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암베드카르 사후 현대인도불교

▲ 암베드카르 동상에 참배하는 인도인들

개종식 이후 불자 18만→325만 명↑
현재 인도 불자수 795만 여 명
암베드카르 사후 불교 정체돼
양적 성장 했으나 질적 성장은 낮아

1956년 10월 13일에 있었던 개종식에서 암베드카르와 40만 명의 불가촉천민들은 힌두교를 떠나 불자가 됐음을 천명했다. 이렇게 암베드카르에 의한 집단 개종으로 시작된 불교세력은‘신불교’라고 불리게 됐고 이렇게 불자가 된 이들은 ‘신불교도’가 됐다. 그러나 이 신불교운동은 시작과 동시에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1956년 12월 6일, 암베드카르가 재판(再版)을 위해 손보고 있던 자신의 책 〈붓다와 그의 가르침〉 원고 위에 엎드린 채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가 공식적으로 개종을 한 후 채 두 달도 되지 않던 시점이었다.
불교에 대해 많은 탐색과 모색 끝에 개종을 한 암베드카르와는 달리 불가촉천민들은 사실 불교에의 호감 보다는 그들의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으로 개종을 했다는 편이 옳다. 따라서 그들은 불교에 대해 그다지 많은 것을 알지 못했다. 암베드카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그들은 지도자를 잃었고 불교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릴 가능성도 컸다.

이때 새로이 불자가 된 이들에게 불교를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상카락시타였다. 상카락시타는 영국인으로 1950년 인도 사르나트에서 수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그는 암베드카르 생전에 그를 세차례 만난 적이 있었고 개종식에 대해 함께 의논을 하기도 했다. 암베드카르가 사망하던 날 그는 암베드카르와 함께 개종한 이들에게 연설을 하기 위해 개종식이 열렸던 나그푸르로 가던 길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지도자의 별세 소식을 듣고 비통에 빠진 이들을 위로하고 불교에 대해 가르치며 5일간 머물렀다. 그 동안에 약 3천명의 사람들이 또 불교에 귀의했다. 또한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상카락시타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설법을 하고 사원을 짓고 불상을 세우고 여러 의식들을 집전했다. 그는 1965년 영국으로 돌아갔지만 이후에도 자주 인도를 방문하고 신불교에 계속해서 관심을 보여주었다.

암베드카르 사후에도 몇 차례 대규모 개종식이 있었고 암베드카르 생전에 75만 명이었던 불자들의 수는 1957년 초에는 400만 명까지 증가했다. 그러나 그 이후 불교로의 개종운동은 주춤하게 되는데 이는 아마도 암베드카르의 추종자들이 거의 다 개종을 한 탓으로 보인다.
암베드카르는 전불가촉천민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지만 그가 가장 강하게 영향력을 행사한 집단은 자신이 속한 마하르 카스트였다. 그리고 그의 개종요청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한 것도 당연히 마하르 카스트였다. 따라서 대부분의 마하르 카스트가 개종을 하고 나자 개종운동은 그 기세가 한 풀 꺾이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암베드카르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불가촉천민들에게 개종을 설득할 수 있는 인물이 사라져 버렸다.

또한 개종을 한 불가촉천민들도 불교에 대해 알 기회를 그다지 많이 가지지 못했다. 상카락시타에 따르면 암베드카르 사후에 개종식은 암베드카르가 설립한 정당의 정치인들이나 대각회의 승려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정치인들은 신불교도들에게 불교에 대해 교육할 만큼 불교에 대해 알지 못했고 다른 나라에서 온 대각회의 승려들은 인도에 있는 자신들의 사원을 관리하기에 바쁜 처지였다. 그리고 외국인인 그들은 불가촉천민 출신인 신불교도들의 특수한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상카락시타는 대다수의 신불교도들이 개종식 이후에 한번도 승려들을 만나지 못하는 등, 불교를 접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반불교적인 생활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신불교도들은 개종 이후 어떤 사회적 변화를 느낄 수도 없었다. 개종을 하고 힌두교를 버렸다고는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상위 카스트들이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이전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개종으로 인한 심리적 효과는 무척 긍정적인 것이었다. 많은 신불교도들은 더 이상 자신들은 ‘천민’이 아니라 세계적인 종교인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어찌되었든 대규모 개종식의 결과로 불교인구는 크게 늘어났다. 1951년 18만 823명이었던 불교인구가 1961년 325만 227명에 달했으니 실로 급격하게 불자의 수가 증가한 것이다. 그러나 그 중 278만 9501명이 마하라스트라주에 거주한다는 사실은 개종운동이 위에서 언급한 대로 마하르 카스트에서 가장 활발하고 다른 주의 불가촉천민들 사이에서는 그에 미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1971년의 불교 인구는 385만 2377명이었다. 즉 암베드카르 사후에 신불교 운동이 그다지 성장하지 못했음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신불교 운동에 있어 암베드카르의 역할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지표라고도 할 수 있다.

2000년 실시된 인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당시 인도의 불교인구는 795만 5207명으로 전체 인구의 0.8%에 달한다. 지금도 종종 불가촉천민들이 집단개종식이 열리기도 한다. 집단개종식의 시초는 불교도들이었으나 현재 인도에서 개종식을 여는 불가촉천민들이 모두 불교로 개종하는 것은 아니다. 이슬람교나 기독교로의 개종도 거의 같은 수로 이루어지고 있다.

암베드카르 사후 지적되었던 불교에 대한 교육 부족도 많이 개선되었다. 싯다르타 대학, 밀린다 대학, 암베드카르 대학 등이 설립되었으며 빨리어와 불교학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다. 인도 출신 승려의 수도 늘었으며 의식집전가나 포교사를 양성하는 교육프로그램도 생겨났다. 그러나 수적인 성장에 비해 불교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라는 질적 성장은 아직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또한 인도에서만 볼 수 있는 매우 독특한 형태의 불교이라고 할 수 있는 신불교는 일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