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의의 안부를 애타게 기다린 것을 알 수 있는 〈벽해타운첩〉의 편지.
제주에서 말을 타다 엉덩이에 큰 상처를 입었던 초의는 완쾌되지 않은 채 대흥사로 돌아갔다. 〈〈완당전집〉〉〈여초의〉 19신에도 소개된 이 편지는 〈벽해타운첩〉이 발굴된 후, 1843년 10월 10일에 쓴 편지임이 밝혀진 셈이다.
따라서 초의가 제주도를 출발, 대흥사로 돌아 온 시점은 이 해 늦가을로 추정된다. 특히 추사는 성치않은 몸으로 돌아간 초의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는데, 이 편지에는 그의 애틋한 마음이 행간에 오롯이 배어난다. 〈벽해타운첩〉에 실린 이 편지는 다음과 같다. 

그대를 보낸 후로 소식이 없어 안절부절 했습니다. 바로 우리 집 하인에게 그대의 편지를 받고, 흐뭇하고 상쾌할 뿐만 아니라 피안에 이른 것 같으니 이후 설령 장애가 있다한들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어 생각해보니 산중에서 몸을 조리한지도 여러 날이 되었는데 과연 더 나아진 상황인지요. 오히려 늘 염려가 됩니다. 나의 상황은 예전처럼 초췌합니다.


더구나 병까지 겹쳐 재앙과 고통이 심하니 어찌해야 합니까. 등항(燈缸: 질그릇으로 만든 등)은 우리 집 하인 편에 보냈는데 철로 부리를 만들어 보완하는 것이 어떨지요. 자목련과 돌 네 점, 오곡을 받았으니 감읍할 만합니다. 오곡은 함부로 쓸 것이 아닙니다. 후에 오는 인편을 기다려 다시 상세히 알려주기 바랍니다. 팔이 아프고 바빠서 간신히 적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1843년 10월 10일 륵
안경은 과연 효험을 보셨나요. 화로는 멀리 보내기 어려워서 보내지 못했습니다. 특히 안타깝고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自送師未得回音 方切憧憧 卽從家隸 獲得見手 非徒?慰到波岸 以後 設有些障 便無?他 第想山中調治己多日 果有勝相 旋庸爲念 此狀依昔蕉萃 又添疾?苦甚 奈何 燈缸玆以奉送便 以鐵嘴補完如何 辛夷花與四石五曲 依領可感 曲可不以空用 俟後便詳示之爲望 臂痛且忙艱草 不宣 癸卯 十月十日
鏡眼果見效耳 爐則難於遠致 不得付去 殊可歎可歎耳)

분명 초의는 1843년 여름까지도 제주도에 머물렀다. 따라서 이 편지가 1843년 10월 10일에 쓴 것임으로 그가 제주를 떠난 것은 이 해 늦가을이라 추정된다.
특히 추사는 제주도를 떠난 후, 소식이 두절되었던 초의의 안부를 애타게 기다린다. 집안의 하인을 통해 초의의 편지를 받은 후에야 ‘피안에 이른 것 같이’ 상쾌하고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하니 그의 걱정이 얼마나 컸는지를 잘 드러낸다. 실제 제주도에서 입은 초의의 부상은 후일 경향의 지인들 사이에서 ‘초의가 말을 타다가 팔이 부러졌다거나 다리를 다쳤다’고 와전되기도 하였다.
풍문이란 이렇게 실제와 다른 내용으로 확대되는 속성을 지닌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풍문의 폐단을 ‘다른 사람이 좋다고 하여도 내가 살피고, 다른 사람들이 나쁘다고 하여도 내가 살펴야한다’고 경계한 것이리라.


한편 추사는 제주에서 초의에게 등항을 선물한 이외에도 안경을 선물했음이 처음으로 밝혀진 셈이다. 추사가 선물한 안경은 중국에서 수입된 것인지 아니면 경주 남석으로 만든 안경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당시 귀품이었을 안경을 선물한 것은 추사와 초의의 관계를 극명히 드러내는 일이라 하겠다.
안경의 역사를 대략 살펴보니 17세기 경주 남석을 가공해 만든 수정 안경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순조 년간에 안경이 유행했다고 한다. 이에 앞서 1590년 통신부사로 일본을 다녀온 문신 김성일의 안경이 전해진다. 따라서 초의는 추사를 통해 신문물을 접했음이 더욱 분명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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