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밖에서 내 부처를 찾아서는 아니 됩니다

▲ 그림 최주현

기복신앙이라고 우려하지만…

문)
스님들께서는 기복신앙을 우려하지만 그래도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위안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부처님을 믿는 마음이 진실하면 되는 것 아닌지요.

답)
많은 사람들이 기복으로만 많은 세월을 흘려 왔습니다. 그것이 아주 배서 인제는 아주 바깥에서 빌고 또 바깥에서 구하고 그러는 일들이 아주 습으로 남아 있어서 그것을 녹이기가 매우 힘든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토록 가도 팔자 운명이나 그 인과응보에 끄달리는 이치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품 바깥에서 법을 구하면 안 된다는 얘깁니다. 마음 바깥에서 부처를 찾아도 안 되거니와 성품 바깥에서 법을 구해도 안 된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이 몸으로써 고행을 해서 법을 구하겠다고, 또 옛 성현들이 그 마음을 깨달아서 말씀하신 그 말씀을 좇고, 그분들을 좇아 구하려고 하는 그러한 마음들을 가져서는 절대 그것은 바깥에서 구하는 게 되기 때문에, 결국은 성품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결국은 내 몸으로써 아주 하루 종일 앉아서 눕지를 않고 그런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또 머리를 짜내서 대경(大經)을 쓴다고 해도 아니 되고, 또는 내 몸을 잘라서 태운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 부처를 구하지 못하고 성품의 법을 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몸을 분주히 참, 발이 부르터서 디딜 수가 없이 만들어서 고행을 하면서 정말 몸을 이리 뒤치고 저리 뒤치고, 이리 잘라지고 저리 잘라지고, 이리 찢어지고 저리 찢어지도록 고행을 한다 하더라도, 만약에 마음 바깥에서 구한다면 이것은 절대로, 겁을 거쳐서 한다 하더라도 자기의 참맛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 어른들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죠. 그렇게 찾는 자는, 바깥에서 그렇게 구하고 성품 바깥에서 법을 구하는 자들은, 몸을 또 그렇게 패대길 쳐서 그렇게 고행을 해서 구한다고 생각을 하는 자들은, 모래로 밥을 지어서 바로 법을 구한다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라 이런 소립니다. 모래로 밥을 지어서 밥이 되는 것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걸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우리가 많이 말을 듣는다고 해서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한 믿음을 갖되, 어느 절이든 가 보면 말과 뜻과 행을, 세 가지를 종합해 봐서 이 견해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바로 그것을 진실히 믿고 따르면서 자기 마음 안에서 부처를 구하고 자기 성품 안에서 법을 구하는 그런 이치가 틀림없는 사실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복을 가지고 견해가 밝지 못하면 만약에 진실히 믿는다 해도 그것은 바로 십중팔구 마구니로 빠지기가 쉽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견해가 밝아야 밝게 보고 옳게 행을 하면서 믿음을 진실하게 마음 안으로 굴려서 자기를 자기가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하는 사람들은 앉는다 선다 생각 없이 공한 그 자기 몸을, 즉 말하자면은 화두로 삼아서 일상생활에 일분일초도 끊어지지 않게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처음에는 넓으나 점점 가면서 좁아들고 막다른 골목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마음공부는 처음에는 좁되 점점 갈수록 넓어지면서 이 천지만물이 다 화창하게 빛을 보는 것입니다. 나와 더불어 말입니다. 그렇게 넓어지는 것입니다.

이 공부가 그렇게 묘하고 광대무변한 것은 내 마음 안에, 심원 안에 온 누리의 삼천대천세계 모두가, 모든 법이, 찰나찰나 천차만별로 돼 있는 그 법이 한마음 심원에 들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갖가지로 이름을 붙여서 따지지 않아도, 무슨 경에는 무슨 말씀, 무슨 경에는 무슨 말씀 하지 않아도 그 말씀 자체나 또 그 뜻 자체가 그 심원 속에 다 들어 있는데, 이거를 각자 눈 따로 귀 따로 코 따로, 그렇게 보는 것 따지고 또 귀, 듣는 것 따지고 이러다 보면은, 내 몸 전체의 모든 것을 일일이 따지게 되면은 한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몸을 전체를 가지고 우리가 내고 들이는 것이, 그 천차만별로 돼 있는 법이 다 내 몸 안에 마음이 있고 마음 안에 법이 있고, 법 안에 바로 행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적든 많든 이 뜻을 정렬하게 생각해서 우리는 마음 밖에서 내 부처를 찾아서는 아니 됩니다. 그리고 내 생각하는 이 성품 안에서 법을 구해야 되겠죠.

그러니까 인제부터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서 옷깃을 다시 한 번 여미고 진심으로서 내 마음 안에서 내 자부처를 구해야 합니다. 내 성품 안에서 모든 법을 구해야 합니다. 만법의 진리가 바로 내 마음 안에 들어 있는데, 이 마음 안에 들어 있는 이 묘법을 두고 이 세상에 나왔다가 그냥 가시렵니까. 그 좋은 묘법을 두고 그냥 가시렵니까.

어렁더렁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냥저냥 살다가 그냥 또 허무하게 떨어진다면 세세생생에 이렇게 굴러야 하는 것을 면치 못하며, 또는 더 나가서는 좌천이 돼서 짐승의 허물을 쓰고 또 그렇게 굴러야 하는 그런 이치를 우리는 자세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미거하고 바깥에서만 구하고 항시 그렇게 어리석게만 나간다면 우린 그 인과응보, 이런 것을 떠날 수가 없으며 유전성을 떠날 수가 없다고 수차에 두고 말을 했죠. 자기가 한 것만치 받는다고요. 그러나 이것은 공한 도리를 알고 묘법을 안다면, 바로 내가 한 것도 없고 안 한 것도 없이 그렇게 화창한 날씨에 온 누리에 꽃이 필 수 있고 열매가 맺을 수 있고, 그 열매는 바로 무르익어서 온 누리에 여러 부처들이 다 그 맛을 볼 수 있는 불국토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화두를 받아 정진하고 있는데…
문) 몇 년 전부터 어느 스님에게 ‘무’ 자 화두를 받아 정진하고 있는 불자입니다만 진전이 없어서 갑갑하기만 합니다. 어쨌든지 간에 이 도리를 알고 가기는 해야겠는데 어찌해야 좋을는지요.

답) 우리 불가에서 불법을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참으로 참혹한 일들이 많습니다. 화두를 받았다 하고 그것을 들고선, 자기도 들 게 없거늘, 자기도 공했거늘, 그것을 들고서 온종일 ‘아이구, 이 뭣고? 이 뭣고?’ 이렇게 들고 10년 20년 가면서도 그 뜻을 모르고 돌아가다가, 이 몸이 떨어지면 말도 떨어지고 입도 떨어질 것을….
우리가 딴 데서도 그렇고 화두를, 이 뭣고 화두나 무자(無字) 화두나 시삼마 화두를 받아 가지고 공부하는 분들이 많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분들은 허물이 없고 잘 가르치시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께서, 예를 든다면 벌써 무자 화두나 이 뭣고 화두나, 화두를 어느 스님께서 주셨다 하면은, 그 어느 스님께서 주셨다는 생각 그 자체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의식으로 벌써 그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둘이 되는 것입니다, 벌써. 둘이 되는데다가 또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착을 둡니다. 그러면 벌써 그릇돼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즉, 방하착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릇되게끔 착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여러분이 난 것이, ‘이 육신을 가지고 나온 것이 공이자 색이고 색이자 공이니까, 그대로 그 공이 화두니라.’ 한 겁니다. 내 이 육신 나온 것이 화두자 공이고 공이자 화두니까, 화두를 드는 게 아니라, 공이니까 지금 원형을 이루고 돌아가고 있다 이겁니다. 과거심과 현재심으로 돌아오고 미래도 아직 가지 않았으니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그대로 내가 있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고정됨이 없이 공하였으니, 공에서 나오는 것을 화두로 삼고 그대로 공에다 일임해서 맡겨 놔라.’ 이겁니다. 일일이 그것을 맡기다 보면은 그것이 바로 진실로서의 내 참나를 발견하고 찾는 데 극히 아주 지름길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공했다!’ 이거는, ‘색이자 공이요, 공이자 색이다.’ 이런 것은 ‘프로펠러가 돌아가듯 그렇게 돌아가는 데에 먼지 묻을 것이 뭐 있는가?’ 이겁니다. 육조 선사께서 ‘틀이 없는데 거울이 어디 있으며, 거울이 없는데 먼지 앉을 게 어디 있느냐?’, ‘테가 없어서도 아니고 있어서도 아니다.’ 하는 뜻은 뭐냐? 없다고 하면 없는 데 치우치고, 있다고 하면 있는 데 치우치기 때문에, 그것은 없어서 없는 게 아니라 그렇게 빠르게, 그 프로펠러가 돌아가듯 그렇게 빠르게 돌아가니까 먼지 앉을 게 없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무!’ 했던 겁니다.

세상은 그렇게 빨리빨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가고 있는데 사람의 마음은, 사량적인 마음은 이런 게 어떠니 저런 게 어떠니, 내가 했느니 내가 줬느니, 항상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것이 업보가 되고 또는 유전이 되고 윤회에 끄달리고 그런 문제점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지어서 긁어서 부스럼을 내고 아프다고 울고, 또는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어 놓고 ‘그것은 또 무엇인가?’ 하고 관한다면, 이것은 일치되는 그 한마음이, 즉 부(父)와 자(子)가 상봉할 수 없는 그런 일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진짜로 자기가 자기 심봉을 믿지 못한다면은 그것은 아예 세세생생에 끄달릴 것입니다. 진짜로 믿어야 합니다. 진짜로 믿고 물러서지 말고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항상 거기에서 무한의 그 능력이 나와서, 불가사의한 문제가 나오더라도 ‘아, 참 이럴 수가 있나. 참 감사하구나.’ 또 어떤 게 나와서 모르걸랑은 ‘아이구, 이렇게 광대한 것이 나왔는데 나는 도대체 알 수가 없으니 이게 무엇인가?’ 그때 의정을 내는 겁니다. 아니, 내 심봉, 즉 말하자면 내가 가지고 있는 참 심봉을 의심을 하면은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의정, 바로 내 심봉을 의정을 내서가 아니라, 내 심봉을 진짜로 믿되 만약에 거기서 나오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의심이 났을 때 의정을 내는 거란 얘깁니다.

그러니 진짜로 믿고 물러서지 않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거기다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맡겨 놔야 그것이 프로펠러 돌아가듯 그렇게 돌아가면서 우리는 바로 그 모든 일체를 요리를 해서 용탕도 먹을 수 있고 개구리탕도 맛을 볼 수가 있고, 천탕 만탕 다 맛을, 천 가지 만 가지 맛을 볼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맛이 좋다 나쁘다 할 수 없으리만큼 돼야 ‘무’ 소리가 나옵니다. 그리고 여여하다는 말이 나오는 거지, 덮어 놓고 사량으로 알고 ‘무!’ 해서도 아니 되고, 덮어 놓고 사량으로 알고 이해만 하고 여여하다고 말해도 그것은 한데 떨어지는 말입니다.

자기가 있는 곳이 도량이 되게 하려면…
문) 유마경에 ‘즉심시도장(卽心是道場)’이라는 말이 있거든요. 즉, 정한 마음이 도장이다. 스님께서도 자기가 있는 곳이 바로 도량이라고 가르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우리 생활 자체가 바로 도장이 될 수 있게끔 어떻게 그 공부를 해 나가야 할는지요.

답) 평상시에 우리가 생활 속에서 때로는 부엌에 들어가면 식모가 되고 때로는 안방에 들어가면 마님이 되고, 남편을 만나면 아내가 되고 자식을 만나면 어머니가 되고. 또 남자도 역시 그렇고요. 그러니까 역시 그 화해서 나투어서 돌아가는 이 자체가 평상심으로서, 평상 활용을 이렇게 하고 있는 이 도리를 한데 합쳐서 누가 하느냐 이겁니다. 그 여러 가지 건을 갖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고 하는 것이 이 한 사람 앞에 나오고 있기 때문에 그 도장이 아니겠습니까. 부엌에 들어가면 부엌에 들어가는 대로 도장이요, 또는 안방에 들어가면 안방대로의 도장이니, 어찌 이 지구 하나가, 아니 우주 천하가 따로따로 있겠습니까.

한 배를 타고 우리는 그 한 배 안에서 지금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한 배 안에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이것도 저것도 하는데, 한생각에서 수만 가지를 하는데 어떻게 그게 평상심이 아니며 어떻게 도장이 아니겠습니까. 부엌에 들어가도 도장이요, 밖에 나와도 도장이요, 앉아도 도장이요, 변소에 가도 도장이라. 어느 한 군데 빼놓음이 없이 자기가 가는 곳 족족 그게 도장이 되는 거죠.

그런데 또 자기가 있기 때문에 그게 도장이 될 수가 있는 거지, 자기가 없다면야 뭐 도장이 될 것도 없고 안될 것도 없는 거죠. 자기가 없는데 뭐가 있겠습니까. 그 때문에 자기가 원인이요, 자기가 근본이요, 근본의 공이라 이겁니다. 공이면서도 움죽거리니 그 여여함은 어디가 있겠는가. 그것이 다, 그 마음으로 하여금 짓는 것이 업도 지을 수 있고 또 이게 선도 지을 수 있으니까 그것이 바로 전체 합해서 누가 하고 있는가. 내가 하고 있다면 전체가 다 도다. 도 아닌 게 없다. 도의 장소다 이겁니다, 전부가.

무시당하면 욱 하고 올라와요
문) 저는 예전부터 제가 무시를 당하는 것 같으면 무지 화가 나요. 공부하면서 좀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욱 하고 올라올 때가 많습니다. 이런 마음들이 잘 안 놓아져서 속상합니다.

답) 우리가 나쁜 생각은 조금도 하지 말고 살아야 되겠죠. 나쁜 생각을 하면은 벌써 자기부터도 좋지 못하니까요. 하여튼 내가 능력이 있다고 해서 남을 하대하고 보거나 이러면 안 되죠. 그것은 내 모습과 같고 내 아픔과 같은 거니까요. 모두가 밉고 곱고가 없어요. 사람이 살다 보면 아주 이 고통스럽게 복장이 올라올 때가 많죠. 그런데 그게 우리가 천년만년 살 줄 알기 때문에 그 복통이 올라오도록 화가 나는 거예요. 내가 금방 지금 죽는다 이런다면, 죽을 줄 안다면은 그 금방 죽을 텐데 뭐 그렇게 그러겠어요. 그런데 죽을 줄 모르니깐 그렇게 야단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도 지금 사는 게 삶이 없이 사는 거예요. 그냥 탤런트 역할 하는 것처럼 사는 거예요, 우리가. 알고 보면 악쓰고 화낼 게 하나도 없고요, 모질게 할 일이 하나도 없고요. 그저 걸림이 없이 이 공부를 꾸준히 길게 끊어지지 않고 그냥 가는 거죠. 그래서 내 몸뚱이를 하나 잡아먹고 나니까 한 가정을 또 잡아먹고 또 그 모든 가정들을 다 잡아먹게 되더라. 다 잡아먹고 나니까 뭘 잡아먹어야 하느냐 하니까 또 딴 나라에도 잡아먹어야 되겠다. 이게 잡아먹어서 잡아먹는 게 아니라 공한 줄을 알게끔 자꾸 발현시켜 주는 거죠. 이렇게 해 놓으면은 저절로 이게 밝게 찾아 올 거다. 멀지 않다. 만약에 백 년이 간다거나 십 년이 간다면은 한 반절, 오년 밖에는 안 간다. 이렇게 할 수 있죠.

지금 많이 밝아지기는 밝아졌는데 너무 물질계로만 밝아지죠. 그러니까 정신계도 같이 밝아져야만이 이게 모두가 우주와 모두 지구, 이 다른 혹성도 형성이 되는 건데, 보고 듣고 이러는 것만 지금 야단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죠. 그 반면에 발달되는 분들은 발달되고요. 이 공부를 해 가면서 같이 더불어 이렇게 살고 더불어 가고 있고 더불어 이렇게 굴레 바퀴가 돌아가듯 하는구나 하고 침착하게 생각하세요. 나 아닌 정말 진짜 나가 없다면 이런 생각도 못하고 이렇게 고생할 생각도 못하고 고생하지도 않습니다.

아들이 나에게 마음을 열지 않아요
문) 저는 제 아들에게 잘하느라고 애 쓰는데 언제부턴가 제 자식이 저에게 마음을 열지를 않아요. 대체 어떻게 문제를 풀어야 할지 난감합니다.


답) 아들의 마음도 부모의 마음이고 부모의 마음도 자식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깐 우리가 촛불을 켜듯이 그 초는 한 자루를 켜도 한 방에 가득하게 실리죠. 그러니까 이 촛불처럼 내 마음이 자식의 마음으로 가서 불이 켜지기도 하고 자식이 또 효도를 하면 부모에게도 와서 불이 켜지고 그럽니다. 그러니깐 너무 걱정 말고 사시고 열심히 관하시면 낫습니다. 그런 사람이 한 둘 아닙니다. 울지 말고 사세요.

그러니까 무조건 자기를 믿어야 합니다. 무조건 자기를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습니까. 제삼자를 믿을 수가 있나요? 자기 자성불을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어요? 자성불이라고 한다면 또 위에다 올려놓고서 자기는 밑에 내려앉을까 봐 주인공이라고 그런 겁니다. 평등하게 항상 같이 하기 위해서. ‘너만이 이끌 수 있잖아. 너만이 모두 공을 만들 수도 있거니와 공마당을 만들 수 있잖아. 그래야 공을 치지.’

그리고 둘 아니게 한다는 소리는 내가 가끔 말을 하죠. 아비가 자식 묘지에 오면은 자식이 하나가 되고 자식이 아비 묘지로 가면 부모가 하나가 된다고. 부처가 된다고. 그래서 “색색가지 그 만물이, 모래알 같은 만물의 색색가지는 어떻게 다 담당하시렵니까?” 하니까 “한 생각이면 되지 두 생각 가지고 하나?” 이랬대요. 그러면 그 모래알 같은 색색가지가 어떻게 감당이 되겠나. 모래알이 하나가 이렇게 돌아서 나가려면은 그것도 적지 않을 겁니다. 우리 사는 게 한 찰나 찰나 돌아가거든요. 그래 이 도리를 정말이지 꼭 믿고 자기를 꼭 믿으셔야 합니다. 정말 꼭 믿지 않으면 안 돼요. ‘너만이 해결할 수 있어. 일거수일투족 너만이 살리고 죽일 수도 있고, 해결할 수 있는 건 너뿐이야.’ 하고 믿고 맡기세요.

그래서 마음이 좀 가난해선 안 된다 이러는 겁니다. 마음이 둥글어야 되고 너 나를 둘로 보지 말고 나같이 봐라. 자기같이 생각해라. 자기같이 생각하면 뭐든지 안되는 게 없어요. 남을 업신여기지도 않고, 자기만 같으면. 자기같이만 생각해라 이겁니다. 못하든 잘하든 자기같이 생각해서 둘 아니게 항상 믿고 해라. 예전에 어느 스님이 처음 어린애를 머리 깎아 줄 때 생각이 납니다. “네가 비구가 되든지 내가 비구니가 되든지 이래야 네 머릴 깎아 주지 않겠느냐?” 이러고 하셔서 “한 찰나건만, 여자 남자가 모습은 다르지만 어찌 마음이야 둘이겠습니까.” 촐랑촐랑 어린 게 말을 하니까 한 쪽으로는 기특하기도 하지만 한 쪽으로는 얄밉기도 했을 거라고 생각이 돼요. 그러니깐 “그러면 네가 동자가 못 되면 내가 비구니가 되지, 뭐.” “그럼 잠깐 찰난데 그냥 그렇게 하세요.” 그랬죠. 그냥 거추장하게 법을 청하지도 않고 말입니다.

그러니깐 내가 왜 이런 소리를 하느냐 하면 한 찰나에 가고 오는 거. 가고 옴이 없이 오는 거. 결정할 시간이 어디 있고 결정을 낼 시간이 어디 있나.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있어서 하려 해도 내가 한다 그러고 합니까? 함이 없이 해야죠. 한 찰나기 때문에. 누구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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