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빗나간 예언

예언은 기본적으로 미래전망이다. 미래는 글자 그대로 아직 오지 않은 일이기에, 사실 알아맞힌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예측에 목이 말라한다. 그런데 정녕 중요한 것을 하나 잊어버리고 있는 것같다. 맞았다거나 틀렸다거나, 이런 평가에 대한 후일담이 없다. 그저 말해버릴 뿐, 그 뒤의 사후검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한 문제들 중에서 종교와 관련해서 이루어진 것 중에는 이런 말이 있다.

“인간의 지식수준이 높아지면 종교는 사라질 것이다.” 이런 전망은 합리주의적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대개 20세기 초에 이런 이야기가 많이 나돌았다. 아마도 진화론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던가?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종교 고유의 영역이 확보되고 있지는 않은가. 죽음이 있기에 종교는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유한을 극복하고 무한에 이르고자 하는 욕망이 종교적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틀린 예언 중의 하나로 주문(呪文)의 운명에 대한 것도 있다. “앞으로의 시대에는 비합리적인 주문과 같은 것은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해졌다. 미래는 합리주의의 시대라고 높이 노래 불려졌다. 그렇긴 했다. 합리주의의 시대가 왔다. 하지만 종교가 그러했던 것처럼 주문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주문 역시 종교를 구성하는 중요한 하나의 측면이 아니었던가 싶다.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말씀하신 뒤에, 그 “반야바라밀이야말로 위대한 신주(神呪)이고 위대한 명주(明呪)이며 위없는 주문이고 어디에고 견줄 데가 없는 주문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이 자리가 어디인가? 가장 진실한 최고의 지혜를 설하는 곳이 아닌가.

 

주문의 정체

“반야바라밀이야말로 위대한 신주이다”라는 문장을 통해서 볼 때, 주문의 정체는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반야바라밀이다. 앞에서 말했던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가지 범주)은 곧 존재하지 않는다(空)”라고 하는 인식, 그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이다. 이는 종래의 관점을 전복하는 것이 아닌가. 종래 우리는 많은 주문을 들어왔다.

그런데 〈반야심경〉은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것은 주문이 아니라고 말이다. 진실한 주문은 바로 반야바라밀 그 자체라고 말이다. 이러한 논리는 쉽게 동의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하나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 뒤에 나오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라는 것은 무엇인가? 없어도 되는 사족(蛇足)일까? 그렇게 보는 관점 역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분명히 반야바라밀이 곧 주문이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뒤에 나오는 주문이 없어도 되는 것일까? 있어야 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러할까? 왜 “반야바라밀이 곧 위대한 신주”라고 말씀하시고서는, 다시 또 “곧바로 주문을 설한다”라고 하셨던 것일까? 그 주문으로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를 말했던 것일까?

만약에 경전의 마지막 결구(結句)로 제시되어 있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라고 하는 주문을, 경전의 제일 앞에 제시해 두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되었다면 그 뒤에 이어질 말씀들은 결국 그 주문에 대한 해석이 되었으리라.

이는 결국 〈반야심경〉에는 반야바라밀의 정체성을 두가지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하나는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顯敎)에 의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앎의 세계를 떠난 언어(密敎)에 의해서이다. 오히려 보기에 따라서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라고 하는 밀교의 입장을 더욱 중시하면서, 〈반야심경〉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가 없어도 좋을 군더더기로만 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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