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눈 아닌 눈이 있어야 하고 귀 아닌 귀가 있어야

▲ 그림 최주현

만사만생이 다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원리가
누구나 잘되고 싶지 못되고 싶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못되고 싶어서 못되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눈이 없고 귀가 없으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마음의 도리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백종에 임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문) 백종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 어떤 마음으로 임해야 하는지요.

답)
옛날에는 자손들을 육 형제나 오 형제나 이렇게 많이들 낳아도 낳는 대로 저거 했지 어린애를 지우거나 이런 법이 없었거든요. 어느 사람이 칠 남매를 두었는데 그 칠 남매를 두고 농사를 지어서 가르치고 뭐 하고 하려면은 얼마나 그게 참 피땀이 나왔겠습니까. 그래서 부모들이 위로는 좀 가르치고 그러다가 밑으로 막내를 가르치질 못했어요. 인제는 쇠약하고 저거 하니까 위로 큰형들이 좀 도와서 해야 할 텐데 그렇질 않았기 때문에 밑으로는 잘 가르치지도 못하고, 농사를 지어서 그냥 먹는 판이어서 부자가 될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살다 보니까. 그래서 남의 집에 품을 살고 이렇게 하면서 살다 보니까 부모는 인제 다 돌아가시고 제가끔들 사는데 막내는 아주 더 가난하고 어려웠어요. 그 위로는 그래도 괜찮게 살고 그랬는데도 영 괜찮게 사는 형이 아우를 조금도 돕질 않거든요.
그러니깐 차라리 가난한 사람이 형네 집에 가면은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 차라리 안 가는 거죠. 굶더라도 그냥 안 가고 있는데 인제 어머니 제삿날이라든가 이런 때는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깐 인제 자기가 먹는 냉이를 캐다가 말갛게 씻어서 보리죽을 쑤든 쌀죽을 쑤든 이렇게 쒀 가지고는 자기 먹을 거를 퍼서 인제 어머니나 아버지한테 이렇게 놓는데, 그것도 상에다 받쳐서 놓을 데가 없어서 장독자리에다가 이렇게 그냥, 장독자리도 뭐 원만히 돼 있겠습니까만 그 위에다가 놓고선 그렇게 어머니 아버지를 생각하고 그리면서, 이렇게 못난 아들 때문에 어머니 제사 때 한번 가 뵙지도 못하고 이렇게 저거 한다고 하면서 그날 저녁에 잠을 자는데 형네 집을 가니까 그 부모님들이 형네 집을 안 가고 자기네 집으로 간다고 어서 가자고 그러더라는 거예요.
네가 해 놓은 것부터 먹고 내가 형네 집을 가야 한다고 그러더라는 거죠. 그래서 부모를 보시고 자기네 집으로 오니깐 그냥 그 장독자리에 있던 그 죽 쒀 놓은 거를 그냥 방으로 들여다가 놓고는 그냥 그렇게 맛있게 잡숫더라는 거예요. 그렇게 맛있게 잡숫고선 ‘야, 난 인제 큰형네 집으로 간다. 잘 살거라.’ 이러고선 그렇게 가시더래요. 가시더니 그 해에 농사짓는 부잣집에서 마름을 얻었대요. 마름을 얻고 농사를 지어서 참, 집을 한 칸 마련하게 됐고 인제 제대로 좀 밥을 굶지 않고 살게 됐더랍니다. 그렇게 살게 되더랍니다. 그래서 자식들을 가르치게 됐고 그렇게 됐거든요.
그게 왜 그렇게 된 줄 아세요? 그 마음이 지극해서요, 마음이. 부모로 보였든 부모 아니로 보였든 간에 마음이 지극하니까 그 모두가 감동한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도 없는 데서 생각하고 말을 하는 건 아무도 모르죠, 자기 속으로 생각하는 건. 그러나 그냥 그렇게 생각을 하고 돌아가도 자기가 생각을 했기 때문에 원인이 제공이 되는 겁니다. 생각을 하면 그 생각이 전파로 통해서 다 알게 돼 있어요. 그러니 지극하게 주인공에다 관하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가 보시면은 사는 대로 하다못해 부지깽이 하나라도 늘어갑니다. 그거는 아주 상책입니다.
그래서 칠석이다 백종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칠석이다 하면은 산 사람들이, 우리가 밝아야 위로는 조상 아래로는 자손이 밝아지지 않겠습니까. 또 백종은, 내 위로는 조상님들이란 말입니다. 조상님들을 밝게 해 드려야만이 훨훨 털고 나설 수 있는 거예요. 훨훨 털고 나서야 우리 그 종자가 번성을 하게 되죠. 그러니까 모두가 이게 양면이,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둘이 아니에요. 그래서 나는 칠석이나 백종이나 마음의 촛불을 켜시라 이런 거죠. 마음의 촛불을 켜시라. 마음의 촛불을 켜고 그 관하면서 그렇게 도실 때에 얼마나 그 마음 하나하나가 전파가 될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마음도리 모르고 죽는다면 사후는?
문) 우리가 마음도리를 모르고 죽는다면 사후에 어떻게 되는지요?

답) 예전에 치악산 상원사에서 있을 땝니다. 그때 한철, 작대길 들고서 버섯을 따러 다녔습니다. 어느 날 버섯을 따러 갔는데 아, 가랑잎이 그냥 수북하게 쌓여 있어요. 그 가랑잎을 헤치면은 싸리버섯들이 굵은 게 많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헤치려고 작대기를 들다가 멈췄습니다. 왜 멈췄느냐 하면은 그것을 헤치면 반드시 뭐가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그걸 헤치지 않고 돌아서 이렇게 가려 하니까 날 멈추게 했습니다.
그래서 왜 멈추게 하나 하고 생각을 순간 해 보니까요, “당신을 만나기도 어려운데 어찌 그냥 가시려 합니까? 내 말 한마디 듣고 가십시오.” 한 겁니다. 그래서 헤치기도 싫고 그래서 안 헤치고서 나는 나대로 “넌 어쩌다가 그렇게 내가 싫어하는 그 모습을 가지고 나와 가지고선 그러니? 마음은 다, 물론 그 살림은 살림대로 똑같지마는 모습이 나는 징그러워.”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하는 소리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내가 이 상원사 절의 중이었는데, 내 토굴 내려가기 이전에 고 밭이 있습니다. 밭에 그전에 암자가 있었는데….” 그 얘길 합니다. 암자가 있었는데 상원사에서 아파서 죽게 되면 그 암자로 내려왔답니다, 병자는. 그래서 그 암자로 내려와서 죽게 돼서 죽었는데 그때에, 죽기 전에 그 암자의 수좌로 있다가 주지도 하고 이랬답니다. 그래서 주지가 됐으면 그 돈 들어온 거 모두 모아서 비석도 다시 해 세우고, 그러니까 나무로다 했기 때문에 전부 썩고 갈라지고 쪽이 떨어지고 이랬거든요. 그런데 인제 그게 망가졌는데도 불구하고 돈이 모자란다는 구실로다가 그걸 못했다 이겁니다.
못하고 병이 들어서 그냥 죽게 돼서 죽었는데, 죽고 나서 보니까 거기에서, 그 자리에서 맴을 돌다가, 예를 들어서 이 중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래서 절 근처로 맴을 돌다가 어디 이렇게 들어가니까 돌기둥에다가 돌받침에다가 그냥 그렇게 좋은 참 튼튼한 집이 있었답니다. 그래서 마음에 ‘여길 들어가서 살면 공부를 하겠구나.’ 이렇게 생시에 마음먹은 대로, 그렇게 공부를 하러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공부를 하려고 들어가다 보니까, 들어가고 얼마 안 돼서 이게 자기는 자기의 그 감각을 몰랐답니다. 그랬는데 “오늘 지금 현재 당신을 만나고부터 내가 이렇게 된 걸 알았습니다.” 이거예요. “그러니 나를, 이 모습을 벗겨 주고 가십시오.” 이겁니다. 그러고도 그 돈 해 놨던 거를 그냥 그 다락의 어느 벽에다가 넣어 놓고선, 벽지로 발라 놓고선 그냥 갔답니다. “그랬으니 그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러니, 그 죄를 많이 지어서 내가 이 모습으로 이렇게 돼 가지고 스님까지도 내 모습을 보기 싫어하는 그런 모습으로 타고 났으니 이 모습을 벗겨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말을 했어요. “전자의 중도 없고, 전자의 중도 없었는데 그 돈은 어디 있으며 지금 그 모습은 어딨겠느냐.” 했습니다. “다만 지금 말하고 있는 그 자체가 순간 붉게 핀 꽃과 같은 것이다.” 그런 얘기를 한마디 던지고선 나니까, 한숨을 후욱 쉬면서 “참 감사합니다. 인제는 이 순간 옷을 벗게 됐습니다.” 하고 수풀로 돌아갔습니다.
나는 한두 건을 본 게 아닙니다. 절 근처로 가면 절 근처에, 또 양이나 돼지 기르고 소 기르는 데를 가면 그 근처에, 사람 사는 근처엘 가면 사람 사는 근처에, 어떠한 집 근처라면 집 근처에, 그저 여기저기 가면 발에 걸리느니 걸려요. 그러니 여러분만 살았다고 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됐는가. 우리가 이 공부를 안 하면 무서운 도리가 있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그 학으로서 배우고 염불이나 하고 이렇게 해서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그 도리를 모르고, 둘이 아님을 모르고, 둘 아닌 데서 참나라는 것이 있는 거를 모르고, 우주 전체와 나와 더불어 같이 있는 거를 모를 때, 비로소 너무나 애석한 것은 우리가 이 도리를 모르고 만약에 이 옷을 벗는다면 식(識)만 있지 분별이 없어요.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식만 있어요. 분간을 못합니다. 지금 현재에 아주 눈과 귀를 싹 싸매 보세요. 여러분이 금방 지금 그 자리에서 죽었다면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부닥침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와 같이 식만 남았으니 지금 그것을 증명해 보시려면 지금 아주 오관을 딱 가려 보세요, 귀도 막고 다. 그럼 어떻게 하시렵니까?
사람은 눈 아닌 눈이 있어야 하고 귀 아닌 귀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분별을 하죠. 그리고 책정을 하고 판단을 해서 내가 이렇게 해야겠다는 뭐가 있지요. 그런데 도대체 식만 남아 가지고서 아니, 보기를 하나, 듣기를 하나? 사람이 사람인지 짐승인지 그 도리를 몰라요. 집이 어떤 집인지, 요만한 굴속인지 큰 집인지 그것도 몰라요. 그 굴속도 크게 보이죠. 그리고 기와집으로도 보이고 아주 그 보석으로도 보이고 이렇게 하니 눈이 없다 이겁니다. 욕심에 꽉 찬 그 눈은 바로 식만 남아서 생시에 살던 그 식으로서, 좋은 것만 가지려고 했던 그 식만 남아서 그저 이, 하다못해 돌 틈을 봐도 그 돌기둥으로 보고 돌집으로 보고, 공부를 하겠다고 들어갔으니 그렇게 될 수밖에요. 그러니 여러분이 지금 보이지 않는 세계라고 해서, 지금 살았다고 해서 그걸 아무렇게나 생각할 수는 없죠. 그저 값싼 말로, 붙을 데가 없는데 뭐 붙을 게 있어서, 내가 없는데 뭐 붙을 게 있느냐고 이렇게들 허영 말해 버리고 마는데 그 무서운 도리는 누가 처리할까요.
그래서 옛날에도 참 여러 가지 많은 것을 보아 왔고 그랬는데, 옛날에도 사람이 죽으면 재를 이렇게 놓거나 쌀을 놓거나 그래서 뭐가 됐나 하고 볼 때에 새 발자국도 있고 뱀이 기어 간 것도 있고 또 사람 발자국도 있고 별의별 발자국이 다 난다 합니다. 그것이 왜 그렇게 됐는가. 그것이 식만 남아서 자기가 분간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아까 얘기한 거와 마찬가지로 눈 가리고 귀 막고 코를 막아서 만약에 그렇게 놓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와 똑같습니다. 그래서 암흑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밝은 불빛을 못 봐요. 내 마음의 불빛이 없으니 어찌 보겠습니까? 그래서 일로도 가고 절로도 가고. 부처님의 그 뜻은 만사만생이 다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고 이렇게도 되는 원리가, 누구가 잘되고 싶지 못되고 싶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못되고 싶어서 못되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눈이 없고 귀가 없으니깐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얼마나 무서운 법입니까?
그러니 그 식에 의해서, 우리가 이 공부의 도리를 모르면 그렇게 우리가 눈 가리고 코 막고 귀 막고 다 이렇게 아주…. 송장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분별하겠습니까? 고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금방 이 자리에서 죽었다 하면은 그것은 썩지도 않은 그 송장이 왜 보지 못합니까? 죽었기 때문입니다. 의식이 없습니다. 분별이 없습니다. 선천적인 식만 남아서 이리저리 이렇게 자기가 분간을 못하고 캄캄하니까 암흑인데 어떻게 발을 한 발 떼어 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무서운 도리죠.

『뜻으로 푼 반야심경』에서 주문이란?
문) 스님께서 한글로 풀어 놓으신『뜻으로 푼 반야심경』에 보면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 깊은 미지의 주문은 진실하여 허망치 않음을 알라. 일체 고난에서 벗어나리라. 이에 깊은 한마음을 깨닫는 주문을 설하노니….’ 여기서 말하는 주문에 대한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답)
그건 선지식들께서 그런 말씀을 해 놓으신 거를 한번 뒤집어서 자기 걸로 만들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말하자면 그 선지식도 둘이 아닌 까닭에 내 불성 주인공에 모든 것을 털어 놓고 놓고 산다면 그것이 바로 주문입니다. 그 뜻이 주문입니다. 그 모든 걸 거기다가 주문을 해서 놓는다면, 주문이라 그런다면 어디 한 뭐를 놓고 주문을 하는 게 되지만 이건 주문이 아닌 주문입니다. 나 아닌 나가 나한테다 그렇게 하는 거죠. 그래야만이 자기와 자기 아닌 자기와 둘이 아니게 상봉을 해서 행할 수가 있죠. 그래서 그렇게 말씀해 놓으신 겁니다.
암만 선지식들이 주문을 외워서 그렇게 해 줘도, 주문이라는 것조차도 없는 겁니다. 그렇지마는 주문이라고 방편으로 말씀하신 거는 자기가 들이고 낼 때, 자기가 모든 생활하는 데 들이고 내지 않습니까? 들이고 낼 때에 그것이 딴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자기한테서, 한군데서 나오는 겁니다, 그게. 그러니까 거기다 놓고 한다면 그 뜻이 밝아짐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지혜가 넓어지고 한 발자국에 저 우주를 걸으려도 걸을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 뜻을 잘 알아서 행하십시오.

환자들에게 어떻게 정성을 들야 하는지요
문) 저는 한의원을 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큰스님 가르침을 따르자면 어떻게 환자들에게 정성을 들여야 되는 것인지요.
답) 저는 실험을 하기 위해서도 때에 따라서는 다리도 아파 보고 또 의사도 불러 보고 그럽니다. 그래 봤습니다, 한 번씩. 근데 그게 안 낫던데요? 그러니까 이 마음이라는 게, 마음의 의사라는 게 제일이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이 약을 만들려고 애를 쓰고 그 만들어 놓은 거를 먹이려고 앨 쓰지 말고 진짜 소소한 데는 좀 가만히 놔두는 게 외려 결론적으로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서 그 관하는 걸 가르치면서 이렇게 음식도 뭐 비싼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싸도 그저 사람한테 참 좋은 게 있지요. 신선하고 좋은 것은 막 먹어도 괜찮고 비싸지 않으니깐 좋고, 그런 거 요새 참 좋아요. 비싼 것이 외려 간혹 좋지 않은 일이 많죠. 그래서 없던 병, 이름도 모르던 병들이 생기고 그러지 않습니까, 지금. 이름 없는 걸 먹기 때문에 이름 없는 병이 생기죠, 모두. 그러나 이 마음으로 고칠 수 있는 이런 마음의 약이라는 게 이거는 어디에 가도 쓰임새가 되고 어디에 가도 없어지지 않고, 만들려고 앨 쓰지 않아도 될 수 있고, 누구든지 다 줄 수 있고, 또 가지면 자기 게 그냥 되고, 다리 아픈 데는 다리 아픈 약이 나올 거고, 눈이 아픈 데는 눈 아픈 약이 나올 거고, 배가 아프면 배 아픈 약이 나올 거고, 다 그렇게 천차만별로 다 나올 거 아닙니까? 그런데 보조하는 거는 그대로 해야죠. 영양을 좀 있게 한다든가 또는 보조를 해서 괜찮게 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은 의사님들이 해야 된다 이런 문제들 말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살기가 좋겠습니까.
이 아픈 사람을 많이 접하니깐 보시겠지만 그 어디가 아프든지, 많이 아프든지 적게 아프든지 그 아픈 거는 정말이지 괴로울 거예요. 그러니까 괴롭지 않게 살게끔 하기 위해서 이 마음공부를 하는데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 아프질 않아야 괴로움이 덜하죠. 그래서 좀 편안하게 관법을 좀 가르치시고 그렇게 하시라고 간단하게 아주 주인공을 믿고 그렇게 하라고 그러고 그저 약을 방편으로 주시되 그냥 정성껏 해야 합니다.
그냥 관하시고 정성껏, 이 마음의 진짜 정성이냐, 의사로서 그냥 약을 지어주는 거냐, 이것이 다르죠, 전부. 의사가 벌어먹기 위해서 약을 지어주는 게 아니라 ‘진정코 사람은 아프면 정말 모두가 괴로운 것이구나.’ 그러고 괴롭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한다 이러면은 그 정성이 지극하게 거기까지 미치게 되죠. 그 사람 속까지 미치게 돼서 그 사람의 병이 그냥 앨 쓰지 않아도 나을 수 있게끔 돼 있죠. 그러니깐 자기의 주인공, 주장자를 진짜로 믿으세요. 그 별성을 말입니다.

아이를 무척 갖고 싶어요
문) 요즘은 일부러 아이를 갖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는데 저희는 아이를 무척 기다리는데도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아이가 잉태되려면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관해야 하는지요.

답)
그것이 이 아기가 들어서기 이전에 관하라는 것도, 그게 태교도 거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게 우리가 무슨 관하라면 그냥 한 가지만 가지고 관하는 게 아니라 시시때때로 바뀌지 않습니까, 관하는 도리가. 시시때때로 바꿔지는 대로 관하는 거죠. 그러면 태교는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겁니다. 태교는 애가 생기기 전에부터 태교가 돼야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은 두 엄마 아빠가 인연으로 인해서 모습은 형성시키지만 생명력을 주지는 못해요. 그래서 태어날 애기가 생명력 원소를 가지고 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태어나게 돼 있어요.
그러니깐 지금 현재 나가 과거 나를 진짜로 믿어야 된다. 그게 보물이에요. 근데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자불이라고 그러거든요. 깨달으면 자불이 됩니다. 그러니까 어린앨 못 낳는 것도 그거 태교로다가 하는 것도 되지만, 태교를 하면서도 문제는 이런 게 있죠. 아들 낳는다 딸 낳는다. 딸을 낳으면 그 가족의 몇 대를 아들을 낳지 못해서 애를 쓰고 그런 사람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봐서 관하는 겁니다. 또 남자가 기가 세다 이런다면, 즉 말하자면 남자를 낳게끔 되겠지요. 근데 여자가 기가 세다 그러면 딸을 낳게 돼요.
그렇기 때문에 아들을 원한다면 좀 저거 한 사람은 그거를 잘 알고 그저 남편을 잘 먹여서 그 기가 좀 일어나도록 관해 주는 거죠. 이게 보고 듣고 그러면 이거를 해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도 봐서 하는 겁니다. 봐서 관할 때 그렇게 관하고 그러면 그게 태교가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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