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탄생과 연꽃

영취산 설법의 연꽃 한 송이
마하가섭이 미소로 화답해
‘깨달음의 상징’ 자리매김

진흙 속에 피어나는 연꽃
세상 물들지 않는 청정함 비유

동아시아 문학 안에서도
연꽃은 중요한 소재 활용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처럼
  
서 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하는 이별이게,

蓮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엇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 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꽃으로 장엄된 부처님의 세계, 그 세계 한 가운데에서 가장 빛나는 꽃, 바로 연꽃이다.

불교의 등장 이전부터 인도에서 수많은 신화에 등장했지만, 이 꽃의 거룩한 의미를 알아본 자는 없었다. 영취산에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설법하시던 부처님이 문든 연꽃 한 송이를 들어보였다. 인도 신화에서는 창조주 브라흐마가 우주를 창조했던 곳이며, 혼돈의 물 밑에 잠자는 영원한 정령인 나라야나의 배꼽에서 태어난 꽃으로 신성시되던 꽃이었으나, 더러운 진흙 속에서 피는 이 꽃을 세존이 들어보였던 뜻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오직 한 사람만 세존의 뜻을 알고 미소로 화답하였으니 그가 바로 마하가섭이다. ‘염화미소(拈華微笑)’의 에피소드에서부터 연꽃은 깨달음의 상징이 되었다.

연꽃에 깃든 불교적인 의미는 무궁무진하다. 혼탁한 세상에 물들지 않고 맑고 미묘한 향기를 담고 있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의 꽃, 꽃과 열매를 동시에 나타나는 화과동시(花果同時)의 꽃, 그래서 중생과 부처가 근본적으로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실상’을 상징하는 꽃이며,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구품 연지에 피어있는 즐거움의 꽃이다.

그것은 오탁악세에 살면서도 세상에 물들지 않는 수행자처럼 맑고 고귀한 꽃이며 물방울이 연잎에 스며들지 않고 굴러 떨어지는 것처럼 악행이 수행자들의 마음을 물들이지 못한다. 연꽃의 향기가 세상을 가득 채우듯이 고결한 인품은 세상을 정화시킨다.

연꽃의 아름다움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듯이 수행자의 덕행은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준다. 덕을 행하는 자는 부드럽고 연약한 연꽃 줄기가 바람에 꺾이지 않는 것처럼 겸손하게 몸을 낮추면서도 항상 올곧다.

꽃과 열매가 동시에 맺히듯이 착한 행동은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게 마련이다. 온갖 꽃들의 싹은 서로 비슷하지만 연꽃의 싹은 처음부터 다르듯이, 될성부른 사람은 아무리 몸을 낮추어도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다. 남루한 옷차림에도 그의 인격은 고귀하게 빛난다.

이처럼 청정하고 고귀한 연꽃은 그 자태만으로도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천하의 명문, 〈애련설〉을 지은 송대 신유학자 주돈이는 “진흙에서 나왔으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고 출렁이는 물에 씻겨 깨끗하되 요염하지 않고, 속은 통하고 밖은 곧으며, 덩굴도 뻗지 않고 가지도 치지 않으며,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 꼿꼿하고 깨끗이 서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 있지만 함부로 가까이 할 수 없다”고 연꽃의 덕을 칭송하고 있다.

은일을 즐기던 도연명이 사랑한 국화도 아니고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부귀영화의 꽃 모란도 아니지만, 세상에 있으되 세상의 온갖 탐욕에 물들지 않는 연꽃은 주돈이 이후 군자의 꽃으로 선비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동아시아 문화에서 연꽃은 문학작품과 그림의 소재로 널리 사용되었다. 단원이 그린 〈하화청정〉에는 찌는 듯한 더위에 연못에 피어난 연꽃과 그 주변에서 놀고 있는 한 쌍의 고추잠자리가 묘사되어 있다. 풍속화에서 순간 포착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단원은 이 그림에서도 한 쌍의 고추잠자리가 연꽃 주위를 선회하는 순간의 모습을 사진을 찍듯 잘 포착하고 있다.

이 그림은 서양화의 음영 기법을 응용하여 연꽃의 세밀한 묘사와 연잎이 시들어가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그려내고 있다. 춤추듯 날아오르는 한 쌍의 고추잠자리와 살짝 몸을 기울이는 연꽃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여름날의 상쾌함을 전해준다.

불교미술에서 연꽃은 불상의 대좌나 광배, 그리고 석탑이나 부도에 새겨놓는 문양으로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 불단과 천정에도 연꽃 문양이 그려져 있고 기와나 창살, 심지어 벽돌까지도 연꽃의 문양이 사용되고 있다. 연꽃은 이처럼 사찰의 모든 곳에서 사용되고 있지만 무던히도 겸손한 꽃이다. 연꽃은 그 자체로 화려한 조명을 받기보다 불상을 모시는 좌대로서, 또는 석등을 받치고 있는 받침대로서 그렇게 몸을 낮추어 다른 것들을 빛나게 하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하셨을 때에도 연꽃은 그저 부처님의 발밑에서 피어올라 동서남북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을 때마다 부처님의 발을 받쳐주었을 뿐, 그 존재를 자랑하지 않았다.
〈마지마니까야〉는 부처님 탄생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래는 태어나자마자 발을 땅에 딛고 북쪽을 향해서 흰색 양산을 드리운 채 일곱 걸음을 걸었다. 일체제방을 바라보고 황소의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 가장 선한 자, 가장 연장자이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생이니, 이후로 나에게 새로운 생은 없으리라.’”

종교학자 엘리아데는 부처님이 내디딘 일곱 걸음을 우주의 일곱 행성에 해당하는 일곱 층을 가로지르는 상징적 행위라고 해석한다. 일곱 층의 우주를 가로질러 세계의 정상에 도달한 부처님은 말 그대로 가장 높은 자이며 그것은 공간적으로 세계를 초월함을 의미한다.

그와 동시에 부처님은 시간을 초월한다. 왜냐하면 우주의 정상에서 세계가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곳은 가장 오래된 곳이며 이곳에 선 부처님은 태초의 존재로서 “나는 가장 연장자”라고 외친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주의 탄생 이전의 장소에 선 부처님은 더 이상 윤회의 세상을 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생이 나의 마지막 생이다”라고 사자후를 하신 것이다.

부처님이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피어올랐던 연꽃은 탄생의 의미와 동시에 청정하고 거룩한 수행을 상징한다. 진흙 속에서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부처님 또한 이 세상에 머물지만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것임을.

부처님 오신 날이다. 거리마다 오색 등을 내다걸고 사거리에는 석탑도 세우고 부처님의 탄생을 축하한다.
거리에서 만나는 연등은 봄의 햇살을 받아 산뜻하게 빛난다. 봄날이 가고 여름이 오면,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단원의 연꽃도 만날 것이다.

작고한 시인은 말한다.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이 아니라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처럼, 그것도 엇그제가 아니라 한 두 철 전에 만나고 가는 것처럼, 섭섭하지만 아주 조금만 섭섭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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