뛰다가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잘 관해서 언제나 이렇게 스무드하게 이렇게 돌아서 이렇게 돼야 되겠죠, 뭐든지.

집안에 유전되는 병이 있는데
문) 저의 선친께서 70에 천식으로 돌아가셨는데 저의 큰아이도 천식을 앓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집안의 유전성인지요. 만일에 유전성이라면은 그 원인은 무엇이며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는 건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한 번씩 천식으로 인해서 호흡에 괴로움을 느낄 때 그것을 지켜보는 제 마음이 너무나 아픕니다.
답) 그게 여러분은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못났든 잘났든 우리가 이 세상에 생긴 자체가 바로 내 근본이 있기 때문에 생긴 겁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종자가 있으니깐 생긴 겁니다. 그러니깐 그 종자를 믿어야죠. 믿는다면 아무 문제 없고 어떠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걸 믿으면은 그냥 훌떡 넘게 되는 겁니다. 근데 할아버지도 그랬으니까 유전성이 이렇게 있구나 하는 그 앙금이 지워지지 않는 건 그냥 무조건 그냥 믿는다 이런다면은 그냥 그 앙금도 없어질 텐데, 이럭하면 없어진다는 건 아는데 그 앙금이 지워지질 않아요. 그러니깐 그 앙금마저도 없애려면 진짜로 믿어야 한다. 믿다가도 쪼끔 저거 하면은 그냥 이렇게….
예를 들어서 예전에 내가 이런 말을 했지요. 종 문서를 없애야 할 텐데 종 문서를 가졌다가 도로 놓았다 가졌다 도로 놓았다 이러니까 이것이 유전성이나 업보성이나 영계성 인과성, 모두가 주둔해서 그렇게 생긴 대로 나오는 거죠. 그래 그 말을 할 때에 내가 그랬죠. 이 누진은 바로 자동 컴퓨터와 같다. 그러니깐 거기에 과거로부터 살아오면서 누적된 그 입력이 지금 이 공부를 하면서 자꾸 놓아 들어가니깐 그 입력이 자꾸 없어진다고요. 그러면 유전성도 녹아서 없어지죠. 그 앙금마저 없애면 아무 일도 없는 겁니다. 유전이라는 건 사람의 생각에 의해서 유전이라는 거지 유전이라는 언어도 없을 겁니다, 아마.

생명들의 줄어듦도 늘어남도 없다 한 뜻
문) 시대가 발전할수록 인구는 감소하고 어떤 동물들은 멸종의 위기에 처해지고 있는데 『반야심경』에서는 생명들의 줄어듦도 늘어남도 본래 없다고 하니 그 뜻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답) 그거는 사람도 그렇지만 짐승도 그렇고 짐승이 최초부터 사람이 된 게 아니라 우리도 벌레로부터 이렇게 생겨나서 인간까지 이렇게 왔죠. 그런 거와 같이 짐승이 됐으면 사람으로 될 수도 있고 사람이 됐어도 짐승으로 될 수도 있고 이렇게 해서 자꾸 변화가 오죠. 그러니까 그 모습 고대로 있는 게 아니라 자꾸 바꿔진답니다.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바꿔지죠. 만약에 토끼 그러면 토끼로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나고 개로도 태어나고, 개가 사람으로도 태어나고 돼지가 사람으로도 태어나고, 소가 사람으로 태어나고 여러 가지 가지로 이렇게 태어난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게 태어나고 권리도 주어지고 삶도 주어지고 모두 생김도 주어지고 모두 그렇게 주어지죠. 그러니깐 여러분이 잘 생각해서 사셔야 될 겁니다.

하여튼 마음 하나 이게 마음이 마음이 아닙니다. 마음이 너무 여러 가지로 많기 때문에 마음이 아니라고 그러죠. 마음 아닌 마음을 진짜로 써야 된다, 마음 아닌 마음을 항상 둘 아니게 써야 된다 이렇게 보죠. 그러면 여기 가서 이걸로 태어나고 저기 가서 저걸로 태어나고 사람으로 태어나고 그러는데 어디 가서 태어나진 않았겠습니까? 그러니까 내 부모 아닌 게 없고 내 자식 아닌 게 없고, 하여튼 짐승 하나도 내 모습 아닌 게 없고 이렇게 되죠. 내가 아닌 게 하나도 없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모두 둘로 보지 말고, 그렇게 둘로 보지 않는 반면에 그냥 사랑 없는 사랑이 되죠, 자연적으로. 우리가 주인공 찾으려면 주인공 어디서 찾나 이러지 말고 자기 나무로 치면 뿌리라고 그러죠. 뿌리와 나무가 같이 붙어 있으니까 그냥 얼마나 편리합니까. 그렇게 편리한데도 주인공이 어디 있나 그러고선 찾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주인공에, 항상 나무에 뿌리 붙어 있듯 그렇게 있으니깐 걱정하실 게 없단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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