⑬ 선학원과 만해 한용운

시인과 종교인으로서
민족 독립과 자생 고뇌
선학원 이사로 활동하며
한국 임제종 운동 이끌어
신간회 활동하며 고초도

“청년이여 만해를 배워라”
동시대 지성들 극찬의 평가


▲ 2010년 선학원 중앙선원에서 열린 만해 스님 추모 다례제에서 스님의 자제인 한영숙 여사가 헌화를 하고 있는 모습.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종교인이었던 만해 한용운 스님을 기리기 위한 행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6월 29일 선학원의 중앙선원(中央禪院) 법당에서는 만해 한용운(1879~1944)스님 열반 69주기 추모다례재를 봉행하였다. 스님의 삶을 민족의 독립과 한국 불교의 정체성과 독자성 구현을 위한 몸부림으로 규정짓는다면 이날의 다례재는 스님의 행적을 기리는 가장 어울리는 자리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한국근대사와 근대불교사에서 만해 한용운 스님의 가치는 확고하다. 불교계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이 희박해져가는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 존재자체가 더욱 남다르게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스님의 행적을 두고 동시대를 살았던 지성(知性)들은 말을 아끼지 않는다.

독립운동가이자 국학연구자였던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3~ ?)는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으니, 조선 청년은 만해를 배우라”고 했다. 동화사 학인들과 만세운동을 부르기도 했던 고봉(古峰, 1890~1961)스님 역시 “한용운은 조선만이 아니라 세계의 한용운”이라고 극찬했다. 더욱이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 1888~1968)는 “7000 승려를 다 합해도 만해 1인을 당하지 못하니, 만해 1인을 아는 것은 1만 명을 아는 것 보다 낫다”고 평가하였다.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때 더한 생동감과 진한 여운을 느낄 수 있다. 만고(萬古)에 전하는 이름 없는 비석 글이기 때문이다. 현재 후학들의 스님에 대한 추모는 문학과 종교인으로 자리매김을 하고는 있지만, 그 원천은 한국불교를 포함한 민족의 진정한 독립과 자생을 위한 고뇌의 행적에서 찾아야 할 듯싶다.

만해스님과 선학원의 관계는 선학원의 직접적인 창설배경이기도 한 임제종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0년 10월 6일 굴욕적인 한일불교협약인 조동종맹약(曹洞宗盟約)이 조선의 원종과 일본의 조동종 승려 사이에서 체결되고, 다음 달인 11월 6일 이 맹약에 반대하여 임제종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맹약의 핵심은 당시 한국 불교계의 대표기관인 원종(圓宗)이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기 위해 일본 조동종의 고문을 위촉하고, 조동종의 한국 포교에 편리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더 가관인 것은 “조동종무원이 필요하여 조선에 포교사를 파견할 때는 조동종무원이 지정하는 사찰을 숙소로 정하여 포교 및 교육에 종사케 할 것”이다. 합방된 직후고, 그 이전부터 일본의 야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시점에서 이 맹약은 동등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불교의 부흥을 도모할 때 원종(圓宗)의 맹약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다른 종단을 별도로 세워야 원종을 자멸케 함이 첩경이라는 견지에서 조선 고유의 임제종을 창립하였다.”

▲ 남한산성 만해기념관의 흉상
만해스님이 1931년 박한영·진진응 스님과 창종한 임제종에 대해 술회한 부분이다. 그러나 한국불교를 장악하기 위해 사찰령 반포를 앞두고 있었던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1912년 4월까지만 해도 서울 대사동(大寺洞)에 개설되었던 ‘조선임제종 중앙포교당’간판은 철거되었다. 당시 임제종의 관장대리였던 만해스님이 한국불교(임제종)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고 싶었던 포부는 물거품이 되었으며, 이 일로 스님은 경성 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압송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제종운동을 통해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독자성을 지키고자 했던 스님들의 노력은 선학원 설립으로 이어졌다. 예컨대 남전(1868~1936)·도봉(1873~1949)·석두(1882~1954)스님이 설립자금을 모았고, 임제종운동에 참여했던 만해·용성·만공스님 등은 설립이념을 민족불교의 확립과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두었다.
만해 스님은 선학원 설립 이듬해 쇠락한 한국 선불교를 중흥시키고자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를 조직했을 때는 수도부(修道部) 이사소임을 맡았다. ‘이사(理事)’소임은 선학원이 선우공제회를 통해 재단법인 인가를 받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였다.

만해 스님은 이후 백담사와 선학원에서 번갈아 가며 주석하였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이 회동서관(匯東書館)에서 간행되었을 때는 선학원의 6대 이사장을 역임하셨던 석주 정일(昔珠正一, 1909~2004)스님이 인쇄부터 책 만드는 일까지 도와드렸다고 한다.

이 해에 스님은 6·10만세운동으로 선학원 근처에 잠복해 있던 일본경찰에 의해 강제 연행되기도 하였다.
6·10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純宗)의 인산일(因山日, 장례식)을 계기로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일제의 억압과 탄압이 날로 심해지자 학생들이 중심이 되고 민족진영과 공산사회주의자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독립만세 시위운동이었다.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게 붙잡힌 학생 수는 서울에서 210여 명이었고, 전국적으로는 1,000여 명이나 되었다.

이 6·10만세운동에 자극받아 1927년 국내에 있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공산주의자 간의 타협에 의해 반일민족유일당운동인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었다. 만해 스님은 신간회 창립 당시 중앙집행위원이 되었고, 7월 10일에는 경성지회장에 임명되었다. 석주 스님의 회고에 의하면 “경성지회장 시절 선학원에서 회의를 많이 했다”고 한다.

신간회는 일제강점기의 가장 큰 합법적인 사회정치단체였지만, 결사체(結社體)로서 항상 일제의 주목을 받았다. 1928년 말에는 국내외에 143개의 지회와 3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으니 당연히 일제의 감시대상이 될 수밖에 없어 이후부터는 신간회가 주도하는 대규모 집회를 금지하기도 하였다.

이상하게도 그이 방에는 책이 한 권도 없었지. 각 종교에서 여름에 한 번씩 공동 강연회를 개최했는데 한용운스님이 제일 인기를 끌었지. 마치면 예수교 사람들은 처음부터 질문하지 말라 하고 질문을 안 받았어. 그런데 한용운 스님은 질문을 받는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매달리고 난리가 났지. 그러니까 사회자가 나와서 미안하지만 개인적으로 질문하라고 떼놓고 그랬지. 아주 웅변가야 
-석주스님의 만해스님 회고에서-


일찍이 스님이 술회한 대로 ‘넓은 세계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1896년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입산한 이래 부처님의 말씀을 비롯한 불가(佛家)의 내전(內典)을 기반으로 불교혁신론의 기초가 된 외전(外典)의 탐독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그였다.

더욱이 1908년 5월부터 약 6개월간 일본을 방문, 주로 토쿄(東京)와 교토(京都)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물을 익히고, 일본의 풍물을 몸소 체험하였고,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하며 민족의 암울한 현실과 나라 잃은 백성의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끼기까지 했던 것이다.

잔재주와 현란한 말재주에서 비롯된 연설이 아닌 몸으로 느끼고 골수에 사무친 정신으로 쏟아낸 한 덩어리 붉은 피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선학원 이사장 법진스님은 만해스님을 위한 추모사에서 위당 정인보의 애도사 한 구절을 인용하였다. “풍란화(風蘭花) 매운 향내. 당신에야 견줄 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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