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 스님 탄신 100년 증언- 진관 스님

진관 스님/ 진관사 중창, 진관사 주지 전국비구니회 수석부회장 등 역임 진관사 회주
늘 새벽 참선…강백이면서 대선사
진관사 주련·편액 탄허 스님 선묵
환갑 잔치상 차렸다고 역정
일본 해일 등 예언 실제로 일어나

-탄허 스님은 이곳 진관사에 자주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곳 진관사에 자주 오셨는데, 많이 오신 큰스님은 탄허 스님, 석주 스님, 춘성 스님이에요. 탄허 스님은 여기에 오셔서 화엄경을 교정보신다고 오셨는데, 오시면 한 열흘씩 있다가 가시고 그랬지요. 그럴 때에는 무비 스님, 각성 스님, 명호근, 전창열 같은 사람이 왔다 가고 삼보 스님도 왔다 갔지요.

-탄허 스님은 어느 고승과 친근하셨나요?
월산 스님과 제일 친하고, 관응 스님과 석주 스님하고도 친하게 지내셨어요. 하여튼 큰스님들이 나를 너무 좋아했어요. 나라는 사람을 큰스님들이 다 믿으셔서 진관사에 자주, 많이 오셨어요. 석주 스님과 춘성 스님이 제일 많이 여길 오셨지요. 진관사를 좋아하신 스님은 춘성 스님이셨어요. 한 번은 춘성 스님이 파계사에 계실 때에, 그때는 차도 없던 시절이지요. 택시를 대절해서 화계사 입승 스님하고, 오셔서는 이곳 큰방에 드러누우셨어요. 그러고 나서는 날보고, 팥죽을 먹고 싶다고 팥죽을 쑤어 달라고 그러셔요. 그래 내가 그러면 조금 기다리시라고, 어디 팥죽이 금방 되냐고 하고는 후원에서 바로 팥죽을 쑤어서 드렸지요. 그러니깐 춘성스님이 잘 잡수시고, 좋다고 하시고는 화계사로 가셨어요. 그리고 나서 며칠 있다가 돌아가셨어요.

-탄허 스님과 진관 스님은 오대산 스님이었기에 인연이 보통이 아니었다고 보입니다.
어쨌든, 내가 개인적으로 오대산 중이니까 탄허 스님을 잘 모시려고 신경을 썼고, 여러 곳을 모시고 다녔어요. 세검정의 석파정도 가 보았고, 이문동 보문난야에도 갔어요. 내가 스님이 가시는데 안 간 데가 없어요. 그러나 용주사, 동국대 대학선원에는 안 가봤어요. 탄허 스님은 이곳 진관사에 자주 오셨지요. 탄허 스님은 오시면 꼭 새벽 두 시에 일어나셔서 참선을 하십니다. 사람들은 탄허 스님을 대강백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스님은 선사(禪師)예요. 선사라니깐. 난 어떤 스님이 도인(道人)이라고 그래도 도인인지 아닌지 그런 거 몰라요. 자기가 도인이 돼야 도인을 알아보지, 그렇지 않으면 도인을 알아보지 못하거든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어느 정도 도가 깊어서, 그 사람의 도를 내가 알아봐야, 알아볼 정도가 되어야 아! 저 스님의 도를 알고, 저 스님을 도인으로 알아보지요. 그냥 말만 갖고 도인으로 하는 것은 알 수가 없지요. 어쨌든 탄허 스님은 대선사(大禪師)예요.

-이곳 진관사에 걸려 있는 주련은 대부분 탄허 스님의 글씨가 맞지요?
이 절의 주련과 편액은 탄허 스님이 다 쓰신 것이지요. 내가 탄허 스님에게 “스님 주련 좀 써주세요” 그랬어요. 그러니까 스님은 “주련 글씨를 뭐에다 쓰려고” 그러셔요. 그래 내가 “스님 글 솜씨 두었다가 뭘 하실랴고 그래요”라고 그랬지요. 그래서 써 주신 것이에요. 여기 동정각(動靜閣)의 글씨도 탄허 스님이 쓰신 것이지요.

-진관 스님은 탄허 스님의 유묵을 갖고 계시지요?
스님이 대원암에 계실 적에, 내가 스님께 “글을 써주시면 글을 걸어 놓으려고 하니 하나 써주세요” 하였어요. 그랬더니 스님은 “진관사가 네 절이냐, 토끼도 세 구멍을 판다고 하니 너도 어디다가 절을 해라”고 그러셨어요.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글을 써 달라고 말을 안 했는데, 어느 날 스님이 글씨를 써서, 병풍까지 만들어서 가지고 오셨더라구요. 신도 중에 권보살이라고 있었어요. 살아 있었으면 나이 구십이 될 터인데, 돌아가고 지금은 없어요. 권무지랭이라고 그랬는데, 이 보살과 내가 탄허 스님이 계신 학하리에 같이 갔는데, 그 보살에게 ‘판치생모’와 어머니 49재 법문에 대한 것을 써준 적이 있어요.

-진관 스님은 탄허 스님과 고락을 같이 하셨어요. 어떤 내용이 있을까요?
지금 기억나는 것은 노장님이 환갑날 서울에서 월정사로 내려갈 때에 내가 모시고 갔어요. 그런데 스님은 내려가시면서 말도 못하게 막 화를 내시고 그러셔요. 그래서 내가 이왕 차린 것을 걷어치울 수도 없으니 그냥 내려가셔서 절 세 번을 받고 가시지, 왜 그러시느냐고 그랬어요. 월정사를 갔더니 큰 방에 탁자 하나에 상을 차려 놓았어요, 많이 차리지도 않았어요. 상좌들이 절을 받으시라 그러는데, 그래도 탄허 스님은 막 험한 말을 하시면서 역정을 내셨어요.

-최근에 일본 해일이 일어나자, 탄허 스님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탄허 스님이 일본이 물에 잠긴다는 예측을 하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은 스님을 보고 강사, 법사라고 하지만 스님은 지금 현재 일을 맞췄다고 볼 수 있어요. 시국의 일을 미리 맞춘 것이지요. 예전에 스님하고 선우휘씨라고 조선일보에 있던 분하고 대담을 하시고 나서, 그 내용이 어떤 잡지에 났어요. 그래 내가 그 잡지를 잘 보관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네요.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시기 전에 스님이 여기 계셨는데, “뭔가 이상하다”고 그러셔요. 내가 “왜 그러시냐”고 하니깐, 탄허 스님이 새벽에 일어나서 정진을 하는데 소나무가 뚝 꺾이는 소리가 나는 것 같다고 했어요. 그때 육여사 동생이 바자회를 하는데 떡이나 보내 달라고 그래서 함지박에 담아 놓았는데, 그 다음날 새벽 다섯 시에 대통령이 돌아가셨다고 그랬어요. 그래 만들어 놓은 떡을 어떻게 하냐고 하니깐 “그냥 보내 주세요” 해서 떡을 보내 주었던 적이 있어요. 스님이 하신 말씀은 무척 많아요. 일본이 물바다가 된다고 하셨고, 빙하가 녹아서 삼한사온이 없어진다는 얘기도 하시고, 앞으로는 여(女) 장관이 난다, 3일 장관도 있다고 그러셨어요. 그래서 내가 스님에게 “무슨 3일 장관이 있어요” 그랬지요. 그러니깐 스님은 “두고 보면 알지” 그랬어요. 그런데 그 후에 주양자라는 보사부장관이 1주일을 하고 그만두었잖아요. 또 여자들이 장관도 하고, 대통령도 된다고 그러셨어요. 그러시면서 오뉴월 삼복더위에 남자들은 목을 조르고 다니지만 여자들은 벌거벗고 다닌다고 그랬어요. 남자들은 넥타이를 매고 다니고, 요즘 여자들이 거의 벗고 다니잖아요, 그러니깐 스님의 말이 꼭 맞는 거예요. 그리고 오대산 스님들에게 “진관이 데리고 가서 월정사 주지시키고, 비구들은 방구석에서 밥을 얻어 먹으라”고 그랬어요. 그러시면서 앞으로는 비구니들이 힘을 쓴다고 그러셨어요.

-탄허 스님의 미래 예측은 주역원리, 역학에 의한 것으로 당시에도 큰 파장을 주었지요?
탄허 스님은 우리나라는 평화통일은 안 된다고 그러셨어요. 북한의 변동을 말하시면서, 애들이 성냥곽 갖고 놀면서 불장난을 하다가 성냥곽 안에 있는 성냥에 불이 번져서 확 타버리듯한 그런 증세는 있을 것이라고 했어요. 또 이북에 나이 젊은 사람이 무슨 장(長)이 돼서 변화는 있을 것이라고 그러셨어요. 그리고 천안까지는 조금 위험하고, 천안 아래로는 괜찮다는 말도 하셨어요. 또 삼보 같은 스님이 언젠가는 스님에게 차를 사줄 것이라고 그랬어요. 그래 내가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하니까 “아니 두고 보라구” 그러셔요. 그랬더니 삼보 스님이 월남에를 갔다오더니만 스님에게 새 차도 아닌 헌차를 사 드렸어요. 그때 탄허 스님은 “차가 없는 것보다는 안 났냐”고 나에게 그러시더라구요.

-탄허 스님은 법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였을까요. 스님과 연고 있었던 재가자들이 관련되어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전창열이 한 게 아니냐고 그러지만, 전창열은 그 사태를 잘 무마하려고 하였어요. 사람들은 이런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지요. 법난은 여러 명의 군법사들이 투서를 해 갖고 일어난 거예요. 그때 노태우씨가 보안사령관을 할 적인데, 처음에 군인들이 돈이 없으니 일을 벌려 놓고 나서 절을 털었는데, 나온 게 있나요. 그때 낙산사 최원철 스님이 맞아서 죽었어요, 원철 스님의 영결식에 내가 갔었지요. 그리고 그때에 제일 당한 스님은 행원 스님의 상좌인 보문사의 정수 스님이에요. 최근에 돌아가셨다고 그러지요. 혜성 스님도 당하고, 그때는 큰스님들도 다 갔다 왔지요. 월산 스님, 서옹 스님, 월하 스님도 갔다 왔어요. 전창열이 한 것이 아니에요. 그런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지요.

-탄허 스님은 당신 스스로 오래 사신다고 하였지만, 71세에 입적하였지요?
운모를 잡수시고 잘못됐어요. 처음에는 여기 계실 때에 스님이 편찮으시다고 그래서 서울대병원을 잡아 놓았다고 입원을 하시라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탄허 스님이 입원은 무슨 입원이냐고 하시면서 안 가셨어요. 그 무렵에 어떤 한의사가 날보고 씀바귀를 캐서, 그것을 찧으면 하얀 즙이 나오는데 그것을 아픈 부위에 바르면 진통을 없애줄 것이라고 그래서, 내가 그것을 해 드렸죠. 그 이후에 한양대병원에 계시다가 오대산으로 들어가셔서 하루인가, 이틀인가 있다가 가셨지요.

-병원에는 가 보셨어요?
내가 한양대병원에 가 보니, 탄허 스님이 월산 스님과 전화를 하시더라구요. 탄허 스님이 월산 스님에게 같이 가시자고 그래요. 그러니깐 월산 스님이 먼저 가서 자리를 잡아 놓으라고 그러셨어요. 내가 그것을 지켜봤지요.

-오대산 월정사에서 있었던 영결식에는 가셨지요?
그럼요. 탄허 스님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나, 명우 스님, 자민 스님 셋이서 같이 갔어요. 그때에 왕십리에 살던 보살이 있었는데, 오대산을 외호한다는 적멸보궁 봉찬회에 다니던 보살이에요. 그 보살이 탄허 스님이 돌아가셨다고 하니까 수의를 하라고 삼베 값을 가져왔어요. 그래서 여기서 그 삼베를 꿰매서 수의를 만들어 보살하고 같이 갔지요.
-스님은 수덕사에서도 수행을 하셨는데 오대산 문중과 수덕사 문중은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수덕사가 선풍을 일으켰다고 하지만 한암 스님 같은 청정, 계정혜 삼학을 갖춘 분은 없었어요. 어쨌거나 나는 만공스님은 친견 못 했어요. 그러나 수덕사 스님들 중에서 벽초·용음·지산 스님은 만났지요. 나는 그중에서 벽초 스님을 높이 치지요. 벽초 스님은 농사지으면서 선을 하는 것을 뭐라고 그러지, 그래 선농일치를 하신 분이에요. 그 스님은 굉장한 분이에요. 나는 그 스님을 존경해요. 보통 스님들은 그리 못해요. 내가 견성암에 있을 적에 논에 나가 모를 심는데, 비구니들이 거머리에 물릴까봐 다리에 갓바를 치고서 논에 들어갔어요. 그랬더니 일꾼들이 모를 평생 심어 봤어도 갓바를 치고 모를 심는 것은 처음 본다고 그래요. 그때 우리 비구니들이 수덕사 밖에 있는 초막에서 자고 먹고 하면서 논 관리를 해주었어요. 모도 심어 주고, 밥도 해주면서. 탑골승방 일조 스님의 상좌인 인창이라고 있었는데, 이 스님은 모 심는 것이 싫어서 남방으로 내려가서는 다시는 북방으로 오지를 않더라구요. 하여간에 누가 뭐래도 벽초 스님 같은 분도 없어요.

-왜 큰스님들이 안 나올까요?
지금은 솔직히 먹을 것, 입을 것, 신을 것이 흔해서 옛날 스님들이 하시던 것이 다 우습지요. 우리 때에는 사과 하나를 여덟 쪽으로 나누어서 먹었고, 아침에는 조죽을 끓여 먹었는데 그것도 얼굴이 훤히 비추는 죽이었어요. 그런 죽에 간장, 김치만이 상에 올라왔지요. 김도 딱 4분의 1로 잘라서 넉 장을 만들어 네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지요. 나는 새 양말이 들어오면 떨어질까 봐 미리 양말 안에다가 광목을 대고 누볐어요. 밑이 떨어질까 봐 새것을 그렇게 해서 신었지요. 그때에는 화장지가 있었나, 갈잎으로 쓰고 그랬지요. 혜각 스님이라고 단청하는 스님이 있었는데, 휴지를 갖다가 코를 닦고서는 그것을 말렸다가 또 닦고 그랬어요. 예전에는 선방 수좌들이 요와 이불을 갖고서 자는 법이 없었어요. 그냥 방석으로 배만 덮고 잤어요. 

진관사를 찾은 탄허 스님과 대중들.(앞줄 중앙이 탄허 스님, 앞줄 오른쪽 끝이 진관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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