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문제와 과학의 역할

과학은 자연 이치파악하는 순수한 것
기술은 자본·욕망의해 좌우되는 비순수
CFC, DDT, 원자력 등 환경위기 초래
과학기술 중요하지만 의존주의 극복돼야

▲ 영국의 대표적인 킹스노스 석탄 발전소. 화석원료를 사용하면서 이뤄진 산업화와 기술발전, 그리고 과학지상주의는 급속한 생태계 파괴를 가져왔다.
神이라는 미망을 물리친 과학
과학자 뉴턴을 토대로한 철학자 데카르트의 계몽주의 사상의 출현은 인류역사의 전사와 후사를 나뉘게 만든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세계의 중심은 ‘신’이었다. 따라서 모든 과학은 신학과 신성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것이 지금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그 주장을 한 코페니르쿠스는 종교의 이름으로 화형을 당해야했고,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에서 화형직전까지 가야 했다. 그러던 것이 뉴턴과 데카르트 이후부터 달라진 것이다. 과학을 토대로 한 이성, 합리주의가 자연과 우주에서 신의 세계를 몰아낸 것이다.

그 이전에 ‘신’의 존재는 증명할 필요가 없는 ‘당연한 것’이었고, 과학이 신학 밑에서 검증 받아야할 대상이었지만, 오늘날은 반대로 신을 ‘과학적으로 증명’해야하는 압박을 받고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신이 과학 밑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 ‘과학적’이라는 말은 곧 객관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뜻하는 용어가 되었다.

그러다 이 과학은 기술과 결합해 드디어 산업혁명을 이루었고 엄청난 기술개발을 토대로 경제성장을 가속화 할 수 있었다. 또한 왕이 중심이던 절대왕조가 붕괴되고 만민이 평등하게 주인인 공화제, 민주주의 사회가 되었다. 종교와 신학의 압박으로부터 해방된 과학은 날개 돋힌듯 발전하였고 더욱이 기술과 자본이 결합되면서 그 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이제 달과 화성에 우주선을 쏘아올렸고, 전자산업과 IT의 발전은 해마다 거의 2~3배이상  갱신해왔다. 이러한 변화는 46억년의 지구역사, 200만년 인류역사로 보면 눈깜짝할 사이 밖에 안되는 불과 500년만의 인류의 위업이었다.

이제 과학의 위치는 이전과 완전히 반대의 상황이 되었다. 과학이 모든 진리의 검증도구가 된 것이다. 과학적이지 않으면 미신이고 비진리라고 생각한다. 과학주의의 절대성, 과학이 종교가 된 것이다. 기술에 대한 신뢰도 높아져서 모든 문제와 위험과 위기는 결국 기술로 돌파할 것이라는 믿음과 의존성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심화되는 과학기술 의존성
과거에는 삽이나 괭이로 도로를 닦고 건물을 짓던 것을, 오늘날에는 포크레인과 불도저를 앞세운 기술로 그 개발의 속도와 규모는 수십배에서 수백에 이르게 되었다. 이 말은 곧 자연을 개조하는 기술이 수십 수백배에 이른다는 말이다. 물론 ‘과학’은 자연의 이치를 파악하는 순수한 것이지만, ‘기술’은 결국 자본과 정치, 욕망에 의해 좌우되는 순수하지 못한 것이다, 기술발전이 문제지 과학발전은 선한 것으로 구분해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인간의 과학과 기술에 대한 무한 신뢰로 인해, 종국에는 우주의 진리를 다 밝혀내서 인간에게 유리하게 자연을 조작하겠다는 오만에 이르게 되었고,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자만까지 하게되었다.

그저 열심히 과학을 탐구하고 개발된 기술을 이용하여 더 많이 생산해 돈 벌고, 소비하며 살면, 일정한 시간적 간격은 있지만 결국에는 세계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고히 믿고 있다. 이러한 생활양식의 가장 표준이 되는 미국은, 지구온난화가 바로 화석연료 사용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마지막까지 부정하며 교토협약을 끝까지 가입하지 않았던 나라였다.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자연과 자원이 유한함에도, 정치경제를 연구하는 사회과학자들도 자원은 무한하다는 착각을 기반으로 과학적 추론을 해왔다. 또한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과거 300~400년동안 인류의 자원소비와 폐기로 인해 발생할 문제를 알아내지 못했고, 인간의 산업행위가 앞으로 10~20년 뒤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측할 수 없는 것이 현재 과학 수준이다.

그 많은 과학자들이 안전하다고 말해온 핵발전소가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사고를 접하고 나서야, 그들 주장이 완벽한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고 기술이 만능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닫게 된 것이다. 인간이 버린 폐기물과 오염을 결국 과학기술로 완전히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신화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된 것이다.

과학은 진리의 최소한
과학은 이론적으로도 완결성이 있어야 하지만 실험적으로도 보편성을 갖추어야 한다. 다시 말해 내가 실험하면 되는데 다른 사람이 하면 안된다면 그것은 과학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 그렇게 인정받은 것만이 공식적으로 과학적 사실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아직 평가되지 않은 더많은 실험과 이론들이 아직도 줄을 서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 나올 것이다.

사고 실험을 해보자. “과학은 계속 발전하고 있다”라는 말을 여러분은 동의하는가? 만약 동의한다면 이 말은, 밝혀내지 않은 과학의 발전영역이 아직도 많이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다시한번 질문해 보자. 그렇다면 자연계에서 과학이 밝혀낸 사실과 밝혀내지 않은 사실 중에 어느 영역이 많을까?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현재 밝혀진 과학적 진리는 전체의 일부분이라고 말한다. 더 많은 과학자들이 할 일이 많다고 한다.

다시 말해 우주의 총 진리를 100 이라고 한다면 현재의 과학이 밝혀낸 것을 많이 잡아 10%라고 하자. 그러면 우리는 아직 90%를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아니 거의 대부분을 모른다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도 있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의 과학은 현재수준서 진리의 최소한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현재의 과학적 사실을 진리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비과학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현재의 과학이 진리의 전부라고 주장하는 것이야 말로 오히려 ‘비과학적 자세’아닐까?

그럼에도 오늘 우리 인간은 그 10%의 사실을 진리의 100%라고 착각하며 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아직도 모르는 90%의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10%의 사실을 진리의 전체인양 생각하며, 자연과 인간에게 함부로 파괴하고 차별하고 학대해 왔던 것이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오만함, 그 교만이 오늘과 같은 위기를 초래했고, 위기의 징후도 발견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회복하는 방법도 찾지 못하게 만든 원인인 것이다.

환경위기를 초래한 과학기술주의
냉장고의 냉매로 쓰는 프레온가스(CFC)는 자연계에 본래 없던 것으로, 1928년 발명되어 듀퐁사가 생산한 가스였다. 당시에는 이 가스가 오존층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지만 60여년이 지난 지금 인류에게 치명적 위기를 초래할 물질임을 알게 되었다.

DDT는 1874년에 합성되어 만들어진 뒤 강력한 살충효과와 제초효과가 증명되었다. 이로 인해 벌레와 병충해로부터 해방되어 급격한 농업혁명을 이끌었다. 그러나 실용화 이후 약 2~30여년이 지난 뒤 1960년들어 레이첼 카슨 여사가 쓴 '침묵의 봄'이라는 책을 통해 이 화학물질에 대해 비극적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DDT로 만든 농약과 살충제로 인해 수많은 플랑크톤과 미생물이 체내에 중금속을 축적하게 되어 이를 잡아먹는 물고기, 또 그것을 먹는 새들의 몸에 농축되어 결국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결국 봄이와도 새가 울지 않게 되었다고 그녀의 저서 ‘침묵의 봄’은 말한다.

이러한 사례는 대단히 많다. 대표적으로는 원자력 발전소이다. 원전은 1) 값싸고, 2) 깨끗하고, 3) 안전하고 4) 무한에너지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3~40년이 수명인 원자력발전소를 위해, 거기서 나온 방사능폐기물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수백년이 지나야 할 정도이며,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처럼 한번 사고가 나면 기류를 따라 전세계가 피해를 입게 되고, 수백년동안 후손에게 까지 영향을 끼친다. 안전시설을 위해 비용이 훨씬 높아졌으며, 우라늄도 매장량이 불과 60여년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무한에너지가 아니다.

생태위기 해결은 문명적 전환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결국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해왔던 과학기술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시켜줄 것이라고 정부와 기업측의 과학기술자들도 말해왔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갈수록 의심스러운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대부분의 환경학자들과 눈맑은 사람들은 전혀 반대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

자연 스스로의 정화능력, 수용능력, 복구능력을 넘어서는,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과학기술에 힘입어 더 많은 자원을 수탈하고, 더 많은 상품을 소비하고, 더 빠른 속도로 쓰레기와 오염을 뱉어내고 있다. 인간 소비의 부산물까지 과학기술로 처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산소를 생산하여 지구의 허파라 불리는 아마존의 산림이 급속도로 훼손되고 있는 것을 어떻게 복구해 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 속에 살고 있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수만종의 생물들과 그 유전자들은 수백만년간의 지구 진화의 자산이다. 그렇게 없어지는 생물들을 어떻게 복구한다는 말인가.

DDT로 수질이 오염되고, 물속에 사는 생물들과 그것을 잡아먹는 다른 생물이 죽고 난 뒤에 어떻게 그 생명을 복구해 낸단 말인가. 오존층파괴로 발생한 피부암 등 수많은 질병환자들을 어떻게 원상으로 복구하고, 온난화 때문에 해수면이 상승하여 살던 마을과 터전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의 고향을 어떻게 기술로 복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글의 요점은 과학기술을 절대 부정하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반대로 과학의 위치를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실제 과학과 기술의 개발을 통해 오염과 파괴의 많은 부분을 해결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한다. 그러나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과학기술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 만능주의, 과학기술의존주의를 문제삼고자 하는 것이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의 삶, 큰 것이 좋고, 많은 것이 좋으며, 빠른 것이 좋다는 인간의 잘못된 생활양식의 전환이 근본이 되고 그 토대위에 과학기술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환경위기는 바로 그러한 전환을 강제하는 메시지이다.

그러한 근본적 전환없이 과학기술에만 의존하는 것은, 마치 산업사회에서 구멍난 것을 때워 현 지속불가능한 시스템을 유지하려 한다면, 피해발생의 시간을 늦추는 것일 뿐이며, 오히려 해결의 시점을 놓쳐 더 심각한 상황을 초래하여 결국 나중에는 손을 쓸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하는 위험한 사고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과학기술은 중요하지만 과학기술만이 능사라는 의존주의는 극복되어야 하며, 궁극적으로 자발적 가난, 청빈한 삶을 통해 "작은 것이 아름다운" 사회를 이루는 것이 생태사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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