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예술작품은 위대한 경전

▲ 경주 황복사 석탑에서 발견한 ‘금제 여래입상’
〈미술사 용어 바로잡기〉 연재에서 다루는 주제어들은 모두 논문으로 써야할 큰 주제들이다. 그만큼 용어가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 많은 용어들을 논문으로 쓸 수 없으므로 비록 짧은 글로나마 바로잡고 있지만, 하나의 작은 소논문(小論文)의 성격을 지닌다. 그릇된 용어를 바로잡으려면 충분히 증명해야 하기 때문에 글이 길어질 수밖에 없는데, 글이란 무릇 길다고 좋은 것이 아니고 짧다고 부족한 것이 아니다. 〈반야심경〉은 극히 짧음에도 다른 긴 경전에 못지않으며 불교사상의 중요한 핵심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연재는 단지 틀린 용어를 바로잡는 것이 아니고 한국미술문화를 올바로 잡아가고 있으나, 더 아나가 진리의 세계에 이르는 즉, 법계(法界)에 이르는 길고 긴 역정(歷程)이라 하겠다. 그 용어 하나하나가 단지 용어가 아니고 각각 절대적 진리를 함축하여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틀린 용어들을 바로 잡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올바른 여래의 본질과 법계의 올바른 본질에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가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사에서 혁명적이라 할 선종(禪宗)은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기치를 드높이 들고 있으나 인간은 문자언어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경전과 참선을 병행하는 대 타협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누구나 고려 시대의 고승 지눌(知訥)을 알고 있다. 당시의 불교계가 선종과 교종의 대립으로 극심하던 때, 교종의 가르침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선종의 가르침을 섭렵하였고, 그 합일점과 조화를 모색하여 꾸준한 구도 끝에 '마음이 부처' 라는 선종의 종지에 의거하여 먼저 깨닫고 수행하는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였다. 마침내 그의 뜻이 이어져서 선종과 교종을 조계종에 통합하여 불교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 지눌이 열반에 들자 왕은 '보조국사(普照國師)' 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보조국사'의 보조(普照)는 어디든 평등하게 비추는 햇빛의 의미여서 바로 비로자나(毘盧遮那)라는 뜻이다.

그런데 최근 10년 전부터 조형언어를 해독하면서 조형미술에서 문자언어나 불입문자의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절대적 진리를 읽어낼 수 있었다. 조형미술은 단지 불교를 설명하는 것이나 장식이 아니라 아니고 문자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의 세계를 감동적으로 전해주고 있는 조형언어임을 깨닫게 되어 세계의 보편적인 조형언어를 해독하는 작업으로 확대하고 있다. ‘조형미술품은 여래나 보살의 현현(顯現)’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하여 최근 펴낸 〈수월관음의 탄생〉(글항아리 펴냄)이라는 저서는 고려시대의 수월관음 그림 한 편으로 수월관음의 본질을 밝힌 것이어서, ‘하나의 위대한 예술작품은 하나의 위대한 경전’이라고 감히 선언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조형언어에서 조형문법을 찾아낼 수 있고 새로이 해석할 수 있고 새로이 창조적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 연재는 바로 조형언어를 해독해 가면서 여래를 찾아가는 길고도 긴 역정(歷程)이라 할 수 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天路歷程: The Pilgrim's Progress) 이라는 책은 19세기까지 기독교인들의 베스트셀러였다. 생명으로 가는 문은 좁고 길은 협소하여 찾는 사람이 적다고 했다. 그들은 천국으로 가는 길은 고독하고 유혹과 미혹이 많은 어려운 길이라고 믿었다. 천로역정이라는 책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읽는 사람은 적다. 이에 대응하여 이 연재는 〈법계역정〉(法界歷程: 법계에 이르는 여정)이라 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인데, 조형언어를 해독하여 가는 과정에서 그 궁극의 길은 고난의 길이나 좁은 문이 아니고, 환희의 길이며 넓은 문임을 알았다. 영원한 생명의 문으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것도 알았다. 우리는 여래가 계시는 법당으로 가려면 수많은 문(門)을 거쳐야 한다. 여래를 만나려면 수많은 문을 거쳐야 하는데, 그 수많은 문들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잘못 알고 있는 문들을 통해서는 결코 우리는 여래를 만날 수 있는 올바른 길로 들어설 수 없다. 용어(用語)라는 것은 문(門)과 같다.

옛 예술가들은 고승들에 못지않게 조형미술에 고귀한 진리를 조형언어로 알차게 담아왔다. 그런데 우리는 조형미술을 온갖 오류로 더럽혀 왔기 때문에 진리에 접근할 수 없었다. 틀린 용어들인 악마 파순들 때문에 올바른 접근이 차단되어 왔으며 제3의 길을 개척할 수 없었다. 우리는 조형미술을 올바로 해독하여 ‘진리에 이르는 제3의 길’을 개척하여 나아가는 순례자가 되려한다.

 

대좌·연화대좌·수미좌·수미단이 아니다

여래가 정좌하여 앉거나 서 있는 자리를 사람들은 단지 대좌(臺座)라고 하거나 수미좌(須彌座)라 한다. 공양물을 놓기 위해 좀 넓으면 수미단(須彌壇)이라 한다. 대좌 가운데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연화대좌(蓮花臺座)이나 이 용어도 앞으로 고려해 보아야 할 용어이다. 그런데 대좌가 수미산을 본 딴 모양이라는 일본학자들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여 수미좌나 수미단이란 용어를 많이 쓴다. 이 용어는 일본 식민지시대에 들어온 말이다. 즉 수미산 정상에는 도리천이 있으며 제석천이 머물고 있는 것이지 여래가 머물러 있지도 않을뿐더러 그 정상에 앉아 있는 것도 아니다.

수미산은 불교 이전부터 있던 인도 본래의 우주관의 산물인데 그 산의 모든 것을 그대로 불교의 모든 것으로 설명하려니 그 오류가 산처럼 쌓여가는 것이다. 문자언어로 쓰여진 모든 이야기에는 오류들이 엄청나게 많다. 지금까지의 길은 반야의 길이 아니라 파멸에 이르는 길이다. 여래가 앉거나 서있는 자리를 대좌라고 부르는 것은 여래를 바라보고 사람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여래가 앉아 계시는 자리는 대좌나 수미좌나 수미단이 아니라, 여래가 영기화생(靈氣化生)하는 극적인 광경을 보여주는 큰 가르침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 자리를 잘못 부르고 있거나 기록이 있어도 의미가 없으므로 결국 대부분의 용어가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기에 필자가 숙고 끝에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수많은 용어들을 올바로 잡아가는 보편적 방법론은 바로 영기화생론(靈氣化生論)이다. 그 이론이 정립되자 수많은 용어들의 오류가 수면 위로 또 올랐기 때문에 그 이론으로 풀어낼 수밖에 없다. 고대문헌이라고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 모든 기록은 조형미술이 만들어진 다음, 훨씬 후대에 잘못 기록된 것이 많다.

여기 경주 황복사 석탑에서 발견한 금제 여래입상이 있다. 692년 이전에 제작한 삼국시대 양식을 보여주는 불상으로 높이는 14센티에 지나지 않으나 우리나라 불상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조각품 가운데 하나다. 자, 이 여래상은 단지 대좌에 서 계시는 모습이 아니다. 그렇다고 연화대좌위에 서 계시는 것도 아니다. 수미좌나 수미단에 서 계시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여래는 우리에게 어떤 광경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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