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희종 교수 (서울대)- 불광 아카데미 ‘생명과학의 문제와 불교의 생명윤리’

죽음은 부정적 아닌 삶의 한 모습
자본주의 생명존중은 ‘생명집착’
“다수가 믿는 사실과 진실은 달라
불법은 이 틈새를 바라보는 것”
만물은 137억년 시간을 뚫고
모두 함께하는 존재임을 기억해야
단절된 이웃의 손을 잡아주면
그것이 곧 수행이며 생명존중

 

▲ 우희종 교수는 … 1958년생으로 서울대 졸업 후 동경대 대학원에서 생명약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펜실베니아대학 의과대 박사 후 연구원, 하버드대 의과대 강사, 보스튼대 의과대 조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로 재직중에 있다. 민주화교수협의회 의장, 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 조계종 생명윤리위원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생명과학과 선〉 〈붓다와 다인이 만난다면〉 등이 있다.
단순히 살생을 하지 않는 것이 생명존중일까? ‘생명존중’은 불교에서 늘 강조하는 말이지만 이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희종 교수가 5월 29일 불광교육원 아카데미 강좌 ‘현대사회, 불교에 길을 묻다’ 첫강좌에서 ‘생명과학의 문제와 불교의 생명윤리’에 대해 강의했다. 그는 진정한 생명존중은 비폭력 수행과 함께 우리 삶속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을 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정리=정혜숙 기자  bwjhs@hyunbul.com

이번 수업에서 말하는 것은 생명 존중 비폭력 수행이 우리 삶속에서 어떻게 어우러져 있는지에 대해 얘기하고자 합니다. 137억년 쯤에 우주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후 지구가 만들어지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여러분이나 제가 2013년 대한민국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은 지구의 탄생에서부터 우주의 탄생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파리 모기나 한 마리 돼지가 나와 동시대에 존재하기 위해 137억년 긴 시간을 기다린 끝에 이렇게 함께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생명이란 매우 소중한 존재죠.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생명존중은 생명집착일 수 있습니다. 죽음은 나쁜 것이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봅니다. ‘생자필멸’은 우리 삶의 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죽음은 마치 피해야 하고 안 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진정한 부처님 말씀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의 삶이 쌓여 무수히 많은 미래를 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세계는 큰 놈이나 작은 놈이나 우주를 담고 있습니다. 생명 안에 이 우주가 담겨 있는 것이죠. 이것이 생명체의 특징이며 개체 고유성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 개체마다 자기만의 고유성이 있습니다. 자기만의 탄생 삶 죽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 자식이라도 내가 병들어 죽을 때 대신 죽을 수는 없습니다. 자식도 나 대신 죽어줄 수 없는 거죠. 사람이건 동물이건 개체로 존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생명 존중은 죽음을 피하는 것이 아닌 주인으로서의 죽음입니다. 평소 삶의 연장일 뿐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고통의 문제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고통이 어디서 오는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모든 존재는 생노병사를 겪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생노병사를 겪는 제자들에게 신통력을 발휘해 그것을 낫게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 고통을 들여다보며 고통의 본질 탐욕과 욕심 불필요한 고통과 소멸에 대한 모습 이런 것들을 살펴보라고 했을 뿐입니다.

이런 관계성은 고통과 비폭력의 문제와 연결돼 있습니다. 그럼 폭력은 무엇입니까? 폭력이란 모든 생명체나 이 세상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저는 관계의 단절을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자식 잘 되라고 하는 부모님의 회초리는 폭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화가 났다고 이유 없이 자식을 때린다면 그것은 폭력입니다. 결국 폭력이란 내 소중한 부인이나 자식 등과의 관계를 왜곡시키고 단절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이란 연기의 실상이며 연기법의 체득입니다. 나를 포함한 관계성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명 자체가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무명을 깨고 깨달음의 세계로 나간다는 것 그 자체가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수행은 비폭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이 수행입니다. 무명을 깨고 연기실상을 바라보는 것, 나와 너의 관계, 바람직한 모습을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속한 집단, 뭇 생명체까지 확대시킨 것이 수행입니다. 내 개인 우리 사회의 뭇생명체 속에서 왜곡된 상황을 바로 잡는 것이죠.

과학문명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과학의 혜택을 너무 많이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과학이 끊임없이 발전한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그렇죠. 그런데 비과학적인 얘기를 하면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하죠. 이것이 모순입니다. 현재 비과학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후에는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들이 가진 비과학적인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과학이 발전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지금의 과학은 불완전한 것입니다. 과학은 당대의 과학과 싸워서 발전합니다. 당대의 과학적 시각을 비평하면서 끊임없이 지평을 넓힐 때 과학은 발전하는 것이죠. 지금의 과학이 끊임없이 발전한다는 과학적 사실에서 사실과 진실의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 수 있습니다.

사실과 진실은 어떻게 다릅니까? 진실은 진리에 의해서 사실은 사물의 이치 즉 사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단어로 지칭되는 개념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내가 가진 단어 말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말이라는 것은 개념입니다. 안이비설신의를 통해 만든 의식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말의 세계라는 것은 한정된 조그마한 공간일 뿐입니다. 우리는 말의 감옥에 살고 있습니다. 존재는 언어로 구성돼 있습니다.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시대와 문화에 구애받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입니다. 2500년전 부처님 말씀 같이 말이죠. 사실이라는 것은 그 집단의 다수가 믿는 것입니다. 지금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죠. 중세 때는 네모라고 했잖아요. 둥글다 말하면 화형을 당했습니다.

중세 때 사람과 지금 저희가 얼마나 다를까요? 여러분 지구가 도는 걸 느낄 수 있나요? 둥글다고 말한 과학자가 다수이기 때문에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이처럼 과학은 열려 있는 것입니다. 과학자일수록 과학적 사실은 변할 수 있고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녀 재판 같은 경우도 당시 권력자가 휘두른 횡포에 무고한 여성이 마녀로 몰렸고 민중들은 그것을 사실로 믿어버린 것입니다. 유신정권 시절 인혁당 사건 같은 경우도 학생들을 사형선고를 내려 18시간만에 사형시켜버잖아요. 이런 것이 바로 당시의 사실로 인정돼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이처럼 사실과 진실의 틈새는 항상 존재합니다.

인간사는 모두 사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이렇게 사실과 진실로 이루어진 세상의 틈새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진실의 연기적 세상에 깨어 있으라는 얘기이며 그런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여기에 자연스럽게 비폭력의 삶이 이어져 있습니다. 사실을 진실에서 떼어내어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사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사실을 통제하는 자들이 힘과 권력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사실을 특정 집단에 유리하게 만드는 사람들 즉 정치 권력자 자본 권력자 언론권력자들 등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삼성을 말할 수 있겠는데요. 삼성은 노조도 없고 산업 재해도 없습니다. 삼성반도체에서 근무했던 젊은 여성 근로자들이 백혈병으로 쓰러져 소송을 하니, 자신들이 유리한 자료만 외국회사에 넘겨 이상 없음을 밝혀냈죠. 이렇게 노조도 재해도 없는 기업이 삼성이 돼 버렸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수행과 비폭력과 사실과 진실의 깨어 있음을 통해서 제대로 된 바람직한 관계의 회복을 위해 자신의 삶을 던지라는 것입니다.

종교를 관념적으로 생각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생명이란 것도 관계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자신의 소중함을 바라보는 것이고 무명에 가득찬 나를 깨우는 것이 수행이고 비폭력 그 자체입니다. 참선하러 선방에 가보면 가족 다 내팽개치고 몇 년씩 수행만 하시는 재가 거사들이 있습니다. 제가 그 선방 입승이라면 그분들 다 쫓아버릴 것입니다. 관계의 회복이 부처님 말씀이라고 전제한다면 선방에서 도 닦는 게 뭐 그리 대단하냐는 거지요. 아버지와의 관계 자식과의 관계 이것을 제대로 살리는 게 수행이지 선방에 몇 년 앉아 있는 것이 수행은 아닙니다. 내 가족이나 이웃 중에 힘들어 하는 가족이 없는지 아픔이 없는지 살필 때 그것이 수행이고 비폭력이며 부처님 말씀의 길입니다.
불교의 생명윤리는 내 이웃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관계성 회복을 위해 자신의 삶을 그쪽으로 만들어 가라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내 가족들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부처님의 대자대비와 동일한 것입니다.

평상심이 곧 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평범하다는 것은 인간사에 늘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희노애락 생로병사 애별리고처럼 평범하다는 것은 특별함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본질은 과학 발전 전후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세익스피어의 작품이나 〈춘향전〉 같은 작품은 현대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죠.
과학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끊임없이 발전하지만 내 삶의 본질이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들 삶을 자본주의 과학으로 바라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본주의와 과학의 눈으로 끊임없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무엇이 부족하다 등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허상을 쫓는 삶입니다. 삶의 모습 이대로가 평범한 것이며 도 통한 것입니다.

결국 생명 존중이라는 것은 관계성에 대한 재인식입니다. 생명존중은 당당하게 삶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자리에서도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면 내 다음 생애에 커다란 자원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 어렵게 생명존중을 바라보면서 생명집착을 존중으로 바라보는 이 자본주의 시대의 착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별의별 거 다 먹고 병 고쳐서 살고 이런 것이 생명 존중이 아닙니다. 지금 지구 저 편에서는 단 1불만 있어도 살 수 있는데 그것이 없어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첨단과학 시대에 수백억 달러를 투자해 만든 의료 상품들은 가진 자들의 생명을 연장시키는데 필요한 것이지 이것이 정말 필요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 혜택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업에 국민세금 투자하는 유일한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불자로서 이렇게 사실로 이루어진 이 세상에서 사실과 진실의 틈새에 깨어 있음이 생명존중이며 삶의 윤리입니다. 내 삶의 현장에서 이를 실천을 통해 이루어낸다면 그것이 평범한 삶이며 또 도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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