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의 지척에 있고 싶은 초의 스님
초의의 아픈 몸 걱정 가눌길 없어
대흥사로 돌아가길 재촉하는 추사

▲ 〈영해타운첩〉
초의선사가 추사를 찾아 제주를 찾은 것은 1843년경이다. 당시 소치는 제주목사 이용현(李容鉉)의 막하(幕下)에 머물다가, 추사의 소개로 해남 우수사로 부임한 신헌의 막하로 옮겼다.
따라서 초의가 제주도에 머물 당시 소치는 제주 목사의 막하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번에 소개하는 추사의 편지는 〈나가묵연첩〉과〈영해타운첩〉에 수록된 것으로, 〈완당전집〉 〈여초의〉에는 누락된 것인데, 이 내용으로 보아 당시 초의는 제주도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말을 타다 다친 상처가 더 심해졌던 초의는 한동안 제주 객지에서 어려움을 겪었던가 보다. 초의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있었던 추사였지만 유배된 죄인의 처지였기에 그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는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마음을 졸이며, 하루라도 빨리 대흥사로 돌아가길 재촉하는 그의 편지는 이렇다.

아픈 곳이 더 심해져 차도가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객지에서 손님으로 지내며 치료가 여의치 않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 졸이며 걱정하는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다만 다시 생각해 보니 병든 몸으로 어찌하여 빙빙 맴돌며 머물러 있기만 하고 곧 바로 돌아가지 않으십니까. 절대로 여기에 얽매여 방심하고 돌아다니지 마십시오. 가령 오늘이나 내일이라도 떠나는 배가 있으면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손잡고 이별할 수 없는 것이 정말로 서운하기만 합니다. 먼 앞날을 생각 생각해서라도 병든 몸을 이끌고 오가다가 쓸데없이 몸만 망쳐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굳게 먹고 바로 떠나 이곳에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 않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에 침규를 보내 대신 작별을 대신합니다. 모든 것은 침규의 입에 (침규의 입이 어떻게 하느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나머지는 배가 순풍에 따라 뜻한 대로 건너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만 줄입니다. 돌아간 뒤에 바로 무사히 건넸다는 소식을 전해주십시오. 8월30일 늑편

(卽聞患處添頓 不得差安 客中之客 調治知難如意 不勝憧憧懸慮 第更思之 以若病軀 何以低回遲留 不卽歸去也 切勿以此牽? 放心回旋 雖今明 如有船發 幸圖付歸 如何 不得把別 寔屬?? 百里前頭 又不可曳病來往 徒致觸扶 亦須斷意直往 無使顧係於此中 亦可也 玆以委送鍼? 以爲替別之也 都在鍼之口致耳 餘只翼一帆隨順 如意波羅密 姑不具磬 惟歸後 卽示安過回音 八月晦日 便)


이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초의의 아픈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은 듯하다. 아픈 몸을 이끌고 이리 저리 전전했던 초의의 처지를 알고 있었던 추사는 “아픈 곳이 더 심해져 차도가 없다는 말을 듣고” “마음을 가눌 길이 없을”정도로 걱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의는 추사의 지척에 있으면서 지기의 어려움을 덜어주고 싶은 심정이 강했던 것일까. 좀처럼 제주를 떠나려하지 않았나보다. 지기의 이런 마음 모를 리 없던 추사였기에 “병든 몸으로 어찌하여 빙빙 맴돌며 머물러 있기만 하고 곧 바로 돌아가지 않으냐”는 것이다.
“절대로 여기에 얽매여 방심하고 돌아다니지 말고”곧 바로 배편이 되는대로 대흥사로 돌아가길 재촉하면서 “마음을 굳게 먹고” 바로 떠나 후일을 도모하잔다.


서로 사모하는 정을 나눈 벗, 추사는 뱃길을 떠나는 초의를 위해 자기를 대신해 침규(鍼?)를 보내 초의의 무사안녕을 기원하였다. 침규는 뱃길을 안전하게 인도해 준다는 바닷고기로, 공미라고도 부른다. 실제 침규가 뱃길을 인도했지는 알 수 없지만 초의를 위한 추사의 마음을 이렇게 절실한 것이었다.
풍랑을 헤치고 떠나는 초의, 성치 않은 몸으로 떠나야했던 당시의 상황을 잘 드러낸 이 편지는 “돌아간 뒤 무사히 건넜다는 소식을 전해”달라는 이 말은 초의를 배려하는 추사의 우정이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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