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걸 한마음 속에 되놓아야 내가 홀연히 밝아져

▲ 그림 최주현


우리가 이 세상에 나왔다면
앞뒤가 막힘이 없이
일체가 한마음 한뜻으로서
이세상의 물질이 오로지 다 공(空)했다고 하는 뜻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큰스님 :
어떻게 형제법회 회원이 아닌 분들이 이렇게 와서 주욱 앉았습니까?

사회자 : 큰스님께 미처 말씀 못 올렸는데요, 서울 시내의 여러 초등학교에서 근무하고 계시는 불자 선생님들입니다. 오늘 특별히 큰스님 말씀 듣고자 이렇게 참여했습니다.

큰스님 : 우리 마음이 부처라고 하는 뜻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마음이 즉, 불(佛)이다.’ 이런 말들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내가 부처라고 하면서 그대로 부처 노릇을 하는 걸까요? ‘마음이 즉 불이다. 부처다.’ 이러는 거기에는 삼학(三學)의 진의도 들어 있으며 또는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부처라고 하는 그 뜻도 거기 다 들어 있으며, 우리들의 일체 생활하는 법이 거기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악과 선도 거기에 다 들어 있고 말입니다.

그 뜻을 새기자면 참으로 많은 말이 필요하겠죠. 그런데 마음! 마음이 도대체 어떤 놈입니까? 부처라고도 하고 중생이라고도 하고…. 그런데 그 두 가지, 부처라고도 하고 중생이라고도 하는 중생과 부처가, 즉 말하자면 둘이 아닌 그 도리에서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그 생명들만 해도, 그 의식들만 해도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한두 개라야죠. 그러면서 마음은 색깔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고 또는 볼 수도 없으니까 광대무변하다는 얘기입니다. 생활 속에서 그 뜻을 잘 아신다면 우리가 자유스럽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몸이 집일 수도 있지만 자기의 시자(侍者)일 수도 있습니다. 즉, 종이라고 할 수도 있죠. 여러분은 듣는 데 따라서, 보는 데 따라서 작용을 합니다. 그러니 각자 여러분의 진실한 그 마음은 어디로 가 버리고, 그저 나오는 대로 움죽거리죠.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일도 화를 벌컥 내고 누가 조금만 기분 나쁜 말을 해도 화를 벌컥 내는 그 마음, 그 듣고 화내는 마음은 뭐며 또는 ‘내가 이럭하면 안 되지.’ 하는 마음은 또 뭡니까?

마음이 부처라고 해서 ‘나도 부처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졌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나라는 욕심이 들어가서 더군다나 더 공부를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몸속에 있는 그 중생들이 누구로 인해서 이렇게 모두가 뭉쳐 있습니까? 악과 선이 거기에 다 있다고 보는데 그 마음 하나의 지배인이 통솔하게 돼 있습니다. “자기 마음을 닦아라.” 또는 “닦을 게 뭐 있어서 닦느냐?” 이렇게 말은 모두들 청산유수로 하지만 진짜 행하려면 어렵습니다. 닦아야 하고 다스려야 하고 그렇게 해서 점차적으로 가다 보면 ‘허허, 이게 닦을 것도 없고 다스릴 놈도 없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겁니다. 다스리는 놈, 또 다스림을 받는 놈, 그놈들이 따로 없죠. 생각해 보십시오. 몸속에서 수없이, 헤아릴 수 없이 악업 선업이 일어납니다. 과거의 여러분이 지은 바 그대로 입력이 돼서 하나도 남김없이 낱낱이 나오는 거죠. 낱낱이 나오는 대로 여러분은 속아요. 바깥 물질세계에서 보고 듣는 대로 속고 끄달리고, 안에서 일어나는 대로 속고 끄달리죠.

그런데 마음이면 그냥 마음이지 왜 한마음이라고 그랬느냐? 우리 이 한 몸을 봐도 한마음이요, 바깥의 모두를 봐도 한마음입니다. 항상 여러분한테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 날 때 뼈와 살을 빌려서 몸 하나를 받았지만, 과거에 살던 인연 인과로 인해서 그 업이 뭉쳐서, 악업도 뭉치고 선업도 뭉쳐서 이렇게 나온 것이라고요. 그런데 그것을 지켜보면 우리 마음이 얼마나 요사한지 말입니다, 참 묘하기도 하고, 어떤 때 보면 조잡하기도 하고, 어떤 때 보면 땅에 붙어사는 진드기와 같기도 해요. 우린 한 그릇에 붙어서 진드기처럼 사는 하치 않은 벌레와 같은 그런 기분도 들어요. 저 나무나 식물을 보면 진딧물이 착 그냥 앉아서 졸졸이 졸졸이 붙어 있죠. 어떤 땐 그걸 보면서, 예전 얘기입니다마는 ‘아하! 우리 인간도 한 나무에 붙어서 저렇게 진딧물처럼 빨아 먹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 나왔다면, 그 장하고 그 넓고, 앞뒤가 막힘이 없이 일체가 한마음 한뜻으로서 이 세상의 물질이 오로지 다 공(空)했다고 하는 뜻을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몸속에 과거에 살던 인과가, 예를 들어서 남을 이익하게 해서 선업을 받은 것도 있고, 남을 악하게 해서 악업을 받은 것도 있다 이거죠. 그런데 그건 참회를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글자를 보고 꿰뚫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경을 달달달 외워서 아는 것도 아니다 이거예요. 이것은 못났든지 잘났든지 남녀를 막론하고, 내 스스로 나를 다스리면서 그릇을 비워야 홀연히 맑게 나를 발견할 수가 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이 여기를 수없이 오고 가면서 공부들을 하셨는데 여러분이 질문하시기 이전에 내가 먼저 질문을 해야 할까요? 여러분이 질문을 해야 할까요? 오늘은 서로 질문하면서 주고받는 한마당입니다.

어저께도 얘기했지만 꽃 한 송이를 든 것이 한마음의 뜻이고, 다보탑(다자탑, 多子塔)에 반좌를 내준 것이 한자리의 뜻이며, 진드기 발 하나도 빼놓지 않는 것이 한발의 뜻이라는 겁니다. 평발! 진드기 발도 발은 발입니다. 그게 평발입니다, 하나도 빼놓지 않은 발. 나무 한 그루가 이 땅에 섰어도 그것도 바로 빼놓지 않음입니다. 평발이라는 것은 부처님 발이 뭉툭하게, 그냥 반듯하게 돼서가 아니라, 수많은 분들의 발이 한발로 이 자리를 같이 디뎠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기만이 위대하고, 자기 자리만이 자기 자리인 양, 자기만이 우뚝선 것인 양 이렇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또 진리가 그러하니까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몸이 있어서 움죽거릴 때에, 실오락지 하나 걸치지 않고 비워진 그 마음이라야 실오락지 하나 버리지 않는 뜻이 나옵니다.

이제 앞으로는 여러분이 질문도 하고 그러십시오. 물론 부처님께서는 남녀를 막론하고 애들이고 어른이고 그 차원에 따라서 대기설법(對機說法)을 하셨지만, 나도 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떤 때는 동문서답처럼 여러분한테 던지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들으면 없어지고 보면 없어지고….
옛날 얘기 하나 할까요? 옛날에 제가, 그러니까 한 10년을 넘게 산으로 산으로 다녔습니다. 다니다 어느 날 하도 지쳐서 쓰러지게 생겼습니다, 저녁에. 그때 그믐밤이 돼서 캄캄했습니다. 그런데 자성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날까지 10년 동안을 다니면서 본 것이 얼마나 되느냐?’ 그러신단 말입니다. 만약에 여러분한테 그렇게 물었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왜 대답이 없습니까? 얼마나 봤느냐고 물었다는데…. 그러면 여러분이 질문들 하십시오.

질문자1(남) : 보았다고 하는 그 말에 본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는 데에 있기 때문에 봤다고 말을 하면 본 것이 아니니 그냥 그렇게 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밤은 빛이 없기 때문에 밤이지 낮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어서 봤다, 안 봤다 하는 그것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에 집착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큰스님 : 지금 이렇게 질문을 하고 답변을 하는 거는 말씨름하는 그런 답변이 아니에요. 네? 그러니까 여러 말 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 그런 거는 우리 차차 알기로 하고요. 스스로 알아야지 내가 대신 밥 먹어줄 수는 없으니까 열심히 해야 될 거예요, 아마. 네놈만이 알 수 있다고, 네놈만이 네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모든 것을 보고 안 보고 알아서 다 증명할 수 있는 놈이 바로 그놈이니까요. 내가 왜 이렇게 여러분한테 채찍질을 하고 가느냐 하면, 우리 지금 한생각에 이 세계를 좌우할 수 있는 도리를 부처님께서 가르치셨기 때문에 그 진리를, 그 진의를 알아야 되니까 이렇게 하고 가는 겁니다.

이 몸 가지고는, 아까도 얘기했지만, 대낮에 아무리 봐도 다 보지 못해. 다 보기는커녕 오히려 산란만 일으키지. 본 것도 없이 산란을 일으키고 그러지. 그런데 이 지금 공부를 하는 것은 마음의 눈과 마음의 귀로 듣고 보고 해서 하는 것인데, 그것도 부처님께서는 “듣는 것을 안다고 해도 그것이 도가 아니니라. 이 세상을 다, 삼라대천세계를 다 본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니라.” 그러셨죠.

그러니 지금 손이나 발이나 귀가 각각 내가 제일이다, 내가 제일이다, 내가 제일이다 해도 핵심은 이거를 한데 모아서 한생각이 두뇌로 올라가서 두뇌에서 착, 그 결정을 짓는 데 있는 거거든. 그러니까 이거는 무슨 뭐, 팔이 이렇다, 다리가 이렇다, 눈이 이렇다, 귀가 이렇다 이런 말 할 겨를도 없는 대답이라야 된다 이 소리지. 그러니 그런 것을 누구가 대신해 줄 수 없으니까 우리가 가만히 캄캄한 데서…. 그전에도 얘기했을는지 모르죠. 밤이나 낮이나 그거를 둘로 보지 말라 하고선 산을 헤맸단 말이야. 그래 누가 보면 미쳤다고 그럴 테지?

그런데 그렇게 밤이나 낮이나 다니다 보니까 밤도 밤이 아니고 낮도 낮이 아니더라고. 그런 말, 그런 생각은 전부 하고들 있을 거라고요, 우리 지금 신도님들이.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전부 공해 버렸는데 밤이 아니다 낮이다, 낮이 아니다 밤이다 이런 겨를도 없을 테죠. 내가 아까부터 얘기한 게 다 가 버리고 없다고, 지금. 그러니 한 사이가 없다고. 우리가 지금 살아도 사는 사이가 없고, 가도 가는 사이가 없고 와도 오는 사이가 없고, 봐도 본 사이가 없고 들어도 들은 사이가 없다 이 소리야, 너무 많아서. 어떤 거 들었을 때 내가 들었다고 할 수 없잖아. 공했어, 모두가.

그걸 어떻게 여러분을 이끌어서 참으로, 여러분이 실천하게 할 수 있을지…. 지금 우리나라에 대한 것만 해도 그렇죠. 정말 손바닥만한 나라가 지금 반동강이로 잘려서 있지 않나, 전자에 일본 사람들한테 그렇게 휘달리질 않았나, 중국 사람들한테 휘달리질 않았나, 사글세 방을 들어 가지고서는 온갖 거 다 내놓으라고 휘달림을 받고 이렇게 살아왔는데 너무 비참하지 않았남? 나 어려서만 해도 너무 비참해서 신발도 못 신고 반쪽이 다 닳아나간 거를 앞에만 신고 다닌 적도 있었으니까. 지금은 누구도 부럽지 않죠? 그러나 그때 뭘 먹고 살았든 간에 상관없이 지금 아무리 좋은 거를 먹어도 여러분은 귀한 줄을 모르죠. 그래서 조금 저거 하면 다 내버리고 그러죠, 흔하니까. 상황에 따라서 그렇게 되는 거죠. 음식이 쉴 사이가 있나? 허허허….

그 대답을 잘하려면…. 보세요. 지금 24시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살아나가는 동안에 흐르는 물 소리를 들었죠, 흐르는 물을 봤죠, 또 그게 얼었죠, 파도를 쳤죠, 잔잔했죠, 온통 바람이 불면 나무가 흔들렸죠, 가을이 되면 낙엽이 지죠, 떨어지죠? 사계절을 다 볼 때 말입니다. 이거는 이것대로 ‘참, 나 아님이 없다.’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잔잔한 물을 보면 사람의 마음이 아주 숙연해지고 잔잔해집니다. 파도 치는 걸 보면 아주 산란해집니다. 그러니 이것도 스승이요 저것도 스승이요. 야, 가을에 낙엽이 져서 뚝뚝 떨어지는 걸 보면 구슬프고 말입니다. 날이 추우면 아주 구슬퍼지죠. 요렇게 간사해요. 그러고도 그렇게 간사한 게 간사한 게 아니라 그게 철칙이란 말입니다, 그런 게.

그래서 저 나무들을 보면 모두가 나같이 살라고 하는 겁니다. 나같이 살라 이러는데, 그런다고 해서 내가 그냥 다 쫓아가면 안 되죠. 또 그게 좋으면 그와 같이 살면서 넘어가고 넘어가고 넘어갑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 올 때도 이것 보고 저것 보고, 이것 보고 저것 보고 넘어왔습니다. 그런데 본 게 없습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본 게 없습니다. 왜 본 게 없느냐? 그 눈 가지고는 금방 보고 금방 넘어가고, 금방 보고 금방 넘어갔기 때문에 담아 두질 않았어요. 담아진 게 없어요.

그래서 이 심안(心眼)으로 본다면 천체를 보겠죠?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모든 걸 보기는 하나 듣지 못하면 또 안 되죠? 만약에 귀머거리가 보기만 하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테레비 나오는 데도 그렇습니다. 테레비가 말이 안 나와, 그림만 나오고. 그런 격이다 이거야. 그럼 무슨 재미입니까? 그렇죠? 또 이제 들리긴 하나, 말은 나오나 보이질 않으면 안 되죠. 그래서 바로 천안통, 천이통 이렇게 말한 거예요. 그래 이거를 또, 보고 듣는다 하더라도 내가 남의 마음을 모른다면 어떻게 접근을 합니까? 네?

그런데 사람과 사람끼리만이 아닙니다. 천체입니다. 아까도 저기 처사님이 얘기했지만 내 마음을 소에게 주면 소가 내 마음과 하나가 되는 거죠. 소 마음을 내 마음속에다 넣으면 내 마음과 똑같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실험을 안 해 보셨는지 해 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차원이 개구리의 마음이라면, 내가 개구리가 돼 줘야 한마음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죠? 아주 위대한 그릇이다 이런다면 내가 위대하게 거기 접근을 해야 수준이 맞아서 한마음이 되죠. 돼지라 하면 내가 돼지의 마음 그릇하고 똑같이 돼야만 돼지하고 한마음이 될 거라 이겁니다. 내가 물 같은 마음을 가져야 물이 한마음이 되죠? 그와 같은 겁니다. 이것이 한마음이란다고 그냥 말로만 한마음 한마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천체가 다 그렇습니다. 태양하고도 그렇고 금성이나 수성이나, 달, 별, 모두가 다 그렇죠. 우리 인간들도 다 그렇고 무정물 또는 식물, 일체 생물이 다 그렇죠.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왜 ‘심즉시불(心則是佛)’이라고 그랬느냐. 그렇기 때문이에요. 그 마음을 내가 알아야 한마음이 돼서 그 그릇에 딱 맞추죠. 그래서 삼천대천세계를 넣어도 그릇이 모자라지도 않고 크지도 않더라. 삼천대천세계를 그냥 씨앗 하나에다 넣어도 맞고, 요런 그릇에다 (컵을 들어 보이시면서) 넣어도 맞고, 허허허…. 그러니까 꺼내도 줄지 않고 넣어도 늘어나지 않더라. 그러니까 모든 게 아무리 꺼내도 줄지도 않는 것이요 그릇이 비지도 않는 것이요, 또 아무리 넣어도 그릇이 모자라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또 두드러지지도 않는다 이겁니다.

이러한 그 마음, 즉 말하자면 내가 저 마음하고 똑같아야만이, 즉 소가 한 마리 있다면 내가 소의 차원하고 똑같아야만이 한마음입니다. 그것 하나를 비유했지만 천체가 다 해당되죠. 즉, 부처님께서는 이걸 만나면 이 그릇에 맞춰서 하나가 되고, 저걸 만나면 저 그릇에 맞춰서 하나가 되고, 요걸 만나면 요 마음으로 하나가 되고 이러니 그걸 부처님이라고 이름을 지을 수도 없고 안 지을 수도 없고, 토끼라고 그럴 수도 없고 부처라고 그럴 수도 없고, 사람이라고 그럴 수도 없고 뭐라고 할 수가 없어.

그러면 보이는 것만 그러냐. 안 그렇다. 보이지 않는 중생의 마음도 똑같이 그렇다 이거예요. 지옥에 들은 아귀, 축생도 그 그릇대로 맞추어서 바로 하나가 됐으니, 부처님 그 마음이 모르는 아귀 중생의 마음속에 드시니 그냥 마음이 밝아지더라 이거야. 예를 들어서 아주 차디찬 물에 뜨거운 물을 부으니까 그대로 따뜻해지더라, 하는 것과 같은 거죠. 그런데 이분은 자동적으로 찬물에 하나가 돼서, 즉 뜨거운 물에는 저항력을 느낄 테니까 찬물에다 찬물을 부어 가지곤 거기서 뜨듯해지는 거라. 이렇게 자동적으로 뜨듯해지는 그거! 아귀, 축생 중생은 찬 거를 뜨듯하게 할 수도 없고 차게 할 수도 없지만, 부처님의 마음은 뜨겁게 할 수도 있고 차게 할 수도 있고, 적게 할 수도 있고 많게 할 수도 있으니까 마음대로 나고 든다 이거야. 그 차원에 알맞게 자꾸자꾸 들고 나니까 삼라만상 대천세계가 어느 것 하나 부처님이 아니 되시는 게 없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남의 마음을 알려면 과거를 또 알아야 돼. 타심통은 남의 마음을 알아야 하는 거고, 또 숙명통은 과거에 어떻게 지내 왔는가? 어디서 왔는가? 뭘 하고 왔는가? 뭘 어떻게 저질렀는가? 이런 것도 한순간에 알아내는 거야. 이게 뭐 두고두고 심판을 해 가지고 알아내는 게 아니야. 그런데다가 부처님께서는 소가 콧구멍이 막혔듯이, 그냥 가고 옴이 없이 찰나찰나, 자기가 원자에서 입자가 수만 개가 돼서 그냥 분자로 화하듯이 이렇게 돼 버린단 말이야. 그렇게 확 퍼져 가지곤 전체를 들이고 내면서, 또 안으로 들여도 한 사이가 없고, 간 사이가 없고 온 사이가 없어. 그렇게 활짝 그 입자가 화해서 분자가 돼서 들이고 내는 작업을 해도 그냥 뭐 여여해. 그러니 그것을 가지고 신족통이라고 했다 이거야. 그래서 내가 그 말을 팩스라고 표현을 했지만 어떻게 부처님의 그 뜻을 가고 옴이 없이 그렇게 광대무변하게 펼칠 수가 있느냐는 것도 되고, 어느 것 하나 건져 주지 않는 것이 없는데 여러분이 그거를 싸악 외면하고 그냥 창살 없는 이 마음으로다가 딱 가려 버리는 거야. 그래서 그거를 모르는 거죠.

또 ‘건져준 게 없다’라고 하는 것은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전부 부처님 아닌 분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은 개구리를 다 건져 줬어도 개구리가 바로 자기인 까닭에 건져 준 게 아니고 건져 줌을 받았다 할 것도 없느니라 하는 겁니다. 이 뜻을 잘 새겨야 합니다. ‘받았다 할 것도 없느니라.’ 그러니까 둘이 아닌 까닭에 받았다 할 것도 없느니라 한 거죠. 그러니 이걸 어떻게 꼬집어서 여러분을 가르칩니까?

그러니 가다가도 집이 내려앉은 걸 보면 ‘아이구, 저 집이 내려앉았네, 저거 어떡하나.’ 하고 생각을 하게 되고, 그저 매사를 보고 듣고 하면 그냥 그렇게 돼. 누가 죽는 걸 보면 슬퍼서 또 울어지죠? 요놈들이 다 그렇게 작용을 해, 그냥. 화나게 작용을 안 하나, 또 나가서 난봉을 부리게 만들지를 않나, 나가서 술 마시게 안 하나, 또 저놈을 원망하게 안 하나. 그냥 매사 걸 다 그러는 거야. 그러니 그걸 다스리면서 모든 걸 거기다가 맡겨 놓는다면 바로 그것들이 점점점점 다 그냥 녹아져. 그 맡겨 놓는 자리는 바로 숙명통 컴퓨터에 입력이 된 데니까 입력이 돼서 나오는 대로 거기다가, 다 한마음 속에서 나온 거니까 한마음 속에다 되놓는다면 그게 다 무너지면서 홀연히 밝아진다 이거죠.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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