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굴의 無影樹 〈9〉-탄허 스님 탄신 100년 증언- 혜거 스님

혜거 스님
‘바쁘다’소리 절대 안 해
스님의 ‘주역’은 대중의 희망 방편
예언가·도참사상가로 보면 안돼
공부도량 ‘화엄학회’ 원력 못 이뤄

-스님과 탄허 스님과의 인연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나요?
저는 고향인 영암의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면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외삼촌인 김지견 박사의 소개로 탄허 스님에게로 오게 되었습니다.

-4·19가 나고 서울에서 승려대회가 열렸는데 스님은 승려대회에 참가하셨나요? 그곳에서의 추억은 무엇이었나요?
정월 보름이나 해제 때에 있었던 돌림법문이 기억납니다. 전 대중이 법상에 올라가서 법문을 하는 것인데, 지목을 당한 스님들은 안 올라가겠다고 할 말이 없다고 난리가 났죠. 대중이 법상에 안 올라가려고 하면 스님께서 한 마디라도 하고 내려오라고 그러셨어요. 그러면 어떤 스님은 “공부 잘해봅시다”는 말을 하고 내려온 경우도 있어요. 저는 그런 전통이 살아 있어야 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때 스님은 육경신(六庚申)을 지켰어요. 1년에 여섯 번 하는 경신인데, 이때에는 밤 11시부터 다음 날 11시까지 잠을 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간에는 잠을 자지 않기 위해서 온갖 것, 별의 별 이야기가 다 나옵니다. 책을 안 펴고 논강을 하는 식입니다. 그때에 스님은 앉아 계시면서 모든 질문에 다 답을 주십니다. 제가 보기에 그때가 제일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어요. 끝도 없이 밝혀주시고 그랬는데, 잘 모른다고 하면 가져온 노트에다가 그 내용을 손수 다 써주셨어요. 그때가 스님에게 제일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입니다. 스님은 그렇게 하시는 것을 월정사에 오셔서도 하셨고, 강릉포교당에서도 하셨어요. 물론 그때에 참가하지 않는 대중들도 있어요. 스님은 그때에 별의 별 것을 다 이야기해 주셨는데, 그것이 수행점검을 할 수 있는 좋은 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스님이 일생을 두고 번역하신 원력을 지켜보신 것을 들려주세요.
제가 영은사 시절이나, 그 후에 시봉을 할 때에 지켜본 것에 의하면 우리 스님은 늘 한가롭게 지내시면서 그렇게 엄청난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스님은 대단한 역경을 하셨으면서도 평소에는 바쁘다는 말이 없었어요. 절대 바쁘다는 소리를 안 하셨어요. 스님은 정확하게 밤 아홉 시가 되면 취침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첫잠을 새벽 한 시, 두 시나 세 시에 깨시면 더 이상 주무시지 않고 그때부터 아침 공양시간까지 번역하십니다. 그러면 그 새벽에 하신 원고가 수북이 쌓입니다. 그것은 낮에 하루 종일을 하신 것과 같은 분량입니다. 그리고 스님은 어떤 원고를 5년에 걸려서 하겠다고 약속을 하시지만, 그렇게 꼭 새벽작업을 하셔서는 3년 내에 완성을 시키십니다. 그리고 절 밖에 나가시면, 여행가방에 항상 원고지를 갖고 다니십니다. 해외에 나가셔도 시차 적응에 상관없이 원고 작업을 하셨어요. 인도와 미국에 가실 때에도 그렇고, 제가 말년에 시봉할 때에 보면 지방에 바람을 쐬러 가실 때에도 새벽에는 원고 작업을 하셨습니다. 제가 보기에 스님은 시간 개념이 딱! 시계이십니다. 이렇게 생활이 시계처럼 정확하신 분은 우리 스님 말고 뵌 일이 없어요. 사람들은 이런 것을 그까짓 것 하지만, 그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스님은 그 많은 경전을 번역하시면서도 사전을 안 갖고 하셨어요. 지금 세상에 사전을 안 갖고 번역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심지어는 사전도 없이 화엄경을 주석까지 달고 그러셨잖아요. 화엄경의 중간에 탄허 지(誌)라고 한 것이 스님의 주석입니다. 사전을 갖지 않고, 그렇게 번역할 수 있는 어른이 누가 있겠습니까.

-탄허 스님은 주역에 대한 관심도 많으셨고, 미래 예측도 많이 하셨지요?
스님이 주역, 미래 예언을 많이 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스님이 그런 것에 관심이 많으신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스님의 뜻, 취지를 바르게 알 필요가 있어요. 저도 스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에 반발하고, 이의도 가졌던 당사자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저도 주역 공부를 해 보고, 스님 말년에 스님에게 들은 이야기에 의해서 스님이 왜 그렇게 주역을 자주 말씀하셨는지를 이해하게 됐어요. 스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가 스님에게 왜 자꾸 예언을 하시냐고 또 물어보았어요. 그랬더니 스님은 “예언은 소설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셨어요. 스님은 소설은 듣고 내버리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소설은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스님은 이런 개념으로 주역과 예측을 대하셨어요. 내가 스님에게 “그러면 왜 하십니까?” 하였어요. 스님은 이 말에 대해서 “성인은 길을 제시하는 것뿐이고, 사람들은 세월을 지내면서 그 길로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했어요. 이렇게 스님은 예언을 이런 개념으로 답하셨어요. 스님은 “성인은 대중들에게 획을 그어 주고, 대중들은 그것을 따라간다”고 하셨어요. 우리 스님은 이런 개념에서 성인과 같이 국민들에게, 대중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획을 그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획을 그어 주신 것이 한국이 앞으로는 중국과 연륙이 될 것이고,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 되는 국가가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민족이, 국민들이 그런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하신 것인데, 이런 말을 그냥 하면은 누가 듣냐고 하시면서 주역에 바탕을 두어서 하신 것입니다. 스님은 그래서 간방(艮方)에서 시작되어, 간방에서 끝이 난다고 하셨는데, 지금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스님 말씀대로 되게 생겼어요. 즉 스님은 성인으로서 획을 그어주고, 앞으로 그런 방향으로 된다는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스님을 예언가, 도참사상가 이런 차원으로 보면 안 됩니다.

-탄허 스님의 그런 실력을 갖게 된 것에는 은사인 한암 스님의 영향이 있었다고 봐야 되지 않습니까?
그럼요. 한암 스님이 탄허 스님을 신뢰한 것은 한암 스님이 경봉 스님에게 보낸 편지가 대변합니다. 그 편지에서 한암 스님은 스님을 자신보다 낫다고 하셨잖아요. 그것 가지고 설명이 다 됩니다. 그렇게 자기 상좌를 신뢰하는 스님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스님이 노후에 저에게 늘 말씀하신 것이 당신이 환갑 이전만 해도 한암 스님에게 배우지 않은 것은 자신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즉, 육십이 넘어서야 한암 스님에게 안 배운 것도 자신이 있었다고 했어요. 이런 말씀은 자주 하셨어요. 탄허 스님은 한암 스님이 없었으면 그런 실력, 위상이 나올 수가 없었어요. 스님은 한암 스님의 영향으로 그렇게 되셨어요. 스님은 그리고 한암 스님의 화엄경토를 존중했어요. 제가 보기에 한문의 문리라든가, 학문적인 차원에서는 스님이 한암 스님보다 더 낫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한암 스님의 것(토)을 안 고쳐요. 이렇게 어른 것을 존중했어요. 보통 사람들 같으면, 옛날 스님이 하신 것을 두고 흐름상에서 잘못되었다고 자기의 해석을 고집할 것입니다. 공부 좀 했다고 하면 “은사스님이 실수했어” 하면서 고치고, 이리 나오지요. 그러나 우리 스님은 한암 스님의 토를 따라가셨어요. 고집 안 부려요. 이런 면에서 스님은 한암 스님을 존중하셨고, 한암 스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봐야 됩니다.

-스님은 공부하는 사람을 좋아하시고, 인재양성을 무척 강조하셨지요?
제가 자광사에서 스님을 모시고 있다가 서울 진관사에 간 적이 있어요. 그때 진관사에서 스님의 옷을 만들어드리면서, 저에게도 옷 한 벌을 주셨어요. 그런데 스님의 옷은 제대로 맞았는데 제 옷은 팔이 짝짝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퉁퉁거리니깐, 스님은 “중이 공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옷 타령을 한다”고 야단을 치셨어요. 스님은 공부하는 것에 대해서는 경책을 많이 하시고, 공부를 우선적으로 중요하게 여기셨어요. 스님은 그리고 학하리에다가 공부도량을 만들려고 설계도 하시고 그랬어요. 그리고 화엄학회를 만들려고 간판도 써주셨어요. 그러나 그 뜻이 안 이루어졌지요. 지금에 와서 제가 생각을 해보니, 스님은 말년에는 되게 답답하셨을 거예요. 대전 학하리에 터전만을 만들어 놓으면 모든 것이 될 줄로 알았는데, 마음대로 안 되니깐 고민이 많았을 거예요. 그야말로 큰 원(願)을 펼쳐만 놓으시고, 실현하시질 못했어요. 스님은 돌아가시면서 두 가지를 못한 것을 아쉬워했어요. 그 하나는 불교학개론을 펴내겠다고 하셨는데, 그것을 하시지 못했어요. 스님은 팔만대장경을 총괄하는 개론서가 나와야 된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머릿속에는 그것에 대한 개요가 다 있었어요. 두 번째는 학하리에 공부도량을 만들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였지요. 공부하는 정통 도량을 만들어 학인들을 가르칠 수 있는 터전을 만들려고 하셨지요. 그래서 스님은 몸져 누우시면서 일착으로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 두 가지였습니다.

-탄허 스님의 정체성을 말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에 대한 혜거스님의 의견을 듣고 싶어요.
제가 보기에 우리 스님의 본체는 선사(禪師)이십니다. 스님은 절대로 한 발짝도 선사의 기본에서 이탈하시지 않았어요. 스님은 절대 선사입니다. 그것에 대한 첫째 이유가, 모든 선사들의 공통점이 무엇이냐 하면 시간 누수가 절대로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님은 시간이 추입니다. 이 어른은 일거수 일투족이, 그 시간에 따라서 정해진 일을 정확하게 하십니다. 시공간이라는 좌판에서 절대 이탈을 안 한 분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 이유는 스님은 어떤 경우에도 40대 이후부터는 어느 선사 가 와서 거량을 해도 바로 답이 나오셨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어요. 스님은 누가 와서 질문을 하면 바로 대경직현(對鏡直顯)입니다. 머뭇거린 적이 없어요. 바로 나옵니다. 그 누가 와서 물어도 스님은 잘 몰라서 답을 못한 적이 없어요. 스님은 한 번도 누가 물어서 머뭇거린 적이 없어요. 스님이 머뭇거린 적이 있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별의 별 것을 물어도, 다 말을 하셨어요. 이것은 선의 입장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스님은 마지막 가실 적에도 이런 모습을 보이셨어요. 입적하시기 직전에 상좌 스님이 “스님, 이 세상에 인연법으로 오셨는데, 이제 가실 때가 되었습니다. 한 말씀 남겨 주세요” 하였더니 스님은 즉각 “일체 말이 없어”라고 답하셨어요. 질문한 스님의 질문에 바로 나왔어요. 이것이 마지막 거량입니다. 스승과 제자가 입적 직전에 이런 거량을 할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대산이라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님의 본체입니다. 스님은 시공을 전혀 이탈하지 않았어요. 입적 직전의 이 구절을 적용하면 스님의 본분을 알 수 있어요. 스님이 번역을 하신 것은 그런 것에 대한 작용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스님의 작용, 용(用)만 보고 스님을 말합니다.

-탄허 스님의 의식 저변에는 민족의식이 강렬하다고 보입니다. 이런 점은 부친이 민족종교인 보천교 간부를 하신 것과 무관할 수 없다고 보입니다.
그런 점은 배제할 수가 없겠지요. 스님의 집안이 그렇게 어려우시면서도, 부친은 상해 임시정부에 엄청난 자금을 보내셨어요. 그런 영향과 바탕에서 스님은 민족주의자이셨어요. 만약 출가를 안 하셨으면 민족운동에 뛰어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스님은 민족종교인 보천교가 쇠퇴한 것을 경영실패에서 찾았어요. 보천교가 그렇게 된 것은, 가장 큰 실책은 돈에 대한 관념이 없었다고 하셨어요. 스님은 아무리 중요 사상이라고 하더라도 경제, 경영 관리가 부실하면 조직이 운영될 수 없다고 하셨어요. 스님은 여러 가지 문제를 찾으시면서도 현실을 직시하셨어요. 스님은 가장 가까운 원인을 찾아내시는 탁월한 안목이 있으셨지요. 그리고 스님의 이런 현실인식은 유교를 유년 시절에 배운 것에도 영향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1982년 가을, 차를 타고 월정사를 들어가시다가 일주문에서 걸어가시면서 유년 시절에 공부한 것, 입산하게 된 동기 등을 회고하듯이 말씀하셨는데 제가 그때에는 주의깊게 듣지 않아서 그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때 스님은 저에게 당신이 공부하신 것이 머리가 좋아서 그렇게 된 줄로 아냐고 하시면서, 스님은 머리가 나빠서 온 종일 글을 읽었다고 하셨어요. 머리 좋은 사람은 책을 읽지 않았지만, 당신은 머리가 나빠서 하루 종일 책만 읽었다고 하시면서 공부하는 방법을 조목조목 일러주셨어요. 그런데 제가 치밀하지 못해서 그런 것을 기억하지 못해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1971년 1군사령부 법당 행사에 참석한 탄허 스님(앞줄 오른쪽 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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